아, 내 자존감은 어디로...
요즘 심부름 가는 것이 당연시되는 분위기다. 지금에 와서 못 가겠다고 뻗대거나 아님 갑자기 버럭 화를 내는 것도 생뚱맞다. 너무 늦은 감이 있다. 언제부터 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 시나브로, 야금야금, 알게 모르게, 부지불식간에 그렇게 진행돼 왔다.
심부름의 절정은 단연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다. 남자의 자존감을 사정없이 떨어뜨린다. 냄새도 냄새지만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이웃집 사람을 만날까 봐 조마조마하고 아슬아슬 하기까지 하다. 이웃집 사람을 만났을 때 아내가 아프다는 식의 핑계를 미리 마음속에 준비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문을 나선다.
이제 이런 심부름은 거의 고착화된 것 같다. 더 이상 과거로 되돌릴 수 없다. 이미 힘의 균형추는 아내에게로 급속히 기울고 있다. 이럴 때 자기합리화를 한다.
"그래, 남편도 이제 가사를 분담해야지. 일본에서는 황혼이혼이 대세라는데, 시간 있을 때 미리 점수 따 놔야지..."
헷갈린다. 나의 심부름은 자발적인가? 아님 비자발적인가? 둘 다 아닌 것 같다. 아직도 자발성과 비자발성 사이를 서성거리고 있다.
부부의 의미, 생각해보니
부부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아내에 대한 생각이 세월에 따라 조금씩 변해온 것 같다. 애인 같은 아내, 친구 같은 아내, 이웃 같은 아내. 부부란 뜨겁게 사랑하고, 두텁게 정을 쌓고, 때론 이웃처럼 적당한 거리를 두기도 하면서 살다 이윽고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만 사는 시한부 동거인이 아닐까?
동거인이라고 하니 좀 냉정한 느낌이다. 아내와 지금까지 IMF 때를 제외하면 큰 시련(싸움) 없이 잘 살아온 것 같다. 이유는 가정 환경이 비슷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나 아내나 어려움은 알되 배고프지 않은 정도의 가정에서 자랐다. 그래서 야무진 꿈이나 허황된 목표, 거창한 야망 같은 것이 애초에 없었다. 그러니까 현실을 직시하며 산 게 그나마 평탄한 결혼 생활을 유지해 온 비결이 아닐까?
나이를 먹어가니 가장 소중한 사람이 아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에 내 곁에 남는 사람은 아내뿐이니까. 아내도 나와 같은 생각이길 간절히(?) 바란다. 친구도 요즘 시큰둥해졌다. 자산 격차가 많이 나니 모든 게 조심스럽다. 50대를 전후해서 그리된 것 같다. 허심탄회한 얘기를 나누기 힘들다. 얘기할 때마다 상대방 입장을 생각하며 말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마음 놓고 대화를 진행하기 힘들다.
자식들도 어렸을 때나 쪽쪽 빨았지 머리가 크면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한다. 또 아이들과의 얘기는 아내만큼 잘 통하지 않는다.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아내만 남는다. 남자의 기대 수명이 여자 보다 짧다 보니 나의 임종을 아내가 지켜볼 확률이 높다. 죽은 후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 무서운 생각도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