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어 오브 이스트타운] 그래도 우리는 살아가야 하니까 |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메어 오브 이스트타운] 그래도 우리는 살아가야 하니까

글 : 김봉석 / 작가 2021-12-16

나이가 들면 대도시를 떠나 한적한 시골이나 소도시에 살고 싶어하는 이들이 꽤 있다. 내 마음 한구석에도 그런 생각은 있다. 다만 서울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고 있는 터라, 전혀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그리 내키지는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익숙한 곳에서,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다. 생활의 기반을 잡고 살아간다는 것은 여행으로 1, 2년 사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사는 것과 이곳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이 전혀 다르듯이.




소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미국의 영화, 드라마를 보다 보면, 막막하고 암울한 정서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절대로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랄까. 공부를 대단히 잘하거나, 프로팀에 들어갈 정도의 운동 실력이 있거나, 미남미녀라서 연예계 진출을 꿈꾸지 않는다면 대부분은 태어난 곳에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거리를 걸어가면 내가 누구인지 다 알고, 어제 한 행동이 바로 부모님 귀에 들어간다. 그러면서도 집단 괴롭힘, 불륜, 강간, 살인 등의 추악한 일과 범죄들은 끊이지 않는다. 어디는 도시를 지배하는 가문이나 사악한 집단 같은 것이 있어 주민들 모두를 옭아매기도 한다. 데이빗 린치가 영화, 드라마로 만들었던 <블루 벨벳>은 소도시의 공포를 초자연적으로 확장한 악몽이었다.


웨이브에 있는 HBO 시리즈 <메어 오브 이스트타운>도 소도시의 공포를 그린 범죄물이라 생각하며 보기 시작했다. 얼마 전 재미있게 본, 길리언 플린 원작의 <몸을 긋는 소녀>도 소재가 비슷했다. 가족과 마을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도시로 와 기자가 된 여성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돌아온다. 그리고 연이어 벌어진 살인사건을 취재하는 이야기다. 결국 추악한 과거가 드러나고, 주인공의 성장이 그려진다.


<메어 오브 이스트타운>의 주인공은 메어 형사다. 펜실베니아 이스트타운에서 태어났고, 모든 학교를 다녔고, 지금은 형사로 일하고 있다. 지금 메어는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몇 년 전 아들이 자살했고, 남편과 이혼했다. 손자인 드루를 데려가겠다는 아들의 전 여자친구와 대립 중이다. 사적인 문제 이외에도 복잡하다. 고등학교 친구의 딸인 케이티가 1년 전에 실종됐다. 단서를 거의 찾지 못했고, 케이티의 실종 수사를 촉구하는 시위가 계속된다. 수사를 지원하기 위해 콜린 제이블 형사가 파견되었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인데, 미혼모 에린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아이의 아빠인 딜런과 그의 여자친구인 브리아나가 에린이 살해당하기 직전 다투었다는 사실을 메어는 알게 된다.




에린의 아버지는 메어의 절친인 로리의 남편 사촌이고, 전 남편과도 가깝다. 브리아나의 아버지는 메어의 학교 동창이다. 한 다리만 건너면 모두 아는 사이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있었던 작은 사건들은 마을 사람들 모두 알고 있다. 누가 누구랑 사귀었는지, 누가 누구를 싫어하는지 같은 사소한 것들. 하지만 완전히 숨겨지는 것들 또한 있다. 소수만 따돌리고 비밀을 공유하는 경우가 있고, 당사자 외에는 아무로 모르게 은폐하는 비밀도 있다. 그리고 외부인에 대한 나쁜 소문이 퍼지면 바로 응징이 시작된다. 소도시는 결코 평화로운 곳이 아니다.


<메어 오브 이스트타운>은 메어의 사적인 생활과 공적인 수사과정을 오가며 진행된다. 굳이 비중을 따지면, 사적인 생활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더 많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범죄를 수사하다 보면 계속 아는 사람들, 과거의 사건들이 연관되어 있다. 과거를 떠올리며 그들과 대화하다 보면, 공적인 사건은 또한 개인적인 상처나 슬픔과 얽혀 있다. 메어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사적인 스토리를 배제하고 사건을 수사할 수도, 이야기할 수도 없다.


메어는 큰 사고를 쳐서 정직을 당하고, 심리 상담을 받게 된다. 상담을 하면서, 메어는 속에만 담아두었던 깊은 이야기를 하게 된다. 고등학교 때 농구부였던 메어는 중요한 경기에서 골을 넣고 도시의 영웅이 되었다. 메어의 백넘버는 영구 결번이 되었고, 그 시합은 지금도 마을 사람들 누구나 떠올리는 영광의 순간으로 남았다. 하지만 그뿐이다. 메어도, 농구부 주전들도 극적으로 삶이 바뀌지는 않았다. 누구는 암에 걸렸고, 누구는 마약중독 동생 때문에 힘들고, 누구는 이혼을 했고 등등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메어는 형사가 되었지만, 정작 아들을 마약중독에서 구하지 못했다.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중독자인 아들은 집에 들어와 물건을 훔치고 메어를 폭행하기도 했다. 아들의 죽음을 처음 목격한 딸 시오반에게도 큰 상처가 되었고, 결국 남편과도 이혼했다. 완벽주의자이고 자존심이 강한 메어에게는 너무나 힘든 상처였다. 




<메어 오브 이스트타운>은 과거의 상처 때문에 위기에 몰려 있던 메어가 서서히 벗어나고 타인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끔찍한 사건을 수사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치유한다. 누구에게나 상처는 있고, 누구에게나 도망치고 싶은 기억이 있고, 누구에게나 악몽이 존재한다.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앞으로 한걸음씩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외면하고 부정하고 싶었던 메어는 주변 사람들의 실수와 악행 그리고 죽음을 겪으면서 자신의 상처를 비로소 받아들이게 된다.


메어를 연기한 케이트 윈슬렛은 <메어 오브 이스트타운>으로 에미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2011년 출연한 시리즈 <밀드레드 피어스>에서도 에미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케이트 윈슬렛은 10년 만에 나온 시리즈에서도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메어는 타인의 시선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 집중하는 타입의 인물이다. 화장도 하지 않고, 옷도 대충 입고, 수사에만 돌진한다. <메어 오브 이스트타운>에서 케이트 윈슬렛은 전혀 예뻐보이려 애쓰지 않는다. 일부러 거칠고 투박한 메어의 얼굴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그것이 보다 매력적이다. 마흔을 훌쩍 넘긴 여성에게서 20대의 풋풋한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생을 충실하게 살아왔다면, 많은 실수와 잘못이 있었지만 모든 것을 인정하고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다른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단 한권의 소설을 썼고 많은 상을 받았지만, 이후에는 대학 강사로 지지부진한 삶을 살고 있는 라이언은 메어와 사랑에 빠진다. 그는 말한다. 삶을 예견하는 것은 이미 포기했다. 하지만 좋은 것은 언제나 갑자기 오게 된다고. 아무도 인생의 모든 것을 예측하고, 판단하여 결정할 수 없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불가항력의 순간, 상황들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나쁜 것도, 좋은 것도. <메어 오브 이스트타운>의 모든 이들이 그렇다. 최악의 순간을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예고 없이 찾아들기도 한다. 그것을 인간이 모두 콘트롤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메어도 그것을 어렴풋하게 알게 된다. 매정하게 외면하고,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다정하게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장 끔찍한 현실이 존재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가야 하니까. 잘 살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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