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는 뇌 건강에 독이 된다? “오히려 기억력 좋아졌다” |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은퇴는 뇌 건강에 독이 된다? “오히려 기억력 좋아졌다”

글 : 김웅철 / 지방자치TV 대표이사, 매일경제 전 도쿄특파원 2026-07-20

오랫동안 사회적 통념상 ‘은퇴’는 사회적 역할 상실과 그에 따른 인지기능 저하를 불러오는 부정적인 사건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최근 일본 와세다·게이오·교토대학교 공동 연구팀이 발표한 연구 결과는 이러한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뒤집고 있다.

19개국 7000명 이상의 데이터를 AI 알고리즘으로 분석한 결과, 은퇴가 오히려 뇌의 인지기능을 향상시킬 수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은퇴 후 단어 기억력 상승…“뇌는 더 활발해졌다”


연구팀은 미국·영국·유럽 등 19개국 50~80세 성인 남녀 7432명을 대상으로 은퇴 전후의 인지기능을 추적 조사했다. 기계학습(머신러닝)의 일종인 ‘인과 포레스트(Causal Forests)’ 기법을 활용해 정밀하게 분석한 결과, 은퇴한 사람들은 계속 일하는 사람들보다 단어 회상 테스트에서 평균 1.348개 더 많은 단어를 기억해냈다.


통계적으로 1.348개의 단어 기억력 차이는 표준편차의 0.42배에 해당하는 수치로, 공중보건학적으로 매우 유의미한 수준이라고 한다. 은퇴가 인지기능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가 교육적 개입만큼이나 강력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연구팀은 은퇴가 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주요 원인으로 직무 스트레스(Job strain) 해소와 건강한 생활습관으로의 변화를 꼽았다. ▶오랜 기간 이어온 업무상 압박과 책임감에서 벗어남으로써 뇌의 피로도가 급격히 낮아지고(스트레스 해소), ▶늘어난 여가시간을 운동이나 새로운 취미활동에 할애할 수 있게 돼 뇌에 긍정적인 자극을 준다(건강 투자 시간 확보)는 것.


은퇴 후 더 많은 신체 활동과 충분한 수면시간을 확보하게 되면서 뇌가 회복될 기회를 얻는다는 점을 연구팀은 강조했다.


와세다·게이오·교토대학교 공동 연구팀이 연구한 결과 은퇴가 오히려 뇌의 인지기능을 향상시킬 수 있음을 밝혀냈다.



은퇴 후 뇌 건강이 좋아진 경우의 특징은?


연구팀은 글로벌 노년학 연구의 황금 표준으로 불리는 세 가지 종횡단 데이터를 결합했다. 미국의 HRS(Health and Retirement Study), 영국의 ELSA(English Longitudinal Study of Ageing), 유럽 17개국의 SHARE(Survey of Health, Ageing and Retirement in Europe) 데이터를 통합해 총 19개국 50~80세 성인 남녀 7432명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분석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다음과 같은 3단계 추적 설계를 적용했다. ▶1단계(기초 조사)는 취업 상태인 대상자의 건강·소득·교육 수준 등 60여 개의 변수를 수집하고 ▶2단계(상태 확인)는 일정 기간 후 실제 은퇴 여부를 확인하고 ▶3단계(결과 측정)는 은퇴 최소 2년 후, 단어 기억 테스트(Word recall test)를 통해 인지기능을 측정해 은퇴의 장기적인 영향을 평가했다.


사회과학 연구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건강한 사람이 더 오래 일한다’는 등의 선택 편향(Selection Bias)이 꼽힌다. 단순히 은퇴자와 근로자를 비교하면 근로자의 뇌 기능이 더 좋아 보일 수밖에 없는데, 이는 일의 효과가 아니라 애초에 건강한 사람이 일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이러한 선택 편향을 해결하기 위해 ‘연금 수급 시작 연령(State Pension Age)’을 도구 변수(또는 조작 변수·Instrumental Variable)로 활용했다.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국가별 연금 제도를 기준으로 ‘제도 때문에 은퇴하게 된 사람들’의 데이터를 추출함으로써, 건강 상태와 상관없이 순수하게 ‘은퇴’라는 사건 자체가 인지기능에 미치는 인과적 영향을 분리해 낸 것이다.


또 이번 연구는 머신러닝 기법인 ‘인과 포레스트(Causal Forests)’가 활용됐다는 점에서 연구계의 주목을 받았다. 기존 통계 방식이 집단 전체의 평균값만을 보여주었다면, AI 알고리즘은 60개 이상의 변수를 동시에 분석해 ‘누가 은퇴했을 때 가장 큰 혜택을 보는가’를 개별적으로 예측했다.


이 같은 AI 기법을 통해 은퇴의 효과가 개인의 상황에 따라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는 ‘이질성(Heterogeneity)’을 입증했다는 점이 이번 연구의 가장 큰 의의로 평가받았다. AI 분석 결과, 개선 효과는 개인에 따라 -0.5단어에서 +2.3단어까지 큰 편차를 보였다. 은퇴 후 뇌 건강이 비약적으로 좋아진 집단의 특징은 다음과 같았다.


① 성별·사회경제적 지위: 남성보다는 여성이, 교육 수준과 자산·소득이 높은 사람일수록 은퇴 후 인지기능이 더 좋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② 직업 특성: 전문직 종사자들은 은퇴 후 큰 혜택을 본 반면, 육체노동이나 서비스직에 종사했던 이들은 상대적으로 혜택이 적었다. 이는 직장 내 인지적 자극의 정도가 은퇴 후 뇌 건강 유지에 영향을 미침을 보여준다.

③ 건강 습관: 은퇴 전부터 규칙적인 운동을 해왔거나 전반적으로 건강 상태가 좋았던 사람들은 은퇴 후 뇌 기능 향상 효과를 가장 크게 누렸다.



일률적인 정년 연장에 대한 정책적 경고


현재 전 세계적으로 고령화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 연금 수급 연령을 높이고 정년을 연장하는 추세다. 그러나 이번 연구는 ‘모두에게 정년 연장이 답은 아니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어떤 이들에게는 업무 지속이 뇌 건강을 해치는 독이 될 수 있고, 어떤 이들에게는 은퇴가 인지적 전성기를 되찾아주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연구팀은 개인의 건강 상태와 사회적 환경에 맞춰 은퇴 시기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유연한 은퇴 제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번 연구는 은퇴를 ‘끝’이 아닌 ‘뇌 건강의 재도약’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과학적 근거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은퇴가 뇌에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은퇴 전부터 건강관리와 더불어, 은퇴 후 늘어난 시간을 어떻게 인지적으로 풍요롭게 보낼지에 대한 개인적·사회적 준비가 필요하다는 거다. 이제는 ‘언제까지 일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넘어, ‘어떻게 은퇴해 뇌를 더 젊게 유지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는 생각이다.


은퇴 후에도 건강을 유지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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