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향한 사모곡, 국경 없는 노년의 안식처 되다 |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어머니를 향한 사모곡, 국경 없는 노년의 안식처 되다

글 : 최인한 / 시사일본연구소 소장, 일본 전문 저널리스트 2026-05-06

1600년대 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을 통일한 뒤 에도(도쿄)에 ‘도쿠가와막부’를 열었다. 일본의 중심이 교토에서 도쿄로 바뀌었지만, 교토는 지금도 일본의 문화, 역사 중심지이다. 이 지역 사람들은 일본 최고 도시는 여전히 ‘교토’라고 말한다. 교토 토박이들은 자존감이 강해 외지인들이 교토에서 자리를 잡고 살기 어려울 정도로 배타성이 강하다. 


다문화 공생 고령자 시설인 후루사토노이에 교토


교토시내 JR(일본국철) 교토역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유료 노인홈(실버타운) ‘후루사토노이에(고향의집) 교토’가 있다. 고도 경제 성장기에 접어든 1960년대까지 서민들이 주로 살던 곳이며, 조선인(재일교포 1세대)도 많이 거주했다. 한∙일 문화가 공존하는 고령자 주거시설인 ‘후루사토노이에 교토’와 1세기에 걸쳐 양국에서 사회복지사업을 하고 있는 윤기(尹基)  ‘고코로노가조쿠(마음의집)’ 이사장 스토리를 소개한다. 



후루사토노이에 교토 전경과 표지석


김치와 우메보시가 나오는 실버타운


4월17일, ‘후루사토노이에 교토’ 정문으로 들어가니, 마치 한국에 온 듯한 느낌이다. 입구 표지판은 커다란 바위에 ‘故鄕の家 京都(후루사토노이에 교토)’로 적혀 있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목포 공생원에서 기증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고령자 주택의 지붕은 기와집으로 지어졌다. 시설 책임자인 후지와라 가즈토미 이사(시설장)는 “2009년 준공 당시 목포에서 직접 배에 싣고 온 표지석”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에서 고령자 주거시설은 운영 주체와 입주자의 소득 수준에 따라 수십 종류가 넘는다. ‘후루사토노이에 교토’는 사회복지법인 ‘고코로노가조쿠’가 운영하는 특별 양호 노인홈이다. 주로 서민층이 입주하는 실버타운이다. 현재 160여명의 고령자가 살고 있으며, 월 이용료가 14~15만 엔(140만 원선) 정도여서 고령자들이 연금만으로도 거주 가능하다. 가격이 비싸지 않은 데다 가족처럼 좋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항상 100% 만실 상태다.  



재일교포와 일본인이 절반씩 거주


윤기 이사장이 한국 출장 중이어서 시설 책임자인 후지와라 이사와 한국인 윤영숙 상담사 안내로 시설 내부를 꼼꼼히 둘러봤다. 혼자서 자립 생활이 가능한 고령자와 간병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고령자들이 함께 살고 있다. 전체 입주자들의 구성비는 재일교포와 일본인이 반반 정도, 모두 1인실 방을 사용한다. 입주자의 양해를 얻어 들어가봤더니, 두 할머니가 텔레비전을 재미 있게 보고 있다. 한 분은 귀가 멀어 평소 말씀이 적은 편인데, 80대 후반 재일교포라고 윤 상담사가 살짝 귀띔한다.


방문자 일행 중 한 명이 다가가서 “안녕하세요. 할머니. 한국에서 왔어요”라고 인사를 건네자, 다소 어리둥절하던 할머니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 남씨 성을 가진 이 분은 밝은 표정으로 “안녕하세요”라며 또렷한 한국말로 인사를 했다. 방을 둘러보고 나오며 일행들이 “할머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라고 말하자, “조심해서 돌아가세요”라고 했다. 윤 상담원은 “평소 말씀을 잘 안 하는 분인데, 한국말을 하다니 너무 신기하다”라고 말했다. 80년 이상을 타국에서 살아도 고향의 언어는 잊혀지지 않는 모양이다.



한국어와 일본어로 함께 표기된 노인홈의 내부 시설



한일 2개 국어로 시설 안내 표시


지역 주민들과의 교류 공간인 1층은 물론, 입주자 거주 공간인 5층까지 모든 시설의 안내판은 일본어와 한국어로 병기돼 있다. 식당, 미용실, 욕실 등이 2개 국어로 쓰여 있어, 국적과 관계 없이 편하게 사용할 수 있다. 실내 바닥은 한국식 온돌과 일본식 다다미로 되어 있고, 매일 나오는 식사도 양국의 맛있는 메뉴로 구성된다. 한국의 설, 추석 등 명절과 일본의 4계절 주요 행사는 공동으로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후지와라 이사는 “후루사토노이에는 재일교포와 일본인 고령자 모두가 고향의 비슷한 환경 속에서 안심하고 여생을 보낼 수 있는 노인홈을 추구한다” 며 “국경, 민족, 문화의 차이를 넘어 함께 살아가는 풍요로운 복지사회 구축에 기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본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이 ‘일본은 좋은 나라’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복지시설을 운영하는 게 윤기 이사장의 경영 목표”라고 강조했다.



사회복지법인 고코로노가조쿠를 운영하는 윤기 이사장



한일에서 98년에 걸친 모자의 사회복지사업


사회복지법인 ‘마음의 가족(고코로노 가조쿠)’을 운영하는 윤기 이사장의 일본인 어머니 윤학자(다우치 치즈코, 1912~1968년) 씨는 일제 강점기에 목포 정명여고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외할아버지가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일했다. 음악 선생으로 근무하던 윤씨는 자원봉사자로 고아원 ‘공생원(共生園)’을 우연히 방문하고, 시설 운영자인 전도사 윤치호 씨를 만나게 된다. 윤 전도사가 1928년 10월 목포 유달선 아래 난파선 목재를 사용해 만든 고아원이 공생원이다. 두 사람이 “천국에는 조선인도 일본인도 구별이 없다”는 마음으로 결혼을 한 뒤 아들 윤기 씨가 태어났다.


1949년 촬영된 사진에는 공생원 아이들과 똑같은 바지를 입고 앉아 있는 윤기 이사장 모습이 남아 있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 아버지 윤치호는 고아원 아이들의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외출한 뒤 행방불명됐다. 기다려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일본인 부인은 한국에 그대로 남아 계속 아이들을 돌봤다. 그에게 ‘3000명 고아들의 어머니’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다. 학자 씨는 세상을 떠나기 전, 아들에게 “3000명의 아이들을 키운 것은 내가 아니고, 목포 시민”이라고 말하곤 했다. 한일 국교정상화가 실현되고 3년 뒤인 1968년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목포시민들은 ‘시민장’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학자 씨는 병상에서 일본어로 “우메보시(매실장아치)가 먹고 싶다”고 말을 남겼다. 평생을 한국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았지만, 고향의 맛이 그리웠던 것일까. 어머니가 남긴 이 말이 윤기 씨가 일본에서 재일교포를 위한 고령자 주거시설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 



사회복지법인 마음의 가족(고코로노가조쿠) 연혁



외국인이 살기 좋은 사회 만드는 게 꿈


모친의 뒤를 이어 공생원을 운영하던 윤기 씨가 새로 시작한 일이 고령자를 위한 가이고(노인돌봄) 시설이다. 그는 연이어 전해진 재일교포들의 ‘고독사’ 뉴스를 듣고, 죽기 전 모친이 고향의 맛 ‘우메보시’를 그리워했던 것을 떠올렸다. 해방이 되어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는 재일교포를 위해 노인홈(실버타운)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김치도 있고, 아리랑도 있는 ‘고향의 집’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한일 양국의 뜻 있는 시민들의 지원 덕분”이라고 말했다.


1989년 오사카부 사카이시에 첫 번째 ‘고향의 집’이 설립됐을 당시, 사람들은 “기적의 집을 열었다”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 고향의집은 오사카, 고베, 교토, 도쿄에 잇따라 문을 열어 2026년 현재 5개가 운영되고 있다. 앞으로 5곳 정도를 더 늘려 전국에 10개를 만드는 게 목표다. 윤 이사장은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과 일본에서 어린이와 고령자를 위한 시설을 운영하면서 국적과 국가를 넘어서 인간이 우선되는 사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다”고 털어놨다.  


1세기에 걸쳐 한일 양국에서 사회복지 사업을 펼친 이들 모자같은 분들 덕분에 한일은 아픈 과거사를 딛고 조금씩 미래를 향해 나가고 있다. 학자 씨는 일본인 최초로 한국 정부로부터 한국문화헌장을 받았다. 아들 윤기 이사장은 한일 가교 역할을 맡아 복지사업에 기여한 공로로, 2025년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욱일쌍광장)을 수상했다.



초고령 사회 한국에 주는 시사점


초고령 사회에서 일본은 한국보다 20년을 앞서간다. 한일 고령자들이 함께 노후를 보내는 ‘고향의 집’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우리나라에도 소득이나 국적 때문에 사회적 약자로 어렵게 살아가는 고령자들이 계속 늘어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선진국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나라다. 노동력 부족에 따라 최근 급증하고 있는 한국 내 외국인을 위한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제도 정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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