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민원실의 작은 배려, '안 들려요'가 사라졌다
글 : 김웅철 / 지방자치TV 대표이사, 매일경제 전 도쿄특파원 2026-03-17
“할아버지, 조금 더 크게 말씀해 주세요.”
“잘 안 들리는 데 다시 한 번 얘기해 줄래요?”
지자체의 민원실에서 고령자와 직원 간 큰 소리가 오가는 장면은 낯설지 않습니다. ‘시력이 약한 사람을 위한 돋보기는 있는데, 왜 잘 들리지 않는 사람을 위한 장치는 없을까. 이 단순한 질문에서 출발한 ‘행정 혁신’이 일본 지자체의 민원실 풍경을 바꿔놓고 있습니다.

일본 전역 1900여개 민원 창구에 비치돼 좋은 호응을 이끌어내고 있는 ‘연골전도 이어폰’ 이야기입니다. 지자체나 금융기관 등 창구에는 시력이 불편한 사람을 위한 돋보기가 비치되어 있지만, 난청자를 위한 장비는 없었다는 문제의식에서 ‘창구용 연골전도 이어폰’은 탄생했습니다.
이 이어폰은 귀의 연골을 진동시켜 소리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기존의 공기전도(氣道)와 골전도(骨傳導)에 이어 발견된 제3의 청각 경로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연골전도의 원리는 2004년 나라(奈良)현립의과대학의 호소이 유지(細井裕司) 박사가 발견했고 이를 바탕으로 2023년 연골전도 이어폰으로 개발됐습니다.

이 제품은 귓구멍에 삽입하지 않고 귓바퀴 안쪽 공간과 귓구멍 앞돌기, 귀 뒤쪽 부위에 착용합니다. 골전도 이어폰처럼 착용 시 뼈를 압박하지 않아 통증이 적습니다. 이어폰 표면에 구멍이나 요철이 없어 위생적이어서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난청이 있는 사람에게도 음성이 또렷하게 들리면서도 착용자 본인에게만 들리는 구조여서 청취에 어려움이 있는 고령자에게 큰 소리로 말할 필요가 줄어듭니다. 상담 내용이 주변에 새지 않아 프라이버시 보호에 유리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가격도 약 3만 엔 수준으로 보청기보다 훨씬 저렴합니다.

민원인이 눈치를 보지 않는 행정
이러한 장점 때문에 개인정보를 자주 다루는 지자체·금융기관 창구를 중심으로 도입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2024년 말 기준 전국 449개 기관(단체), 1,879개 창구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전국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신용금고(信用金庫) 전국 네트워크가 적극 활용되었다고 합니다.(2025년 일본고령사회 백서)
창구 현장에서는 이어폰 혁신의 긍정적 효과가 잇따라 보고되고 있습니다. 먼저 이 장치는 난청 고령자와의 상담 방식을 바꾸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큰 소리로 반복 설명하거나 필담을 해야 했고, 상담 시간이 길어지는 것은 물론 주변 사람에게 내용이 들릴 수 있다는 부담도 있었습니다. 도입 이후에는 일반 음량으로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게 되었고, 직원의 업무 부담도 줄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민원인이 눈치를 보지 않고 질문할 수 있게 된 점이 가장 큰 변화라고 현장의 직원들은 평가합니다.
나라현의 한 지자체에서는 “보청기보다 다루기 쉽고 음성이 선명하다”는 이용자 반응이 이어졌고, 직원들은 “청취가 어려운 민원인과도 다른 사람과 같은 음량으로 응대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합니다. 창구에 설치하는 것뿐 아니라 직원이 고령자 가정을 방문할 때 휴대해 사용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작은 장치 하나가 행정 서비스의 문턱을 낮춘 셈입니다.

경찰서·금융기관으로 확산
연골전도 이어폰의 적용 공간이 행정기관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경찰서에서도 운전면허 반납 상담 시 프라이버시가 보호되고, 보이스피싱 피해 상담이 활성화됐으며 고령자의 신고 장벽이 낮아졌다고 평가합니다. 고령자가 큰 소리로 말해야 하는 부담이 줄어 신고·상담 참여율이 증가했다고 전합니다. 금융기관에서도 계좌·대출 상담 시 정보 보호, 고령 고객 응대 시간 단축이라는 실질적 성과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 흐름은 한국에서도 시작됐습니다. 세종시 민원실에 연골전도 보청기가 설치돼 효과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고령화 속도가 더 빠른 한국에서 청각 접근성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인프라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민원 창구뿐 아니라 금융기관, 경찰서, 보건소, 디지털 키오스크까지 적용 범위를 넓힐 수 있습니다.
난청은 생활 범위와 사회참여를 줄이고, 프레일(허약)이나 치매 위험을 높일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어 고령기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큽니다. 난청이 치매 위험요인이라는 WHO 보고와 연결하면, 이 조그만 장치는 ‘청각 보조기기’를 넘어 예방 복지 인프라인 셈입니다. 앞으로 난청이 있어도 생활하기 쉬운 환경을 정비, 이른바 ‘친(親) 난청 사회’로의 기대는 더욱 커질 것으로 보입니다.

김웅철 지방자치TV 대표이사, 매일경제 전 도쿄특파원
서강대 경영학과 졸업, 同대학 대학원에서 사회학 석사를 받고 상명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 게이오 대학 연구원, 매일경제신문 도쿄특파원과 국제부장, 매경비즈 대표, 매일경제TV 국장, 경제tv EBC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초고령사회, 일본에서 길을 찾다》, 《초고령사회 일본이 사는법》의 저자로, ‘노인대국 일본’을 주제로 다양한 칼럼과 책을 쓰면서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초고령사회의 모습과 해법에 대해 연구했다. 《복잡계 경제학》, 《대공황 2.0》, 《2014년 일본파산》, 《똑똑하게 화내는 기술》 《아직도 상사인줄 아는 남편, 그런 꼴 못보는 아내》등 다수의 일본 서적을 번역했고, 《연금밖에 없다던 김부장은 어떻게 노후 걱정이 없어졌을까》, 《일본어 회화 무작정 따라하기》를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