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나 답게’ 살기 위해 얼마가 필요한지 계산하려면
글 : 박한슬 / 약사, 작가 2025-10-28

은퇴 후 부부가 표준적인 생활을 하는 데는 얼마가 필요할까?
재무 상담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질문이다. 여기서 흔히 나오는 대답이 현재 노인들의 월평균 지출이다. 국민연금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현재 노인들의 적정생활비는 297만원이다. 이 값을 기준으로 노후 설계를 하면 된다는 주장은 맞을까? 냉정하게 따져보면,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현재 발표되는 노인 생활비 통계는 지금의 60대, 70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그렇지만 지금 은퇴를 앞둔 세대와 현재의 노인 세대는 비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삶의 궤적이 다르다.
통계청의 「가계금융복지조사」를 살펴보자. 불과 10년 전인 2014년, 60세 이상 가구의 순자산 중위값은 1억 4천만 원에 그쳤다. 평생에 걸친 경제활동의 결과물이 생애 첫 집을 장만하려는 30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2024의 통계를 살펴보면, 60대 이상 가구의 중위 순자산은 2억 5천만 원으로 껑충 뛰었다.
지난 10년간 자산 시장이 좋았던 덕도 있겠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2014년에 이미 2억 원 넘는 자산을 보유했던 50대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60대 집단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돈 없는 노인은 옛말이다.
살펴봤듯, 현재 은퇴를 앞둔 세대는 재정적으로만 봐도 과거의 노인들과는 크게 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에 은퇴한 세대의 씀씀이를 기준으로 미래 은퇴 세대의 목표 생활비를 추계하는 건, 옛 한양 지도를 갖고 서울시에서 길을 찾는 것과 그리 다를 바가 없다. 큼직한 궤적은 달라지지 않았더라도, 삶의 방식과 소비의 눈높이가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서류로만 ‘부자’인 하우스 푸어
그렇다면 늘어난 자산이 은퇴를 앞둔 세대의 노후를 더 안전하게 만들어 줄까? 안타깝게도 장밋빛 전망을 내놓기는 어렵다. 서류상 자산은 분명 늘었지만, 정작 매달 쓸 수 있는 돈이 부족한 역설적인 상황에 부닥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문제의 본질은 자산의 총액이 아니라 그 ‘구성’에 있다.
다시 통계청의 2024년 「가계금융복지조사」를 살펴보자. 60세 이상 가구주 가구의 총자산 중 부동산 등 실물자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82.4%에 달한다. 평생 모은 자산의 대부분이 현재 사는 집 한 채에 묶여있다는 의미다.
여기서 경제학의 핵심 개념인 유동성(liquidity) 문제가 발생한다. 유동성이란 자산을 가치의 손실 없이 얼마나 빨리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지를 의미한다. 예컨대 은행 예금은 당장 인출할 수 있으니 유동성이 매우 높지만, 집은 다르다. 당장 다음 달 카드값을 내거나 갑작스러운 병원비를 치르기 위해 10억 원짜리 아파트 방 한 칸을 떼어 팔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미래 세대의 노년은 과거의 ‘절대적 빈곤’과는 다른, 새로운 종류의 빈곤에 직면하게 된다. 바로 자산은 있지만 현금이 없는 ‘하우스푸어(house poor)’다.
아무리 집값이 수십억 원에 달한들, 그 집에 계속 살아야 하는 이상 집값 상승은 그림의 떡일 뿐이다. 노후 생활비 계산을 ‘총자산’이 아니라 ‘월 현금흐름’으로 봐야 하는 이유다. 이런 격차를 극복하기 위해 주택연금 제도 등이 도입됐지만, 만 55세 이상 가구주 전체의 1.2%만 가입했을 정도로 제도 활성화 정도는 낮다.
어쨌거나 주택연금 형태가 됐건, 현금성 자산을 만들기 위해 지금 집을 팔고 좀 더 작은 집으로 옮기는 다운사이징(downsizing)이 됐건 간에, 현금흐름을 만들어야 하는 건 알겠다. 그런데 정확히 어느 정도의 현금이 매달 필요한 걸까?
불안감을 계획으로 바꾸는 법, 3층 예산 짜기
노후 지출을 설계하라는 말은 너무 모호하게 들릴 수 있다. 기준점이 없으니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다다익선(多多益善)의 고사처럼 괜히 불안감만 커지기 쉽다. 그래서 앞서 소개한 국민연금연구원 적정생활비는 월 297만이 그만큼 자주 사용되는 거지만, 그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차라리 노후 지출을 세 가지 성격으로 나누어, 막연한 불안감을 구체적인 계획으로 바꾸는 게 더 좋은 방법이다. 노후 지출을 총 3층으로 쌓는다고 생각하고 가장 아래층부터 살펴보자.

가장 아래층인 1층은 ‘생존’이다.
이름 그대로 건강하고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이다. 주거비, 공과금, 통신비, 최소 식비처럼 타협할 수 없는 필수 고정비가 여기에 해당한다. 국민연금연구원이 산출한 ‘최소생활비’(개인 월 136만 원, 부부 월 217만 원)가 이 1층의 규모를 가늠하는 좋은 기준점이 될 수 있다. 국민연금이 됐건, 개인연금이나 보험 상품이 됐건 간에 매월 이 금액은 꾸준히 통장에 들어와야 생존할 수 있다. 물론 자가 여부 등에 따라 주거비 부문이 달라질 수 있으니, 이 부분도 체크 해보는 게 좋다.

그 위인 2층은 ‘생활’이다.
생존을 넘어 표준적인 삶의 질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쌓는 단계다. 가끔의 외식, 지인들과의 교류, 교통비, 경조사비 등 사회적 관계와 품위를 지키기 위한 활동비가 포함된다. 국민연금연구원에서 제시한 ‘적정생활비’(개인 월 192만 원, 부부 월 297만 원)가 이 2층까지 포함한 규모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은퇴 설계가 바로 이 2층 수준에서 멈춘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할 수는 있지만, 내 삶을 나답게 산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기에 이 역시 만족스러운 노후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게 세 번째 층, ‘자아실현’이다.
나다운 삶을 완성하는, 오롯이 나를 위한 가치 비용이다. 누군가에게는 매달 떠나는 국내 여행(1회 약 23만 원)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필드에 나가는 즐거움(1회 약 25만 원)이 3층을 채울 것이다. 손주에게 주는 용돈(약 5만 원), 새로운 악기를 배우는 수강료(1회 약 6만원), 반려동물과의 시간(월평균 15만 원) 모두 여기에 속한다.
결국 나에게 필요한 최종 생활비는 이 3층을 무엇으로, 얼마나 채우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남들이 하는 만큼의 최소한은 2층에서 충분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노후를 위해서는 3층의 고민이 꼭 필요한 거다.

내 인생 계획이 곧 예산이다
이처럼 3층 모델을 통해 노후 생활비를 구체화하는 과정을 차근차근 밟다 보면, 우리가 그간 재무설계를 오해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은퇴하려면 평균적으로 얼마가 필요한가?’라는 막연한 질문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데는 구체적으로 얼마가 드는가?’에 대답을 해야 한다.
노후 예산은 단순한 돈 계산을 넘어, 내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할 때 즐거움을 느끼는지를 돌아보는 성찰의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1층과 2층이 통계와 현실을 반영한 ‘공통의 영역’이라면, 3층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고유의 영역’이다. 누군가는 매주 손주들과 외식하는 데서 가장 큰 행복을 느낄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조용한 서재에서 책을 읽거나, 온라인 강의를 들으며 지적 성장을 이어가는 것을 최고의 노후로 생각할 테다.
존경하는 은사님은 은퇴 후 텃밭을 가꾸는 일에서 삶의 보람을 찾고 계시고, 친구 아버님은 늦깍이로 영어 회화를 배우는 재미에 빠져 계신다. 어머니는 그림 그리는 걸 열심히 배우시더니, 몇 년 전엔 작은 지역대회에서 상도 타셨다. 내 노후를 무엇을 하며 보낼 것인지에 따라 3층 예산은 월 30만 원이 될 수도, 월 100만 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가장 정확한 노후 계산기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1층과 2층을 달성하는 덴 도움을 받아야 하겠지만, 서류 위 자산과 실제 삶의 괴리에서 오는 ‘하우스푸어’의 불안감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정의한 후에야 비로소 통제 가능한 목표로 바뀐다.
남들이 정해준 평균이라는 낡은 지도에 의지하기보다, 오늘 당장 당신의 3층에 무엇을 채워 넣을 것인지, 나만의 인생 지도를 그려보는 것에서부터 진짜 노후 준비는 시작된다.
박한슬 약사, 작가
글 짓는 약사. 숫자가 담긴 글 쓰는 일을 한다. 약학 대학 졸업 후 통계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고, 현재는 외국계 제약 회사에서 메디컬 라이터로 일한다. 《중앙일보》 「박한슬의 숫자읽기」와 《월간조선》 「박한슬의 건강의 지평선」을 연재하고 있으며, KBS 1라디오에서 매주 의료 서비스와 건강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데이터를 통해 한국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한 『숫자한국』, 약의 작용 원리를 풀어 쓴 『오늘도 약을 먹었습니다』, 투자자 관점에서 바라본 제약 산업 개론서인 『바이오 투자의 정석』, 국내 의료 체계의 지속 가능성을 살핀 『노후를 위한 병원은 없다』를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