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시간을 비워내야 할 때 더 생각나는 맛 |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지나온 시간을 비워내야 할 때 더 생각나는 맛

글 : 이한나 / 요리전문가, 작가 2025-09-12

십 수년 살았던 예전 집은 처음 이사 왔을 때 조용한 주택가였다. 


이후 젠트리피케이션 되면서 동네는 점차 유흥가가 되어갔고 새벽까지 이어지는 소음으로 결국 침실을 반대편으로 옮겨야 했다. 그리고 그 참에 대대적인 ‘비우기’를 단행했다. 


어릴 적부터 이고지고 다닌 물건들의 정리 작업이 거의 한 달 꼬박 이어졌고, 버릴 것과 남겨둘 것들을 분류하고 버리는 작업이 고통스럽게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깨닫게 된 게 있다. 


정신적, 육체적 노동이 너무 요구되는 ‘비우기’는 더 나이 들면 더 힘들어지기 때문에 한 살 더 젊을 때 하는 게 좋다. 또 하나는 내 삶 속에 개인적인 의미를 갖게 된 모든 물적인 것들의 가치는 내 안에 어떤 형태로든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걸. 


물건만 있고 의미가 잊혀진 것은 더더욱 그렇다.



비운다는 것의 의미


잡동사니 속에서 찾아낸 사진 속에 환하게 웃고 있는 한 여자는 그 뒷면에 적힌 정다운 메시지와 본인의 이름은 우리 관계가 아마도 꽤 가까웠을 거라는 암시를 하고 있었지만 난 도무지 그녀가 누군지 기억하고 있지 못했고, 그것이 충격이라면 충격이었다. 


망각에 대한 죄책감은 잠시, 어쩌면 우린 그 수년 전 당시 꽤 좋은 시간들을 공유했고, 그 사진은 그 증거였고, 비록 나의 뇌의 총량 때문에 담아두지 못한 일이 되어버렸지만 그건 내 삶이란 집을 만들어준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벽돌이라는 깨달음으로 왔다. 


하물며 기억하는 것들조차 감정적 미사여구들을 달고 새로운 서사를 갖게 되기도 하는데, 그렇게 해본 짐 정리는 내가 경험한 모든 일들은 존재 여부는 확인해야 할 그 무엇이라기 보다는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할 대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결국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물건들 모두 그 자체로서 내 삶을 만들어가는 존재들로 이미 나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떠나 보내도 그 가치는 그대로 살아있다는 깨달음이었다. 

어쩌면 이 전제야말로 삶의 후반기를 맞이한 이들에게 지나온 삶을 경축하고 앞으로 맞이할 삶의 공간들을 만들어주는 필요조건이 아닐까?



오늘의 요리를 위한 영화 : 빅피쉬


빅피쉬가 알려주는 아버지 삶의 궤적 


<가위손>, <찰리와 초코릿 공장>, <베트맨> 등 환타스틱한 세계가 비주류적인 감성으로 펼쳐지는 즐거움을 언제나 선사한 팀 버튼의 2003년작 <빅 피쉬>. 


허풍쟁이라고 여기던 아버지가 부담스럽기만 한 윌(빌리 크루덥 분). 월은 자신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또 다시 펼쳐진 아버지 에드워드(알버트 피니 분)의 ‘만성 허풍증’에 오만정 다 떨어져 연락을 끊는다. 3년만에 어머니 샌드라(제시카 랭 분)가 전해온 소식은 아버지의 암 말기 선고. 윌은 만삭인 아내 조세핀(마리옹 꼬띠아르 분)과 함께 부모님 계신 앨라배마로 향한다. 


아버지(이완 맥그리거 분)의 삶은 때로는 태어난 순간부터 한창인 시절, 또 다른 때에는 어머니와의 러브스토리를 듣고 싶다는 며느리 조세핀의 속 깊은 간청으로 상당히 일반적이지 않게, 1인칭 시점으로 동화처럼 펼쳐진다. 


아버지가 이야기하는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윌은 지어낸 ‘허풍’이라 치부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들에는 그의 애정이 덧붙여진 실체들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윌은 아버지의 인생은 항상 언급해왔던 ‘큰 연못의 큰 물고기’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을 매 순간 실천해왔음을 깨닫는다.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여인으로 보이고 또 다른 이에게 다른 존재로 보이기도 한다는 환상의 ‘빅 피쉬’는 아버지에게는 도달하고 싶은 목표이기 보다는 삶에 대한 태도 혹은 지향이었던 것이다. 


어려운 상황을 매번 긍정 에너지로 극복하면서 자기 방식대로 가족들, 이웃들, 지인들을 자기 세계 안에 보듬은 아버지의 인생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 윌은 이제 아버지의 이야기들을 곧 태어날 자신의 아이에게 들려주며 아버지의 삶을 기억하고 경축할 것이다. 


대니얼 월래스의 동명의 원작을 영화화한 <빅피쉬>는 당시 돌아가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팀 버튼 감독, 자신의 아버지를 자기 방식대로 애도하고 기억하기 위함이기도 했다고 한다.


아들이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점을 통해 죽음 앞에서 공감과 이해에 도달하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이 영화의 큰 줄기이지만 앞서 언급한 현재의 삶과 지나온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면 좋을 지 생각 거리를 주기도 한다. 


흥미로우면서도 환상적인 서사를 따라가다가 현실적인 깊은 감동으로 마무리 되는 <빅피쉬> 추천하는 이유다.



오늘의 요리 : 치킨 샐러드


치킨샐러드와 함께 돌아보는 나의 인생


이번에 소개하는 요리는 일종의 서양식 닭 무침인 치킨 샐러드. 


19세기 중반 미국 남부 요리사가 쓴 요리책에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미국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요리가 치킨 샐러드다. 


마요네즈에 껍질까지 먹을 수 있는 청포도 들어간 초창기 버전은 이제 다양하게 진화를 했지만 쉽게 구할 수 있는 가성비 좋은 식재료들을 조합해 한 동안 두고 먹을 수 있는 컴포트 푸드(comfort food)로서의 의미는 같다. 


들어가는 재료와 비율, 배합 방법 등 세월과 사람에 따라 계속 달라지지만 그냥 먹으면 기분 좋고, 또 빵 사이에 끼워 김밥처럼 들고 다니면서 허기를 떼울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지만 맛있는 음식이 치킨 샐러드이다. 


이미 냉장고에 잠자고 있던 재료들 활용할 수 있는 냉장고 털이를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이번 요리는 기존의 마요네즈 넣어서 만드는 크리미한 버전이 아닌 샐러드처럼 산과 기름이 베이스가 되는 드레싱을 넣은 일종의 무침 형태이다.  


<빅피쉬>처럼 여러 옷이 입혀지면서 세월의 경험과 지혜로 계속 튜닝되지만 본질이 달라지지 않는 요리이고, 전날 만들어 놓고 냉장하면 더 맛이 깊어지는 요리이다. 


그대로 즐기거나 치즈, 양상추, 토마토 슬라이스를 곁들여 샌드위치로 만들어 영화와 함께 매 순간을 잘 살아왔던 나를 생각해보는 시간 가져보시라.


치킨 샐러드 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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