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소소한 ‘덕질’이 필요한 이유
글 : 한소원 /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2025-07-28
미국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빌 브라이슨(Bill Bryson)은 여행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친구와 애팔래치아 산맥 트레킹을 하다가 실패한 이야기를 주제로 한 책 <나를 부르는 숲(A Walk in the Woods)>은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유럽 배낭여행을 마치고 잠깐 들른 영국의 매력에 빠져 아예 정착하면서 영국은 그의 제2의 고향이 되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을 때 잉글랜드 남부와 웨일스에서 잉글랜드 북부, 스코틀랜드까지 영국을 구석구석 여행했다. ‘애정을 가지고 가꾸며 살던 집을 마지막으로 돌아보는 느낌’으로 한 여행이 <빌 브라이슨 발 칙한 영국산책(Notes from a Small Land)>에서 풀어 낸 이야기다.
영국에는 낡은 운송 수단인 증기 철도가 100개 이상 있다. 증기기관차들은 1만8500명의 자원봉사자에 의해 운영된다. 북부 웨일스의 페스티니오그 열차(Festiniog Railway)는 1832년에 만들어진 이후 현재까지 운영되는 가장 오래된 증기기관차다. 날카로운 기적소리가 울리고, 새하얀 연기를 길게 뿜으며 증기기관차가 씩씩하게 달린다. 사방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객차는 발 디딜 틈 없이 붐빈다. 속도도 느리고 불편한 점도 많지만 애호가들은 이 낡은 기관차를 타면서 천국에 있는 것 같이 행복 해한다.
이 열차가 지나가는 부근에는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사실 마을에는 특별히 할 만한 게 없다. 그럼에도 주민들은 작은 도시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기쁨을 찾아낸다. 자갈밭 옆 벤치에 앉아 있거나,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작은 거리 한편에 기대어 시간을 보낸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누군가 “차 한잔 할까요?”라고 말을 꺼내기라도 하면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일인 것처럼 기뻐하며 일어난다. 누군가 먼저 말하지 않는다면 아마 하루 종일 그렇게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 또한 나쁘지 않다. 호텔에서는 찬물과 더운물이 잘 나온다는 것을 자랑하고 아침 식탁에 빵과 함께 잼이 나온다는 것을 미식가의 만찬처럼 소중히 여긴다.
작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
오랜 미국 친구가 오리건주의 유진이라는 도시로 이사를 갔다. 친구 커플은 아마추어 천문학 동호인이다. 그런데 아마추어라고 하기에는 투자하는 시간과 정성이 대단하다. 주말마다 별을 더 잘 보기 위해 고가의 천체망원경을 차에 싣고 산으로 들로 다닌다. 소셜미디어에서도 아마추어 천문학 동호회 활동을 활발하게 한다. 한 겨울에도 천체망원경을 챙겨들고 눈이 쌓인 산꼭대기로 가서 슬리핑백을 뒤집어쓰고 있는 사진을 자랑스럽게 보내오곤 한다.
지난겨울에 그 친구 집을 방문해 일주일쯤 묵었다. 한 밤중에 친구가 방문을 살살 두드리더니 깨어 있으면 잠옷 위에 패딩코트만 챙겨 입고 집 밖으로 나오라는 것이다. 보여줄 게 있다고 아주 흥분해서 말했다. 다름 아닌 별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천체 망원경을 설치해 놓고 자기가 초점을 맞추어 놓은 곳을 보라고 했다. 목성이 보였고 목성의 고리가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다. 잠이 덜 깬 나도 순간 우주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이 감동스러웠다. 그렇지만 춥고 피곤한 나는 곧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 친구는 새벽까지 별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은퇴 후에 귀농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도시를 떠나 전원생활을 한다는 막연한 로망을 가지고 귀농한 경우에는 얼마 안 가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자기가 정말 즐거워하는 것을 만들 수 있으면 은퇴 후가 더 행복하다고 말한다.
지인의 부모님은 서울에서 쭉 사시다가 은퇴 후 전라도 고향으로 이주하셨다. 유네스코 등재유산이 있을 만큼 역사적 유적지와 다양한 문화재가 있는 곳이다. 그의 아버지는 역사 문화 공부를 하시고 문화재를 안내하는 자원봉사를 하신다. 자원봉사를 하는 날에는 꼭 빵떡 모자를 쓰고 멋을 부리고 나가신다. 관광 온 사람들에게 설명해주는 것도 재미있고 역사 문화 공부를 계속 하는 것도 즐거워서 은퇴 후가 너무 행복하다고 한다.
친분이 있는 교수님이 은퇴 후 전원주택을 짓고 사모님과 같이 이사하셨다. 몇 년간 은퇴 준비를 했고 친한 분들이 같은 동네에 전원주택을 짓기도 했다. 그렇지만 잘 지어진 전원주택이 있고 주변에 친구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허전했다. 직업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다가 은퇴 후 나의 모습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고 자신감도 떨어졌다. 그런데 운동 삼아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면서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자전거를 타면서 자전거로 전국 여행을 하고 자전거 여행을 위해 식단도 조절하고 건강관리도 시작했다. 도로와 지형도 공부를 하고 기능성 운동복에도 관심이 생겼다. 자전거 동호회 사람들과 캐나다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찍은 사진들을 지인들에게 보내기도 한다.
은퇴하고 귀농한 분들 중에도 좋아하는 것을 찾은 분들은 진심으로 행복하다. 평소 가드닝에 관심이 많았지만 직장에 다니는 동안은 시간을 많이 쏟지 못하다가 본격적으로 가드닝을 시작하신 분이 있다. 병충해 방지며 유기농 농법까지 공부할 것도 많고 밭에 나가서 할 일도 끊임없이 많다. 블로그도 시작하셨고 몇 년이 지나 블로그에 발자취가 몇천 명을 넘어서는 것이 뿌듯하기도 하 다. 세계의 기후와 다른 나라의 농법에도 관심이 많다.
소박한 일에서 찾는 행복, 건강과 가족 관계는 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게 대단한 활동일 필요도 없다. 덕질을 해본 사람은 그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안다. 좋아하는 뮤지컬 배우의 작품은 모두 다 찾아보고 심지어 같은 작품을 몇 번씩 관람한다. 미국에 살고 있는 지인은 팬텀싱어의 포레스텔라 의 팬이다. 포레스텔라의 모든 공연을 가고 공연날짜에 맞추어 한국행 비행기표를 구매한다. 트로트 가수 임영웅 콘서트를 내년에도 가기 위해 건강을 챙기신다는 할머니 팬들도 많다. 경제력이 있는 아줌마 팬들은 전세기를 동원해 한국에서 로스엔젤레스 공연까지 가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있고 열정을 가지고 즐거워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해마다 명절이 되면 가족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이 무엇인지가 언론에 나오곤 한다. 언제 결혼할거니, 직장은 언제 얻을 거니, 연봉은 얼마니, 아이는 언제 낳을 거니 이런 질문이나 덕담은 금물이다. 정치 이야기는 가족 간에 불화를 만드는 지름길이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금물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어진다. 집안의 어르신은 왜 항상 잔소리와 훈계만 하시는 걸까. 왜 사람들이 모이면 정치 이야기 빼면 할 말이 없는 것일까. 내가 인생에서 열정을 가지고 기뻐하는 것이 있고 다른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잔소리와 정치 이야기 말고도 대화할 거리가 생기고 더 가까운 관계가 되지 않을까.
최근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여러 세대에 걸쳐 공감대를 만들어주었다. 과거의 모습이 현대와 연결되어 사람 사는 모습과 가족 간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감동이 있는 드라마였다. 드라마도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연결할 수 있는 길이 된다. 북클럽, 문화동아리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같이 즐기는 사람들의 모임이라서 더 좋다.
일상에서 작은 것에 나만의 열정을 가지고 있으면 행복하다. 누가 인정해 주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기뻐할 줄 아는 것, 그것도 하나의 능력이다. 산책을 하고, 요리를 하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증기기관차와 문화 유산을 즐기고, 콘서트에 가고, 별을 보는, 이 소소한 순간들이 우리 삶에 큰 행복을 가져다준다.

한소원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일리노이주립대학에서 인지심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오클라호마주립대학 심리학과 교수로 10여 년간 연구하며 학생들을 지도한 뒤, 현재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인지과학과 인간공학심리학, 정서과학 등을 강의하고 있으며, 특히 뇌 가소성, 심리학과 인공지능, 인간-로봇 상호작용, 스마트 에이징 등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나이를 이기는 심리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