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직 하다 아파트 관리소장이 된 친구, 행복할까?
글 : 김경록 /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 2025-07-23
휴일인 토요일에 친구와 충무로에서 만나 점심을 먹기로 했다. 필자는 광화문 사무실에 휴일에 나오니 지하철 타고 만나면 될 일이다. 지금까지는 평일에 점심을 했는데 친구가 올해 2월부터 아파트 관리소장을 맡으면서 휴일에 보자고 한다. 지하철을 타고 충무로로 나섰다.
친구는 전화로 장충동에서 보자고 얘기를 했는데, 내가 충무로에서 보자 해서 뭔가 특별한 일이 있는 줄 알았다고 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장충동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가수 배호의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을 떠올렸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노래를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걷는 길’이라는 현인의 ‘서울야곡’으로 착각을 한 것이다. 하여튼 이러한 우연으로 본의 아니게 필동 길을 구경하는 호사를 누렸다.
70세까지도 일하고 싶다
친구는 퇴직 후 2년 정도 쉬다가 올해 주택관리사 자격증을 따고 아파트 관리소장이 되었다. 관리소장 맡은 이후 만난 첫 모습은 이전에 비해 생기가 넘쳐 보인다는 것이다. 지금은 작은 단지를 맡는 3년 수습 기간이지만 이 기간이 지나면 더 큰 단지로 옮기고 월급도 많아진다고 한다. 처음 몇 달은 소장이 모든 일을 해야 해서 어려웠지만 익숙해지니 별로 바쁘지 않다고 한다. 경리 일이 좀 부담인데(영수증 처리 등) 몇 달은 본인이 하다가 자기 돈으로 외주를 주었다고 한다.
지금은 혼자 일을 처리하지만 3년 후에 큰 단지로 가면 관리 과장 등이 있으니 오히려 일이 편해진다고 한다. 정년을 물어 보았다. 정년은 없는 데 대략 75세까지는 일을 하고 앞으로 장수 시대에는 더 길어질 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건강만 허락하면 오래 일을 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필자의 다른 친구는 건물 두 동을 관리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65세까지만 한다고 했는데 요즘 물어 보면 최소 70세까지는 해 볼 생각이라고 한다.
큰 회사의 사무직에서 작은 아파트의 관리소장이 되기까지
친구는 정년 퇴직하고 처음에는 감정평가사 공부를 했다. 알다시피 따기 어려운 자격증이다. 1~2년 공부를 하다가 생각을 고쳐 먹었다. 노후의 시간도 많지 않은데 합격이 불투명한 자격증에 계속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빨리 할 수 있는 자격증을 따는 게 좋을 것 같아 주택관리사로 바꾸었다. 행정고시 합격해서 들어 온 친구의 직장 동료도 퇴직 후에 주택관리사 합격해서 일찌감치 아파트 관리소장을 한다는 말에 힘을 입은 것이다. 주택관리사는 곧 바로 합격했다.
2개월 전에 관리소장 수습으로 일하고 있다고 문자가 왔길래 적응을 잘 할지 걱정이 되었다. 평생 큰 회사의 사무직과 해외에서 일을 했는데 작은 아파트 단지의 관리소장 일을 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눈높이를 낮추고 잘 적응할까? 그런데 만나보니 기우에 불과했다. 감정평가사 포기하고 주택관리사로 바꾸어 빨리 일을 하게 된 게 너무 잘한 선택이라고 했다. 3년 후면 수습을 떼게 되고 또 근무 기간이 길어질수록 전문성이 높아져 연봉도 많아진다고 한다. 받고 있는 연금에 관리소장 월급을 더하니 노후에 걱정할 바 없는 소득이 되었다.
소소한 일의 기쁨에 취한 노후
하지만 필자가 들은 가장 인상 깊은 이야기는 뒤에 나왔다. 자신의 소소한 행복에 대한 이야기였다. 필자가 충무로는 커피값이 싼 것 같다고 했더니 자신이 근무하는 곳은 이 보다 훨씬 싸다는 것이다. 한 잔에 2000~3000원 정도면 충분하다고 한다. 그리고 점심 시간에 10분 정도 걸어 나와서 햄버거를 먹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서 현장으로 돌아오는 길이 행복하다고 했다. 집에서 쉬면서 햄버거를 사먹고 돌아올 때와 관리소장으로 일하면서 햄버거를 사먹고 돌아 오는 길이 이렇게 다르다는 것이다.
직장에서의 일화를 또 이야기했다. 더운 날에 마스크를 쓰고 왔길래 물어 보았더니, 한 달에 두어 번 거래 은행을 가는데 창구에 있는 직원이 친구가 마스크를 착용한 모습을 보고 마스크를 20장이나 주었다는 것이다. 코로나19 때 비축해 놓았던 마스크가 아직도 많이 있다는 말과 함께. 그래서 지금 사무실에 마스크가 많이 있다고 한다. 이제 소소하게 은행의 창구 직원과 이런 저런 말을 하나 보다. 친구는 일자리를 가지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소소한 행복도 찾은 거 같다.
알랭 드 보통은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일의 장점에 대해 다섯 가지를 말했다.
① 정신을 팔게 해준다.
② 우리의 불안을 일을 통해 성취 가능한 몇 가지 목표로 집중시켜 준다.
③ 우리에게 뭔가를 정복했다는 느낌을 준다.
④ 품위 있는 피로를 안겨준다.
⑤ 식탁에 먹을 것을 올려놓아준다.’
친구에게 일터에서 시간 날 때 책을 볼 수 있어서 좋겠다고 했더니 요즘은 책을 읽지 않는다고 했다. 일터에서 남는 시간에는 멍 때리고, 집에 돌아오면 드라마를 보다가 일찍 잠자리에 든다고. 그리고 여생은 그냥 이렇게 보내면 좋겠다고 한다. 생각이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알랭 드 보통이 말한 ‘일을 함으로써 변하게 되는 다섯 가지’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
장기신용은행 장은경제연구소 경제실장을 역임했으며, 미래에셋자산운용 채권 CIO와 경영관리부문 대표이사를 거쳐 투자와연금센터(구 은퇴연구소)의 대표를 맡았다. 인구구조와 자산운용 전문가로 주요 저서로는 『데모테크가 온다』, 『벌거벗을 용기』, 『1인 1기』, 『인구구조가 투자지도를 바꾼다』가 있으며 역서로는 『포트폴리오 성공운용』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