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 잃은 내게 50년 만에 도착한 편지 |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방향 잃은 내게 50년 만에 도착한 편지

글 : 박창영 / '씨네프레소(영화 속 인생 상담소)' 저자, 매일경제 금융부 기자 2025-07-10

중년의 어느 날, 영화가 말을 건네왔다 <5화>



 


-줄거리-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거주하는 살바도르는 세계적 명성을 얻은 영화감독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망에 이어 자기 육신마저 병들자 내면의 늪으로 점점 빠져들고 만다. 그러던 중 자신이 묻어뒀던 회고록 <중독>이 극장에서 독백극으로 상연되는 일이 생기는데. 깊숙이 숨겨둬왔던 기억들이 하나씩 그를 찾아온다.





살바도르는 과거 <맛>이라는 영화를 연출한 뒤 주연 배우 알베르토와 절교했습니다. 알베르토가 촬영 도중 약물을 하는 등 프로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고 판단했기 때문인데요. 


30년 뒤 찾아온 알베르토는 살바도르 집에서 우연히 그의 회고록 <중독>을 읽고, 자신이 연기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 찹니다. 알베르토의 무책임함에 실망했던 살바도르가 쉽게 허락해줄 리가 없겠죠. 그러나 거듭된 간청에 살바도르는 결국 원작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 조건으로 상연을 허락하는데요. 


연기에 관한 당부사항을 전달하던 도중 살바도르는 알베르토가 보여주는 의외의 진중한 모습에 놀랍니다. 알베르토가 “최대한 맑은 정신으로 있어야 한다”고 다짐한 것인데요. 그건 슬슬 커리어를 정리하려던 살바도르에게 조금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알베르토는 그저 살바도르를 이용하려는 게 아니라 그의 작품에 애정을 느끼는 사람이었단 것이죠. 본인조차도 관심을 잃어가던 자기 세계가 누군가에게는 삶의 자세를 다잡게 할 만큼 여전히 매혹적이라는 사실. 그건 살바도르가 다시 창작 활동으로 돌아갈 계기 중 하나로 작용합니다.





살바도르는 어린 시절 페데리코라는 친구를 돌본 적이 있습니다. 살바도르는 그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죠. 약물에 빠져 살던 페데리코가 중독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걸 바쳤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구원하려던 살바도르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야 맙니다. 이는 연극 <중독> 속에서 “사랑이 산을 움직일 수 있을지언정 사랑하는 이를 구하기에는 부족했다”는 대사로 요약되죠.


수십 년 후 마드리드에서 <중독>을 관람하게 된 페데리코. 보자마자 자기 이야기임을 알아채죠. 뜨거웠던 둘의 시간, 그리고 무심했던 자기 젊은 날을 되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곧장 살바도르를 찾아가 과거를 반성합니다. 아픔을 느끼게 해서 미안하다고요.


자기 내면에 생채기를 남긴 친구에게 “너는 내 삶을 채워줬다”고 고백하는 살바도르의 말은 현실과 예술의 관계를 생각해보게 합니다. 살바도르가 페데리코의 과거 행동 때문에 상처를 받았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회고록 형태로 적어 냄으로써 한 차례 거리를 두고 보게 되고, 또 그 고통조차도 자기를 형성한 일부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인간은 삶을 재료 삼아 글을 쓰는 동안 과거를 보다 깊이 받아들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감상자로서도 마찬가지죠. 나의 경험과 유사한 지점을 발견하고, 내가 용서하지 못했던 과거를 삶의 일부로 융합하게 됩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과거와 끊임없이 대화해야 하는 만큼이나 예술을 통해 자기 옛날과 계속해서 대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살바도르는 풍족하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비가 들이치는 동굴에서 부모와 함께 근근이 먹고 살았죠. 당시에 살바도르 집을 드나들던 형이 한 명 있었는데요. 에두아르도라는 이름의 청년은 살바도르 집 벽에 회반죽을 칠해줬습니다. 그 대가로 영재였던 살바도르에게 글과 수학을 배웠고요. 어린 살바도르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그려 우편물로 보내준 일이 있었는데요. 어머니가 이를 전달해주지 않는 바람에 살바도르는 오랫동안 그림의 존재조차도 몰랐죠. 


그 그림을 50년 후 바르셀로나의 한 화랑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그림의 뒤엔 살바도르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절절한 편지가 쓰여 있었습니다. 반백년을 돌고 돌아 자신에게 도착한 편지에 살바도르는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습니다. 


그 편지가 특히나 힘이 된 건 유년기가 그에겐 힘든 시기였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타인의 삶에 흔적을 남겼다고 생각조차 못했던 시간이었는데요. 그 당시에도 자신을 통해 누군가는 힘차게 살아나갈 희망을 발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인은 호의라고 인지조차 못했던 행위 덕분에 말이죠.


이 영화의 제목은 ‘고통과 영광’으로 직역됩니다. 흔히 고통을 영광으로 승화한다고 하지만, 이 작품은 그 이상을 말하는 듯합니다. 우리가 고통이라고만 알았던 시간의 이면에 사실은 영광이 늘 함께하고 있었다고요. 


내가 아무 의도 없이 베풀었던 친절 덕분에 누군가는 따뜻함을 느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마음에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 또한 영광이 될 수 있단 이야기죠. 오늘도 시간을 그저 흘려보낸 것만 같아 무기력감을 느끼는 우리에게 이 작품은 말을 건네는 듯합니다. 나도 모르게 지었던 미소가 누군가의 마음에 꼭 추억하고 싶은 한 장면으로 남았을 수도 있으니, 풀 죽어 있을 필요 없다고요. 



<페인 앤 글로리>를 볼 수 있는 OTT(6월 30일 기준): 티빙, 웨이브, 왓챠, U+모바일tv, 씨네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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