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시경제학의 아버지 케인스는 왜 가치투자자가 되었나?
글 : 방현철 / 조선일보 기자 2025-07-07
워런 버핏보다 먼저 가치 투자의 길을 찾았던 경제학자 케인스
“나는 경제학자가 하는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아요. 경제학자 중 주식으로 돈 벌어 부자가 됐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없어요.”
‘투자의 현인’이자 ‘가치 투자의 대가’인 워런 버핏은 2016년 CNBC 인터뷰에서 경제학자에 대한 불신을 말했다. 경제 이론과 투자 실제는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버핏이 예외로 인정한 학자가 있다.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 중 한 명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다.
케인스는 시장에 맡기면 경제가 잘 돌아간다는 이론이 팽배하던 20세기 초 경제학계에 ‘불황 때는 정부가 재정을 써서 수요를 살려야 한다’는 주장으로 학계 내 새 흐름을 만들었다. 그의 이름을 딴 ‘케인스주의’가 경제학의 한 분야로 생겼고, 성장, 고용, 물가 등 경제의 큰 맥락을 연구하는 ‘거시경제학’의 탄생도 촉발했다.
그런데 케인스는 이처럼 학계에 엄청난 영향을 줬을 뿐 아니라 투자로도 큰 돈을 벌었다. 1946년 63살로 세상을 떠날 때 그의 재산 중 금융 자산만 40만 파운드, 지금 한국 돈으로 약 370억 원에 달했는데, 대부분 주식이었다.
케인스는 1883년 태어나 명문 사립학교인 이튼을 나왔고, 영국 케임브리지대 킹스칼리지를 졸업했다. 영국 엘리트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지만, 갑부 집에선 태어난 ‘금수저’는 아니었다. 종잣돈이 많지 않았기에 케인스가 본격적으로 투자를 시작한 것은 30대 중반이다. 그럼에도 주식 부자로 삶을 마감했다.
청년 케인스의 외환 투기
케인스는 대학 졸업 후 20대 초반 잠시 공무원을 하다 1908년 케임브리지대로 돌아왔다. 처음엔 확률론을 강의하다, 다음 해 경제학 교수가 됐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는 공무원으로 복귀했다가 1918년 전쟁이 끝나고 민간으로 나왔다. 그는 36살이던 다음 해 ‘평화의 경제적 결과’라는 책을 쓴다.
케인스는 책에서 독일에 1차 대전에 대한 가혹한 책임을 물은 결과로 독일 경제는 파탄 나고 독일이 20년 안에 다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예측했다. 실제 그의 예측대로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유명세도 탔지만, 케인스 개인으로서는 이 책이 투자의 종잣돈을 마련할 기회가 됐다. 베스트셀러가 돼서 책 인세가 꽤 들어왔고, 관련한 강연 수입 등도 생겼기 때문이다.
종잣돈이 생긴 30대 중반의 케인스는 1919년 환율을 예측해 매수, 매도 시기를 잡는 외환 투기에 나선다.
여기서 잠깐, 케인스가 정의한 투기와 투자의 차이를 보자.
케인스는 투기는 ‘대중보다 조금 먼저 가격 변동을 예측하는 활동’으로, 투자는 ‘자산에서 나오는 수익을 예측하는 활동’이라고 했다.
케인스는 ‘인플레이션이 높은 나라의 통화 가치는 떨어진다’라는 경제 이론을 투기에 활용한다. 전후 인플레이션이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독일 마르크화는 ‘팔자’를, 대신 영국 파운드, 미국 달러는 강세가 될 것으로 보고 ‘사자’ 포지션을 취했다.
케인스는 몇 달 사이 6000파운드, 지금 우리 돈으로 6억5000만원에 달하는 거액을 손에 쥐었다. 얼마나 자신만만했으면 어머니에게 ‘돈이란 우스운 거예요. 약간의 추가 지식과 특별한 종류의 경험이 있으면, 그냥 굴러 들어오네요’라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외환 투기를 시작한 지 약 1년 후 케인스는 ‘쪽박’ 위기에 처한다. 갑자기 독일 경제에 대한 낙관론이 쏟아지면서 마르크화 가치가 반등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은행가 등의 도움을 받아 추가 증거금을 내고 파산 위기를 벗어난다. 결국 마르크화 가치가 떨어져 재기하기는 했지만, 케인스는 첫 투자 실패감을 맛봤다.
케인스는 40대로 접어든 1920년대에도 경제 이론을 바탕으로 고무, 밀, 면화, 주석 등 원자재와 원자재 기업들에 대한 주식 투기에 나선다. 그는 자신의 투자법을 ‘신용 순환 투자 이론’이라고 불렀는데, 경제가 좋아지면 원자재 수요가 늘어날 것이므로 경제가 나아질 전망이면 대표적인 원자재를 사들이고, 나빠진다는 전망이면 파는 식으로 투자했다.
그는 수요, 공급을 분석해 원자재 가격을 예측하려 했고, 400쪽에 달하는 원자재 가격 분석 문서를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1920년대는 ‘광란의 20년대’라고 불릴 정도로 경제가 좋았던 시기다. 케인스의 재산도 동시에 불어나게 된다. 1927년 무렵 케인스의 재산은 약 4만 파운드, 지금 우리 돈으로 55억 원으로 불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또 한 번의 시련이 닥친다. 1929년 주식 시장 대폭락과 동시에 대공황이 찾아온 것이다. 원자재 가격도 하염없이 동반 하락하던 시기였다. 케인스는 이때 전 재산의 80%를 잃었다고 알려졌다.
중장년의 케인스는 가치 투자자로 변신
두 번의 투기 실패는 케인스가 ‘가치 투자자’로 거듭나는 계기가 된다. 그의 투자 스타일은 50대가 된 1930년대 중반부터 가치 투자로 바뀌게 된다. 당시는 1930년생인 가치 투자의 대가인 워런 버핏이 열 살도 되지 않았던 때로 투자계에서 가치 투자 개념이 확고하게 자리 잡기 전이었다.
하지만 그는 매수, 매도 시점을 찾는 ‘마켓 타이밍’ 기법이 아닌 내재가치 보다 저평가된 주식을 찾는 투자법을 쓰기로 했다. 경제 상황을 전망해 투자 시점을 잡는 ‘톱 다운’ 스타일에서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고배당 기업 등을 발굴하는 ‘바텀 업’ 스타일로 전향한 것이다. 그 결과 1930년대 대공황, 1939년 2차대전 발발 등 악재 속에서도 재산을 불렸다.
1936년 53살 때 쓴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은 그의 경제 이론을 집대성한 책으로 그의 이름을 후대에 널리 알린 대표 저작이다. 책을 보면 그의 투자 스타일이 왜 변했는지 감지할 수 있다. ‘미인대회 비유’와 ‘야성적 충동’에 대한 내용이 그것이다. 케인스는 투자는 미인을 고르는 대회와 같다고 했다.
이런 대회에선 자신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미인을 고르지 말고, 평균적인 사람이 미인이라고 고를만한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 심리에 쉽게 휩쓸리는 주가의 속성을 설명한 대목이다. 또 사람들은 ‘야성적 충동’을 바탕으로 투자한다고 했다.
그래서 단기적 시장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기는 투자’를 하려면 저평가 기업을 발굴해 ‘매수 후 보유’하며 기다리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버핏은 1988년 주주서한에서 “케인스는 매매 타이밍를 좇는 투자자로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심사숙고 끝에 가치 투자자로 개종했다”고 평가했다.
케인스의 투자 성적은 가치 투자자로 전향한 후에 확 나아졌다. 연구자들은 케인스의 투자 성적표를 그가 1924년 모교인 킹스칼리지의 학교기금 운용을 전적으로 책임진 이후 기금 자료로 갈음해서 평가한다. 투자 내용이 상세히 기록돼 남아 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체임버스 케임브리지대 교수 등이 킹스칼리지 기금 실적을 분석한 결과, 1924~1932년 연평균 수익률은 9%로 영국 시장 전체(5.6%)보다 3.5%포인트 높았다. 그런데 케인스가 가치 투자로 스타일을 바꾼 후 1933~1946년에는 기금 수익률이 19.5%로 시장 수익률(10.5%)을 무려 9%포인트나 상회했다.
케인스는 경제학자도 주식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보여줬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투자 실패를 교훈 삼아 주식으로 장기적이고 안정적으로 수익을 내는 방법을 스스로 찾았다는 것이다.
방현철 조선일보 기자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해 한국은행 은행감독원(현 금융감독원)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현재는 조선일보 경제부 부장으로 재직 중이다. 편집부, 사회부, 주간조선부, 국제부, 사회정책부 등에서 일했으며 논설위원으로도 있었다. 서울대학교 국제지역원(국제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를 마치고, 한양대학교에서 ‘통화정책과 글로벌 임밸런스에 관한 연구’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부자들의 자녀교육』, 『중앙은행의 결정적 한마디』, 『J노믹스 vs. 아베노믹스』, 『코로나 화폐 전쟁』 등이 있으며, 번역서에 『직장인을 위한 행동경제학』, 『머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