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진 자동차 같은 인생, 목적지에 닿을 수 있을까
글 : 박창영 / '씨네프레소(영화 속 인생 상담소)' 저자, 매일경제 금융부 기자 2025-06-10
중년의 어느 날, 영화가 말을 건네왔다 <4화>
-줄거리-
리처드 후버(그렉 키니어)는 인기 없는 자기계발 강사다. 자신이 발견한 9단계 성공법을 세상에 퍼뜨리고 싶지만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 통에 계획은 번번이 실패한다. 이 와중에 아들 드웨인(폴 다노)은 공군사관학교에 간다며 묵언수행을 하고, 자살 시도에 실패한 처남 프랭크(스티브 카렐)까지 함께 살게 되며 집안에 고민만 켜켜이 쌓여간다.
모두 우울한 상황이지만 자라나는 새싹까지 밟아선 안 되는 법. 막내딸 올리브(아비게일 브레스린)의 어린이 미인 대회 출전을 위해 식구들은 구형 승합차에 몸을 싣는다. 그러나 1,000km를 넘게 달려 캘리포니아로 가는 이들의 여정은 결코 순탄치 않은데···
가족은 여행 시작과 동시에 어려움에 봉착합니다. 구형 승합차가 흔히 말하듯 ‘퍼져’ 버린 것인데요. 1박 2일을 1,000km 넘게 달려야 하는 이들의 여정은 시작부터 삐거덕댑니다.
자동차정비소에서는 부품이 없다며 난색을 표하는데요. 다만, 부품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차를 운전할 수 있는 요령을 알려주죠. 출발할 때 외부의 힘을 이용하면 어떻게든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생스러운 방법이죠. 남들 보기에 민망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중요한 건 조금의 고생과 민망함을 견디면 목적지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이죠. 가족은 차가 멈췄다가 다시 출발할 때마다 다 같이 손으로 밀어 동력을 만들고, 한 명씩 차에 차례로 오르는 방식으로 조금씩 전진합니다.
고장 난 자동차는 인생을 은유하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직업, 건강, 사랑, 가족관계 등 여러 영역에서 실망스러운 결과를 받아들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고장 날 수 있겠죠. 그렇지만 고장 난 차일지라도 작동하는 요령만 알아내면, 목적지까지 그럭저럭 옮겨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각기 다른 이유로 망가진 이 영화 속의 식구들은 함께하는 힘으로 인생을 앞으로 밀고 나갑니다. 딱히 화합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당장은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죠. 어쩔 수 없이 힘을 모았을 뿐이지만 이들의 여행은 그런대로 흘러갑니다. 최선은 아니지만 정체되지 않을 수 있었죠.
이 집의 아버지 리처드는 오랫동안 갈망했던 출판 계약에 실패합니다. 자칫하면 집이 파산할 위기죠. 이보다 더 심각한 건 그가 감당해야 할 좌절의 크기입니다. 리처드는 성공하는 방법을 가르치며 돈을 버는 강사인데요. 모든 사람을 승자와 패자로 구분하던 그가 스스로 패자가 된 듯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이 집의 할아버지, 다시 말해 리처드의 아버지는 점잖은 어른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입니다. 손자 손녀 앞에서 꺼내기 부적절한 대화 소재를 자주 언급하고, 며느리에게는 반찬 투정을 하죠. 진지한 분위기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아들이 느낄 절망을 알기에 그를 위로합니다. 그가 생애 처음으로 아들에게 건넨 따뜻한 말일지도 모르겠어요.
이 영화는 자기의 경계 밖으로 딱 한 걸음 내딛는 용기를 이야기합니다. 감정표현을 자제하는 것을 삶의 모토로 삼고 살았던 노인이 아들을 위로합니다. 그 아들 역시 딸을 위해 남 앞에서 무릎을 꿇죠. 그건 상대방의 삶에 확실한 온기를 남깁니다.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가 자기 테두리를 넘어서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지 서로 잘 알기 때문이죠.
드웨인은 공군사관학교 진학을 목표로 묵언수행까지 하는 의지를 보여주는데요.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차에서 충격적 사실에 직면합니다. 본인이 색맹이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죠. 그는 오랫동안 이어온 침묵을 깨고 가족을 비난하는 말을 퍼붓습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그는 삼촌에게 자기 속내를 털어놓는데요. 18살이 될 때까지 잠만 잤으면 좋겠다고요. 힘든 청소년의 시기가 어서 지났으면 하는 바람을 털어놓은 것이죠. 프루스트를 평생 연구한 삼촌은 그런 조카에게 프루스트의 말을 들려줍니다. 우리를 완성하는 건 행복한 시절이 아니라 힘겨운 시기라고요. 지금은 힘들지만 나중엔 좋은 시간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요.
한때 삶이 너무 힘들어 극단적 시도를 했던 삼촌은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본인의 의지였든지 아니든지 간에 어쨌든 최악의 시간은 넘겼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게 넘어가고 나니 좌충우돌 즐거운 여행에도 함께할 수 있었고, 또 고민하는 조카에게 어른으로서 도움말도 남길 수 있었죠. 자기가 겪었던 창피도 사실 별것 아니었다고 느끼게 됐습니다.
물론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이 시간이 좋은 시기로 기억에 남지 않으면 어쩌지, 걱정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건 결국 좋은 시기로 기억에 남을 것이란 믿음일지도 모르겠죠. 퍼진 차를 데굴데굴 밀고 다녔던 여행이 이 가족에게 추억으로 남았듯이, 우리의 힘든 시간 속에도 분명 미소 지으며 기억할 만한 추억이 곳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미스 리틀 선샤인>을 볼 수 있는 OTT(5월 31일 기준): 디즈니+, U+모바일tv

박창영 '씨네프레소(영화 속 인생 상담소)' 저자, 매일경제 금융부 기자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2014년부터 매일경제신문사에서 일해 왔다. 매경닷컴에 넷플릭스, 왓챠, 웨이브 등 OTT 영화를 리뷰하는 코너 '씨네프레소'를 연재하고 있으며 동명의 책을 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