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천재’ 뉴턴, FOMO에 무릎을 꿇다? |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과학 천재’ 뉴턴, FOMO에 무릎을 꿇다?

글 : 방현철 / 조선일보 기자 2025-06-02

“신성(神聖)에 필적하는 지성의 힘으로, 행성의 운행과 형상, 혜성의 경로, 대양의 조석을 자신의 수학으로 불 밝혀서 처음으로 설명했다.”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무덤에 있는 라틴어 묘비명이다. ‘과학 천재’였던 뉴턴의 업적이 잘 요약돼 있다. 26살에 영국 케임브지리대 최연소 수학 교수가 됐고, 44살에는 자신의 연구 성과를 모은 ‘프린키피아(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펴내 영국에서 최고 과학자로 떠올랐고 유럽까지 이름을 떨쳤다.



뉴턴은 1643년 영국의 작은 마을 울스도프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대를 나와서 그곳에서 교수를 지냈다. 런던에서 활동하던 인생 후반부까지 그가 평생 이동한 곳은 직선거리로 240km 안에 있었다. 그는 활발히 사람을 사귀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뉴턴의 인생은 조폐국 일을 하기 전인 50대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조폐국은 금화, 은화 등의 발행을 책임진 곳이다. 아직 중앙은행이 없던 시대에 통화를 공급하고 통화 가치를 유지하는 일을 했다. 뉴턴은 53살에 조폐국 3대 고위직 중 하나인 감사관, 56살에 최고위직인 조폐국장을 맡게 된다. 


당시 금화나 은화의 가장자리를 조금씩 깎아내 팔거나 위조에 활용하는 게 문제였다. 뉴턴은 가장자리를 톱니 모양으로 만들어 이런 행위를 막았다. 또 영국이 금본위제로 이행해야 한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뉴턴의 투자 인생도 50대 이후에 펼쳐진다. 교수 연봉은 100파운드였는데, 조폐국장 때 연봉이 1500파운드로 대우가 확 달라졌다. 뉴턴은 국채, 주식 등에도 투자해 연간 1000파운드의 추가 소득도 올렸다. 당시 영국의 1인당 연소득은 10파운드에 불과했다. 뉴턴은 과학 천재에 그친 게 아니라 고액 연봉과 투자 성과로 상위 1%에 속하는 부자였다.



‘신상’ 금융상품에 투자했던 뉴턴


17세기 영국 귀족과 부자의 투자 대상은 부동산이었다. 귀족들은 상속받은 영지 외에도 런던 같은 도시에 건물을 짓고 임대료를 받는 식의 투자를 했다고 한다. 뉴턴은 1705년 과학자로서는 처음으로 영국 기사 작위를 받아 귀족의 반열에 오른다.


하지만 뉴턴은 다른 귀족과 달리 부동산보다 ‘신상’인 금융상품에 관심을 뒀다. 그가 조폐국장이던 17세기 후반~18세기 초 영국에선 ‘금융혁명’이 벌어지고 있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시작된 금융 혁신을 영국식의 시장 중심 금융 시스템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특히 1688년 명예혁명으로 의회 권력이 강해지면서 국왕이 마음대로 세금을 올리지 못하게 되자, 국가 재정을 조달할 새 기법으로 국채 등이 떠올랐고 국채 관리를 위해 잉글랜드은행(Bank of England), 남해(South Sea)회사 등이 생겨났다. 국채와 주식회사는 금융혁명으로 양대 신흥 투자 수단으로 떠올랐다. 이때 뉴턴의 투자 선택은 부동산이 아닌 국채, 주식이었다. 


당시 런던 주식 시장에서 3대 대장주는 잉글랜드 은행, 동인도 회사, 남해회사였다. 1694년 설립된 잉글랜드 은행은 영국 국채를 인수하는 대신 발권력을 부여받았다. 뉴턴은 66살이던 1709년부터 잉글랜드 은행 주식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1711년 설립된 남해회사는 영국 정부의 빚을 인수하는 대신 자사 주식을 주는 사업을 했다. 현대적으로 얘기하면 빚을 주식으로 바꿔주는 출자전환을 하는 금융 혁신을 내세운 것이다. 연 6% 배당을 했는데, 재원은 영국 정부에서 나왔다. 전쟁 물자를 대고 돈을 바로 못 받은 업자들은 대신 받은 남해회사 주식을 값이 올랐을 때 팔 수 있었기 때문에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고, 영국 정부는 빚을 꼭 갚을 필요가 없어져 역시 이득이었다. 


또 연 4~5%인 국채 이자보다 많은 배당을 주기 위해서 남해회사에 추가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사업권을 줬다. 스페인령 남미 등과의 독점 무역권이다. 그런데 이 추가적인 독점 사업권은 실제로는 거의 수익을 내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입소문만으로 남해회사 주가를 올리려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남해회사는 1720년 역사상 최초의 주식 ‘버블(거품)’에 휘말리게 된다. 그런데 뉴턴은 이미 1714~1717년 남해회사 주식을 사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70대에 접어들었을 때다. 




FOMO에 굴복, 몰빵 투자까지


1720년 초 뉴턴의 재산은 3만파운드 약간 넘었는데, 지금 우리 돈으로 100억원이 넘었다. 뉴턴은 영국 국채, 잉글랜드 은행 주식, 남해회사 주식 등 당시의 우량 자산에 분산 투자했다. 투자는 그가 스스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뉴턴은 1720년 4월 갖고 있던 남해회사 주식을 모두 판다. 당시 영국 정부는 거의 모든 부채를 남해회사에 넘기기로 했다. 이런 계획이 수익성이 있을지는 시장에서 평가가 갈렸다. 뉴턴은 일단 지속 가능성이 없다고 본 것 같다. 뉴턴의 남해회사 매입가는 100파운드 정도였다. 매도가는 350파운드 정도니 꽤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 


앤드류 오들리즈코 미 미네소타대 수학과 교수가 뉴턴의 투자를 꼼꼼하게 따진 논문을 썼는데, 그에 따르면 첫 번째 남해회사 투자로 뉴턴은 2만파운드를 벌었다. 지금 우리 돈으로 약 70억원에 달한다.


하지만 주식 투자자 대중은 뉴턴과 다르게 생각했다. 남해회사가 많은 국가 부채를 떠안아도 계속 많은 배당을 주는 게 가능할 뿐 아니라 무역독점권까지 있으니 ‘대박’ 투자 기회라고 봤다. 주가는 하루가 다르게 폭등세를 보였다. 그해 7월 주가는 1000파운드에 육박하게 된다.


그런데 뉴턴은 그가 팔고 나서 남해회사 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자, 주가가 700파운드까지 오른 6월부터 다시 남해회사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한다. 당시 신문에는 남해회사 주식을 두고 유명한 은행가라는 사람이 썼다는 “나머지 세상이 미쳤을 때, 우리는 어느 정도 그것을 흉내 내야 한다”는 글까지 등장하던 때였다. 


뉴턴은 남해회사 주가가 꼭지를 지나서 7~8월 조금씩 떨어지는데도 매수했다. 게다가 갖고 있던 국채 등을 팔아 남해회사 주식에 ‘몰빵’하기까지 했다. 위대한 과학자였지만, FOMO(Fear of Missing Out, 나만 소외된다는 두려움)는 피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그해 9월 투자자들의 열광은 의심으로 바뀌었고 남해회사 거품은 터졌다. 주가는 80% 넘게 폭락하면서 뉴턴의 남해회사 투자는 ‘쪽박’이 됐다. 



천재는 투자를 통해 무엇을 배웠나  


뉴턴은 “천체의 움직임을 계산할 수는 있지만, 사람들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뉴턴의 금융 지식이 부족했을까. 그가 1727년 84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조폐국장을 계속 지내고 있던 것을 감안할 때 동시대인보다 금융 지식이 얕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FOMO에 빠졌던 수업료는 상당했다. 오들리즈코 교수에 따르면, 뉴턴은 남해회사 주식 재매입으로 최소 2만2600파운드를 잃었다. 첫 번째 투자로 번 돈보다 더 컸다. 1921년 중반 그의 재산은 2만 파운드까지 줄었다. 


그래도 뉴턴은 부자로 삶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재산은 3만 파운드 가까이로 회복된 수준이었다. 잉글랜드 은행 주식과 더불어 여전히 남해회사 주식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남해회사 주식의 절반은 나중에 채권으로 바꿔줬는데, 이것도 들고 있었다. 다시 채권, 주식에 돈을 나눠 넣는 분산 투자로 돌아온 것이다. 


뉴턴은 자신이 과학 성과를 올린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 등 선구자들이 있었기에 자신이 과학에 있어서 동시대인을 이끌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투자에서 있어서는 그가 기댈 거인들이 아직은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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