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고 헤매는 내게 옛 친구가 찾아왔다
글 : 박창영 / '씨네프레소(영화 속 인생 상담소)' 저자, 매일경제 금융부 기자 2025-05-19
중년의 어느 날, 영화가 말을 건네왔다 <3화>
-줄거리-
그저 그런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던 크리스토퍼 로빈(이완 맥그리거)이었지만 막상 세월이 흐르고 나니 남들과 별다를 바 없이 커버린 자신을 보고 실망한다. 그러나 감상에 빠질 시간도 없이 인생은 그를 휘몰아친다. 회사에서는 그에게 동료 상당수를 해고하는 구조조정 아이디어를 내라고 하고, 아내와 아이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주지 않는 크리스토퍼에게 서운한 감정을 내비친다. 어느 날, 그의 앞에 곰돌이 푸와 ‘100에이커 숲’의 친구들이 나타나는데.
크리스토퍼 로빈은 인생의 위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매출이 감소하기 시작하자 회사에서는 그에게 구조조정을 담당하게 했죠. 함께 땀 흘린 동료 중 해고할 사람을 골라내는 고통스러운 작업이었습니다. 가정생활도 어쩐지 막다른 벽에 다다른 느낌입니다. 주말도 없이 일하는 건 가족을 위한 일인데 딸과 아내는 알아주지 않죠. 자신을 그저 약속도 안 지키는 일 중독자 아빠처럼 여기는 듯합니다.
푸가 크리스토퍼 로빈 앞에 나타난 건 바로 그때였는데요. 워낙 바쁜 와중에 친구가 나타나니깐 반갑기는커녕 귀찮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나 숲속 친구들과 뚜렷한 목적 없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크리스토퍼 로빈은 자신이 소중한 걸 잊고 살아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에는 효율적이지는 않지만 중요한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죠. 아이에게 학업과 전혀 관련 없는 책을 읽어주거나, 친구들과 수다 떠는 시간이 그렇죠.
어쩐지 자신이 옛날의 모습에서 너무 멀어진 듯 느껴져 크리스토퍼는 조심스럽게 고백합니다. “난 길을 잃었다”고 말이에요. 하지만 무슨 상관입니까. 친구가 다시 찾아줬는 걸요. 때때로 순수했던 자기 모습에서 떨어져 방황해도 괜찮습니다. 우리와 제자리까지 함께 가줄 친구, 그리고 가족이 있으니까요.
크리스토퍼 로빈은 회사의 위기를 타개할 아이디어를 떠올리는데요. 바로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시간을 늘려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 사람들은 놀러갈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회사에서 만드는 ‘여행 가방’도 더 많이 사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얼핏 듣기엔 현실감 없는 동화 속 이야기처럼 느껴지는데요. 영화의 배경이 1940년대 런던이었음을 고려하면 이해할 만도 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휴식 시간만을 허락받았으니까요. 회사가 어려워진 건 노동의 부족이 아닌 노동의 과잉 때문이라고 크리스토퍼는 지적한 셈입니다.
회사 상사 자일스는 그의 의견에는 현실성이 없다며 무시하는데요. 그러자 크리스토퍼는 자일스를 100에이커 숲속 친구들의 상상 속 괴물인 ‘우즐’에 빗댑니다. 우즐은 사람을 막연히 공포에 떨게 하면서 중요한 걸 보지 못하도록 하는 존재인데요. 크리스토퍼의 말은 결국 우선순위 설정에 관한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물론 우리가 인생에서 시간을 쏟는 그 어떤 것도 무가치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다만 그게 우리의 가족과 소중한 사람들까지 돌아보지 못하게 만든다면 분명 문제가 있다는 것이죠. 인생에서 우선순위의 전도가 일어날 때 어떤 ‘우즐’이 내 인생을 흔들고 있는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크리스토퍼 로빈은 내일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내일 가족들에게 더 좋은 것을 안겨주기 위해서 오늘의 안락을 포기하는 인물이죠. 그러나 행복한 내일은 좀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늘 내일을 꿈꾸고, 또 내일의 내일을 상상하는 동안, 행복한 오늘은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푸가 그에게 되찾아준 건 오늘을 살아가는 법이었습니다. 푸에게 중요한 건 아침에 일어나 맛있는 걸 먹고, 햇볕을 쬐며 친구의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는 내일로 달려가기 위해 오늘을 연료로 쓰는 대신 매 순간을 몸으로 느끼며 살아갑니다.
물론 그건 직업을 가질 필요가 없는 푸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결국 중요한 건 오늘과 내일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겠죠. 직장에서의 성장을 생각하고, 퇴직 이후의 노후생활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내일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내일을 위한 도움닫기로만 존재하는 게 아닌 오늘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짐을 명심해야겠죠.
작품 말미에 등장하는 푸와의 피크닉 장면을 봤을 때, 아마 크리스토퍼는 이후로도 푸를 가까운 곳에 두고 자주 만났을 것 같습니다. 크리스토퍼의 상상은 늘 미래로 치닫지만, 그때마다 푸는 오늘을 떠올리게 해주죠. 이 영화는 우리에게도 푸와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취미가 됐든, 친구가 됐든 간에 우리에겐 늘 ‘오늘’에 발붙이게 해줄 강력한 연결고리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를 볼 수 있는 OTT(4월 30일 기준): 디즈니+

박창영 '씨네프레소(영화 속 인생 상담소)' 저자, 매일경제 금융부 기자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2014년부터 매일경제신문사에서 일해 왔다. 매경닷컴에 넷플릭스, 왓챠, 웨이브 등 OTT 영화를 리뷰하는 코너 '씨네프레소'를 연재하고 있으며 동명의 책을 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