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미래엔 여유시간이 풍족할 것이라는 착각
글 : 이제경 / 100세경영연구원 원장 2025-05-09
은퇴를 하고 나면 하루 8시간의 근로시간이 자유시간으로 대체된다. 처음엔 자유시간이 그지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동안 미뤄뒀던 취미를 즐기고, 여행도 다닌다. 그런데 1~2년이 지나면 자유시간이 무겁게 다가온다. 지루하기도 하고,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이런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상당 수 은퇴자는 다시 일터로 발길을 돌린다.
은퇴 후 얻는 것은 ‘자유시간’이고, 잃은 것은 ‘잘 짜여진 8시간’이다. 여기에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정기적인 수입도 뚝 끊긴다. 결국 새로 얻은 8시간의 자유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은퇴 후 삶의 질이 달라진다. 은퇴 후 삶이 행복으로 넘치길 원하는가. 그렇다면 ‘1000시간 법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000시간 법칙’은 매년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은퇴자가 통제하면서 행복을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시간이다. 일종의 경험법칙이다. 한해에 1000시간이니, 하루로 따지면 대략 2.7시간에 해당한다.
자유시간이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1000시간 법칙’은 마리사 샤리프 교수(펜실베니아대)와 캐시 모길너 교수(UCLA)가 지난 2021년에 ‘성격 및 사회심리학저널’에 발표한 ‘자유시간이 웰빙에 미치는 영향’이란 논문에 기초한다. 연구자들은 ‘미국시간사용조사’ 자료를 토대로 미국인 2만여명의 자유시간을 집중 분석했다. 연구 결과 하루 2시간의 자유시간을 가진 사람의 웰빙지수가 최고조에 달했고, 5시간을 넘기면 행복감은커녕 오히려 지루함을 느끼는 것으로 조사됐다. 자유시간이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은퇴 후 하루 2.7시간, 즉 연간 1000시간을 어떻게 의미 있게 보내느냐가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인 셈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하루 8시간을 ‘계획된 자유시간’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 시간표가 없는 8시간은 자칫 지루한 은퇴생활로 이어질 수 있다. 여기에 연간 1000시간을 어떻게 의미 있게 보낼 것인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 미국 은퇴자 2000여명을 대상으로 행복한 은퇴의 비밀을 연구한 재무전문가 웨스 모스(Wes Moss)의 생각을 귀담아 들을만 하다. 그가 밝혀낸 행복한 은퇴의 비밀은 ‘핵심추구(Core Persuits)’에 있었다. 핵심추구는 즐거움은 말할 것도 없고,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영감과 힘을 주는 ‘슈퍼활동’을 말한다.
그게 자원봉사나 취미활동일 수 있고, 자신의 능력을 활용한 시간제 일이 될 수도 있다. 웨스 모스 연구에 따르면 행복한 은퇴자는 3.6개의 ‘핵심추구’을 갖고 있었고, 불행한 은퇴자는 1.9개에 불과했다. 핵심추구 3.6개는 하루 동안 하는 활동 개수를 뜻하지 것이 아니라, 1년 동안 나눠서 몰입할 수 있는 활동이면 된다.
‘핵심추구’는 은퇴자뿐 아니라 중장년층에게도 중요하다. 투자의 복리효과를 누리려면 하루라도 빨리 투자에 나서야 하듯이, 은퇴 이전에 자신의 몸에 맞는 ‘핵심추구’를 여러 개 확보하는 게 좋다. 그렇지 않으면 예일대 갈 자우버만 교수가 말한 ‘미래시간여유(Future Time Slack)’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지금은 여유가 없지만 먼 미래엔 여유시간이 풍족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착각일 뿐이다.
‘미래시간여유’의 함정
행복한 은퇴자들은 평균 3.6개의 ‘집중추구’ 활동을 한다는 웨스 모스의 연구결과에 나는 전적으로 동조한다. 요즘 나의 ‘집중추구’ 활동은 2개에 불과하다. 은퇴설계 관련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하는 게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골프다. 이렇다 보니 가끔씩 지루함과 외로움이 찾아올 때가 있다. 배드민턴, 탁구, 테니스, 그림 그리기, 사진 찍기 등을 하고 싶은 욕구가 있지만 ‘미래시간여유’를 핑계삼아 선뜻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경제적 자유로 가는 길’과 관련된 교육을 재능기부 차원에서 하고 싶지만 아직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미래시간여유’의 함정에 빠져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글쓰기가 적성에 맞고, 성취감을 안겨주는 ‘집중추구’ 활동임에 틀림없지만, 여전히 시간이 돈이라는 과거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은 아닐까. 은퇴 이후엔 ‘돈이 시간’이라는 믿음으로 사고전환을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시간이 돈’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셈이다.
은퇴 후에 다양한 ‘집중추구’ 활동을 하려면 ‘의미 있는 삶’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져야 하고, 재정 여건도 고려해야 한다. ‘의미 있는 삶’ 또는 ‘목적 있는 삶’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인지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단지 은퇴 후 삶이 지루하거나 외롭게 느껴진다면 삶의 목적이 희미할 가능성이 높다. 삶의 목적은 거창한 게 아니다. 오늘 아침 나를 일찍 깨우고, 기쁨을 주는 무언가가 있다면 ‘핵심추구’ 활동을 하는 것이고, ‘핵심추구’가 모이면 ‘의미 있는 삶’이 되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매순간이 의미 있다고 느끼는 게 ‘의미 있는 삶’인 것이다.
스페인 바르셀로나대학 연구팀이 바르셀로나 뇌건강센터 자료를 토대로 2240명을 조사해서 지난 2021년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의미 있는 삶’을 사는 사람수록 외로움을 덜 느끼는 걸로 조사됐다. 삶의 의미는 건강-인간관계-생활방식보다 외로움에 더 밀접한 영향을 미친다는 게 연구팀의 견해다.
돈을 쓰는 능력 못지 않게 시간을 의미 있게 소비할 줄 아는 것도 행복을 누리는 지혜인 것 같다.

이제경 100세경영연구원 원장
‘매경이코노미’ 편집장을 역임하기까지 21년 동안 매일경제신문사에서 취재기자로 활동했고, 라이나생명에서 10년 동안 전무이사로 커뮤니케이션 책임자와 최고고객책임자(CCO)로 일했다. 주경야독을 통해 경제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경희대와 숙명여대에서 겸임교수로도 활동했다. 현재 ㈜에코마케팅 감사, 100세경영연구원 원장(비상임)으로 있다. 저서로는 『인생을 바꾸는 100세 달력』, 『All Ready? 행복한 은퇴를 위한 모든 것(대표저자)』, 『스타 재테크(공저)』, 『잘 나가는 기업, 경영비법은 있다(공저)』 『재테크박사』 등이 있다. 가치 있는 삶을 스스로 진단할 수 있는 ‘개인의 사회책임(ISR) 지수’를 창안하기도 했다. 필자 이메일 주소: happylogin10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