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처럼 익어가는 삶, 치즈처럼 녹아드는 한 입
글 : 이한나 / 요리전문가, 작가 2025-04-14
어디론가 훌쩍 떠난다는 게 무척 낭만적이고 기분 좋은 일이라는 인식은 나이 들수록 줄어든다. 몸과 마음이 예전 같지 않으니 이미 짜여진 안락한 패키지를 선호하게 된다.
반면 살아오면서 쌓인 취향 데이터와 지금의 상태에 대한 현실적인 판단들이 오히려 주제가 있는 짧고 굵은 외유로 바뀌고, 그게 꽤 많은 기쁨을 준다는 것도 깨닫고 있는 중이다. 그 중심에는 ‘나의 주체적인’ 전제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구체성이 생기고, 비슷한 방향성을 가진 동반자도 내 목적 달성 더하기 새로운 인연과 발견들도 이뤄진다.
미국 시인 랄프 왈도 에머슨은 여행의 가치는 “목적지에 있는 게 아니라 여정에 있다”고 했다. 젊을 때 만큼의 목적 지향적인 역동성은 없지만 내 호흡대로 이뤄지는 선택과 집중들은 요즈음 더 충만한 기쁨을 준다.
얼마 전 유럽식 사과주 ‘시드르’ 및 내츄럴 와인을 생산하는 충주 ‘작은 알자스’, 레돔 농장 방문이 그랬다. 포도밭 가지치기 농활에 참가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자연과 더불어 작업한 시간들, 먹고 마신 맛나고 건강한 음식과 음료들, 만난 사람과 동물들, 모두 '작은 알자스'를 방문하기 전보다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충만한 행복을 줬다.
와인을 주제로 한 여행은 마냥 행복한 여정은 아니었지만 그 과정을 통해 삶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을 수 있음을 제시한 영화 <사이드웨이>.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 고장인 산타 이네즈로 총각파티를 떠난 두 중년 남자의 좌충우돌 여행기를 다룬다.
절친인 마일즈와 잭은 잭의 결혼을 앞두고 와인으로 유명한 산타 이네즈로 총각파티를 빙자한 일주일간의 와이너리 투어를 다녀온다. 중학교 영문학 선생님이자 아직 등단 못한 작가 마일즈는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중견 배우 잭과 달리 꼬장꼬장하고 생각도 재는 것도 많은 이혼남이다.
예비 새신랑임에도 그저 여자와 노는 것에만 혈안이 된 잭이 와인 서버이자 싱글맘인 스테파니와 불타는 애정행각을 벌이는 동안 마일즈는 스테파니의 친구이자 웨이트리스인 마야와 썸을 탄다.
와인에 조예 깊은 마야와 대화가 너무 잘 통하던 마일즈는 값싼 멀롯이나 손을 크게 타지 않는다는 까베르네의 평범함 보다는 특별한 관심과 관리가 필요한 피노에 대한 애정을 마야에게 피력한다. 마치 그렇게 자신을 알아봐주는 이가 없어 작가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자신의 팔자가 피지 못한 거라 탓이라도 하듯.
그러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가장 아끼는 건 메를로와 까베르네 프랑을 블랜딩한 1961년산 생떼밀리옹 그랑 슈발 블랑이다. 이런 자기 모순과 어쩌면 자기 혐오에 빠져있는 마일즈에게 건네는 마야의 와인 철학은 실로 참 사려 깊고 포용적이다. 그녀에게 와인은 살아있는 생명체 같고 삶 그 자체이다. 병을 따는 순간 계속해서 새로운 결이 드러나면서 변하고 복잡해지다가 최고치를 치면 숙명적으로 맛이 떨어진다. 마치 우리 삶처럼.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연인으로 발전한 두 커플은 와인처럼 클라이막스에 이르는가 싶더니 잭의 결혼을 알게 된 스테파니의 분노의 주먹질로 끝나버린다. 집이 있는 샌디에고로 돌아온 후 꽤 허탈한 성찰과 화해의 시간들을 보내던 마일즈는 자신의 소설 원고 드디어 완주한 마야의 피드백을 전화 응답기에 녹음된 음성으로 듣게 된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을 알아봐준 그녀를 만나러 산타 이네즈로 향한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렉스 피켓의 원작을 출판 전 각색해서 영화화한 알렉산더 페인 감독은 <사이드웨이>로 2005년 아카데미 각본상과 각색상을 수상했고, 무엇보다 와인 문화, 특히 피노누아에 대한 붐을 일으키는데 일조를 했다. 이 영화로 피노누아 수요가 캘리포니아 지역에서16%, 산타 이네즈 관광객 방문율이 20% 증가하는 효과를 낳았다고 한다.
술 취해서 옆으로 기울어진 상태를 일컫는 <사이드웨이>는 시종일관 두 남자의 술판과 비행 그리고 갈등과 봉합을 따라가는 로드무비이다. 그 ‘기울여진’ 상태의 여정 속에서 마일즈는 삶 그 자체를 대변하는 와인과 자신의 삶의 공통성을 인정하게 되어 더 열린 마음으로 즐길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지극히 Gen X의 감성을 담아 지금 감성과는 조금은 동떨어진 도덕성과 자유분방함은 있지만 그 여정은 따뜻하고 영감을 준다. 여러 공감 포인트와 와인, 삶, 이혼과 새로운 출발, 용기와 응원 등 다양한 담론 소재도 흥미롭다.
국내 와이너리 투어는 앞서 언급한 작은 알자스 레돔 농장 외에도 다른 전국의 와이너리, 민속주 양조장 등을 검색해서 방문해보는 것도 좋은데 일단 <사이드웨이> 보며 와인 한잔 즐겨보는 것부터 추천.
와인 한잔에 곁들이면 좋을 ‘사이드웨이 안주’로 이탈리아 북부 요리인 치즈 감자전, 프리코(frico)를 소개한다. 원래는 수도사들이 알프스 산맥에서 풀 뜯어먹던 소젖으로 만드는 몬타시오 치즈가 들어가야 하지만 에멘탈, 그뤼에르 혹은 아시아고로 대체하거나 그냥 좋아하는 치즈 넣어도 좋다.

이한나 요리전문가, 작가
신문방송학을 전공했지만 다큐멘터리 연출자가 되기 위해 미국 뉴욕대에서 영화학을 공부하며 다큐 제작, 배급사에서 인턴쉽을 수행. 그 경험은 오히려 영화와 대중간의 소통 창구 역할이 적성에 더 맞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귀국 후 영화제, 기자, 영화진흥위원회 공무원, 한국영화 자막 및 시나리오 번역 작업 등의 업무들을 거치지만 또 한번의 방향 전환을 하게 된다. 우연한 제안으로 영화 〈생활의 발견〉,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밀양〉 등의 프로듀서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아마 마지막일 세 번째 방향 전환은 요리. 오래 품었던 요리에 대한 열정은 목포에서 서양 가정식 쿠킹 스튜디오로 출발, 2023년 서울의 ‘푸드 살롱’으로 재정비 한 ‘스프레드 17’. 살롱지기로 서양 가정식 원 테이블 밥집 운영하며 요리 과학서 <풍미의 법칙> 역서도 내고, 영화와 요리 관련 요리책 집필과, 쿠킹 클래스, 다양한 영화-요리 관련 팝업 등을 준비하며 재미있는 컨텐츠를 제공하려고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