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을 시로 써 본다면 |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나의 삶을 시로 써 본다면

글 : 박창영 / '씨네프레소(영화 속 인생 상담소)' 저자, 매일경제 금융부 기자 2025-04-14

 중년의 어느 날, 영화가 말을 걸어왔다 <2화



-줄거리-


중학생 손자 종욱(이다윗)과 단 둘이 살아가는 미자(윤정희)는 아름다운 시를 한 편 써보고 싶은 생각에 문화센터 시 강좌에 등록하고 세상의 아름다운 것을 적어 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스로 생을 마감한 여자 중학생의 일기가 발견되고, 거기에 자기 손자와 친구들이 성폭행범으로 지목돼 있음을 알게 된다. 미자는 ‘자식의 미래를 망쳐서는 안 된다’는 명분으로 모인 가해자 학부모 모임에 참석하고, 피해자 엄마와 합의하려 시도하는 과정에서 진정으로 손자를 위하는 게 무슨 일인지 고민한다.

 




미자는 손자 종욱이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음을 알게 된 뒤 깊은 혼란에 빠집니다. 어느덧 수염이 거뭇거뭇하게 났어도 아직 자기 눈에는 예쁜 아기일 뿐이었거든요. 그런 손자가 남을 다치게 할 수 있는 존재가 됐다는 사실이 좀체 믿기지 않습니다.


종욱 역시 할머니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들킨 뒤 민망함을 느끼죠. 밥을 몇 숟가락 뜨지도 않고 식사 생각이 없다며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이때 미자가 종욱을 앉히며 “할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무엇이냐”고 묻는데요. 아무리 손자가 괴물 같은 일을 저질렀어도 잘 먹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게 할머니 마음인 것입니다. 미자의 고민은 ‘어떻게 하는 게 손자를 참으로 사랑하는 일인지’에 대한 것일 뿐 손자를 사랑하길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품지는 않는 것이죠.





미자는 문화센터 시 강좌 중 ‘내 인생의 아름다웠던 순간’을 발표하며 어렸을 때 언니가 자신을 아껴주던 모습을 회상합니다. 미자에게는 존재 그 자체로 사랑받던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 언니가 자신에게 보여준 사랑은 미자가 뭘 잘했기 때문에 베풀었던 것은 아니었죠. 설사 미자가 실수하더라도 언니가 그 사랑을 거둬가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제 미자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죠. 미자에게 간병 서비스를 받는 동네 남성은 미자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는커녕 어떻게든 착취해보려는 생각으로 가득하고요. 이웃들과 일상의 사소한 주제를 가지고 수다를 떨고 싶어도 노인인 미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없습니다. 딸은 아들을 자기에게 맡겨놓고는 찾아오지도 않고요. 손자는 할머니의 신뢰를 저버리고 추악한 죄를 저지르기까지 하죠. 


세상의 온갖 홀대를 경험하는 미자가 떠올리는 ‘아름다운 순간’이 어린 시절 사랑받던 기억이라는 건 슬프게 느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어쩌면 그토록 따뜻하게 환영받던 기억이 있기에 지금의 냉대도 견뎌낼 수 있는지 모르겠죠. 힘겨워도 인생을 버텨 나갈 수 있는 건 삶의 몇몇 순간에 누군가가 남겨준 온기 덕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가해자 학부모들은 각자 500만원씩 총 3000만원을 모아 피해자 모친에게 합의금으로 전해주기로 하는데요. 미자는 어려운 형편에도 가까스로 500만원을 모아서 건넵니다. 그리고 한 가지 결심을 더 하는데요. 그건 손자인 종욱이 저지른 추악한 행위를 경찰에 알리는 것입니다. 미자에겐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것만큼이나 손자를 처벌받게 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죠.

미자는 종욱에겐 자기 계획을 말하지 않은 채 손자가 좋아하는 피자를 사 먹이고, 발톱을 깎아줍니다. 그러면서 언제나 깨끗한 몸 가짐으로 세상을 대할 것을 당부하죠. 


그녀에게 손자를 먹이고 씻기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손자가 자기 죄를 뉘우칠 기회를 갖게 해주는 것도 사랑이죠. 아마 합의금을 건네고 없었던 일처럼 되면 손자는 자신이 저지른 일의 무게를 평생 알지 못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가해자 학부모들은 모두 ‘애들 미래를 생각하자’며 일을 덮으려 하지만, 미자에겐 손자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어른으로 크도록 내버려두는 것이야 말로 그의 미래를 망치는 일이었던 셈이죠.


미자는 영화 초반부터 끝까지 시를 딱 한 편만 쓰고 싶다는 열망으로 간절합니다. 작품의 말미엔 그녀가 쓴 시가 나오기도 하는데요. 사실 미자는 손자를 경찰에 넘기기로 마음먹은 바로 그 순간, 누구도 쓰기 어려운 시를 한 편 완성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추악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게 미자가 쓴 한 편의 시였던 셈이죠. 과연 관객 또한 미자처럼 자기 삶으로 시를 써 내려갈 수 있을지, 영화 <시>는 무거운 질문을 던집니다.


<시>를 볼 수 있는 OTT(3월 31일 기준): 티빙, 웨이브, 왓챠, U+모바일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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