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에서 감정 표현에 서툴었던 남자의 최후 |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가정에서 감정 표현에 서툴었던 남자의 최후

글 : 한혜경 / 작가, 前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2025-04-14

졸혼 위기에 처했다는 은퇴남 A씨가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감정 표현에 서툰 건 사실이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나의 질문에 대해 A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노상 화를 잘 내고 폭력적이었어요.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말 없고 감정을 억제하는 사람이 됐고요. 결혼 초부터 아내로부터 감정 표현이 너무 없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너무 답답하다는 불만을 들었고, 아이들과의 관계도 평생 서먹서먹했어요."



하지만 은퇴 전에는 가족들의 불만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내심, 조그만 일에도 화를 폭발하고 폭력을 쓰던 아버지보다 백배 나은 가장이라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나도 섭섭한 게 없었던 건 아니에요. 회사에서 힘들게 버티는 게 다 가족을 위해서인데 그걸 몰라주는구나, 싶었죠.... 그래도 나중에 아이들 다 독립시키고 나면 그때부터 사이좋게 지내도록 노력해야지, 그때가 되면 내 마음도 알아주겠지 생각했어요.”

   


가족은 말 안 해도 내 마음 알아준다? 


그러나 가족 관계는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다. 우선 아이들 결혼이 늦어지고 돈 문제로 인한 갈등까지 생기면서 자녀를 독립시킨 후에 아내와 사이좋게 지내겠다는 계획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정년퇴직한 직후부터 아내와의 싸움이 잦아지면서 결혼생활을 계속하기가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어서야 깨달았어요. 아이들의 결혼이나 돈 문제보다 더 심각한 건 가족 간에 서로를 너무나 모른다는 점이었죠. 특히 집사람과 감정적인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너무 많이 시간이 흘렀다는 걸 이제야 알았네요.”


‘앞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그는 한참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그동안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아주겠지, 내 멋대로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이런 말도 하고 싶고..., 아, 그리고 퇴직한 후부터는 나도 많이 상처받았다는 말도 하고 싶네요. 남들도 다 그럴까요? 낭떠러지에서 떠밀리는 기분이 들었고, 가족들의 사소한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도 마음이 쓰라렸는데 표현을 못했어요.”


비록 늦은 감이 있지만, A씨가 이제라도 자신의 감정을 알아채고 표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헤어지기 전에 하소연처럼 한마디를 덧붙였다. 


“참 이상하지 않나요? 회사 다닐 때는 감정 표현 같은 거 잘하지 않아도 위아래 두루두루 잘 지냈는데, 가족들과의 관계는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요? 퇴직한 후에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감정을 숨기고 살아온 직장생활


정말 그렇다. 돌아보면 직장생활은 감정 표현을 잘하지 않아도 잘 할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지나친 감정 표현이 방해가 되는 것 같았다. 지나치게 감정이 예민해서 동료들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 혹은 감정 하나 컨트롤하지 못하는, 자제심이 부족한 사람으로 오해받았으니까. 그러다 보니 감정은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감정 자체를 무시하며 산 적이 많았다. 마음이 힘들 때마다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며 버텼던 기억이 난다.


‘감정 같은 건 신경 쓰지 마. 힘들어도 참고 견뎌야 해.’

‘감상 따윈 버려. 앞으로 나아가야 해.’


하지만 날이 갈수록 감정이 이성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요즘 내 주변에서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은퇴 때문인지, 나이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전에 없이 감정이 폭발하는 것 같다.’


‘걸핏하면 화가 나고, 조그만 일에도 마음이 상한다.’


‘운동하러 나가서도 짜증을 내는 나 자신이 민망하고 창피하다.’  



감정을 인식하고 이름을 붙여보자 


<감정의 발견>의 저자, 마크 브래킷은 감정을 어떻게 유지하는지가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주장한다. 감정은 인간관계, 일의 실적, 의사 결정, 신체 건강 등을 좌지우지하며, 감정을 이해하고 다루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감정이 삶을 집어삼킨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감성능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감정을 제대로 인식하기, 이해하기, 감정에 이름 붙이기, 감정 표현하기, 조절하기의 다섯 가지 요소가 중요하다고 설명하는데, 특히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편도체 활동이 감소하고 전전두피질이 활성화되면서 감정을 스스로 조절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주장이 흥미로웠다.

  

해서 요즘 하루에도 여러 번‘내가 화가 났나?’‘뭔가를 두려워하고 있나?’‘걱정스러운가?’‘짜증이 나거나 불만스러운가?’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답해본다. 그리고 내 감정에 정확한 이름을 붙여보려고 노력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나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거나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쁨이나 즐거움 같은 긍정적인 감정도 그렇지만, 슬픔이나 불안, 분노, 섭섭함, 짜증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나의 약점과도 연결되는 것이기에 더욱더 감추려고 노력해왔으니까. 


지난주에도 지인이 진지한 표정으로 “요새 기분이 어때요?”라고 질문하는데, 순간 내 감정 상태를 정확히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괜찮아요. 좀 바빴어요. 그쪽은요?”라고 얼버무리는 나 자신이 얼마나 못마땅하던지.


내 감정을 잘 알고, 잘 다루고,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매일매일 실감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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