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백색가전의 신화를 쓴 허샹젠
글 : 샹제(商界) / 중국 경제지 2025-03-28
1980년 허샹젠(何享健)은 23명의 고향 사람들과 5천 위안을 모아 메이디(美的)라는 회사를 세우고 선풍기를 수공업으로 만들었다. 글로벌 가전 제조 기업 메이디의 시초이다. 허샹젠은 공장장 직함을 달았다. 그는 더욱 체계를 갖추어 공장을 키우고 싶었다. 이를 위해서는 요즘으로 따지면 5만~10만 위안(한화 약 1천만~2천만 원)에 달하는 자금이 필요했다.
글로벌 제조업을 향한 첫 도전
메이디 설립 당시, 시장에는 이미 많은 선풍기 브랜드가 있었다. 당시 선풍기는 공정이 단순하고 기술 진입 장벽이 높지 않았다. 시장에는 누구나 쉽게 구매할 수 있는 가격대의 제품이 넘쳐났다. 그래서 선풍기 생산 공장과 수많은 브랜드가 난립해 있었다.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메이디에게는 전쟁이 불가피했다.
메이디는 허샹젠의 지휘 아래 전투에 뛰어들었다. 그 당시 ‘창청’(長城), ‘쥐화’(菊花) 같은 대형 브랜드는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TV나 라디오 광고로 경쟁했다. 반면 메이디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홍보보다는 지역의 오프라인 매장을 공략했다. 그 결과 자신만의 지역 기반을 다지면서 조금씩 성장할 수 있었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비즈니스 전쟁이 점차 치열해지자 허샹젠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메이디는 허샹젠의 지휘에 따라, 모두의 예상을 깨고 중국 선풍기시장 경쟁 구도에서 서서히 물러나 바다 건너 해외 시장으로 향했다.
허샹젠은 “세상이 이처럼 큰데, 중국 회사끼리 왜 서로 싸우고 죽이려 하는가? 다른 차원의 경쟁을 해야 의미가 있다”라고 말했다.
당시 유럽과 미국의 선풍기 산업은 높은 인건비로 침체기에 접어들었고 글로벌 선풍기 시장은 한국 기업이 차지하고 있었다. 허샹젠의 전략은 ‘한국 기업들은 저비용으로 미국과 일본을 이길 수 있는데, 우리라고 못 할 이유는 없다’에서 출발했다. 중국에서 경쟁하는 것은 악순환에 빠질 뿐 경기 활성화에도 악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업체와 경쟁하려면 신뢰할 수 있는 설비 구축이 절실했다. 이를 위해 허샹젠은 무담보 조건으로 은행에서 거액의 대출을 받았다. 그 돈으로 해외에서 최신 기술과 설비를 도입했고, 결과물을 중국 시장이 아닌 해외 시장에 출시했다. 허샹젠의 이같은 행동은 산업을 발전시키는 큰 전환점이 되었다.
끊임없는 기술 혁신과 품질 문제 극복을 통해 메이디 제품은 세계적인 수준의 품질을 갖추게 되었고 비용은 최저 수준까지 낮추었다. 그 결과 한국 기업이 시장에서 서서히 밀려났고 다른 기업들도 더 이상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그후 메이디는 승승장구했다. 매년 600만 대의 선풍기를 생산하고, 그 중 70%가 넘는 물량을 36개 국가와 지역에 수출하며 세계적인 선풍기 수출 기지가 되었다. 메이디의 전략적 전환을 회고해 보면, 그 당시 어떤 기업가도 선풍기를 수출하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개혁개방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외 시장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작은 마을의 선풍기 공장장이었던 허샹젠이 그 점에 주목 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향진 기업이 상장사로
허샹젠은 1968년 광동성 베이자오 마을에서 주민과 함께 폐비닐과 플라스틱을 모아 병뚜껑을 제조하여 판매하는 플라스틱 기업을 설립했다. 이 기업이 지금의 메이디그룹의 효시다. 그런 메이디의 주식 상장은 중국 민간 비즈니스 발전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메이디는 중국 최초로 상장한 향진 기업이었다. 향진 기업은 마을 주민이나 농민들이 모여 설립하고 운영하는 기업으로, 인민공사에 뿌리를 둔 국유기업이다. 메이디는 당시 중국 지방정부가 실시한 재산권 제도개혁 시범기업 선정에 가장 먼저 신청서를 냈고, 1992년 광둥성 정부가 지정한 첫 번째 개혁 시범기업이 되어 정식 주식회사가 됐다. 이후 파격적인 구조조정을 통해 12억 위안의 자금을 조달하며 상장사로 전환했다.
상장 후, 메이디는 확장의 길에 들어섰다. 공개된 데이터에 따르면, 1993년 이후 메이디의 연매출은 400% 증가했고 연간복합성장률이 51%에 달했다. 1994년 메이디 에어컨은 전국 판매량 3위를 기록했고, 1995년에는 4위를 달성했다. 하지만 1996년과 1997년 연간 판매량이 급격히 하락해서 업계 7위 밖으로 밀려 나게 되었다.
한 임원은 “많은 임직원들이 놀랐다. 이런 상황이 일어날지 예상치 못했고, 회사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알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허샹젠은 “매일 결제할 서류가 끝도 없었다. 하루에 4시간밖에 못 잤지만, 모든 일을 처리할 수가 없었다. 각 부서의 책임자들은 상사의 피드백을 기다려야 했다. 일을 마음껏 처리 할 수 없었고 아무도 책임을 지려하지 않았다”라고 회상했다.
그의 리더십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 있다.
“1억 위안의 투자 실패를 감수하더라도, 회사를 위한 공포 메커니즘(위기의식 조장을 통한 경쟁력 강화)을 약화시키거나 없애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회사가 어려움에 처하자 메이디가 실적 부진으로 인해 중국 화학회사인 커롱(科龍: Kelong)에 인수된다는 소식이 시장에 급속히 퍼졌다.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허샹젠은 메이디를 에어컨, 전기기계, 주방용품 등 핵심 제품을 기준으로 하는 5개 독립 사업부로 나누어 사업부장이 일상업무를 책임지도록 했다. 자신은 사업부장만 관리했다. 본사는 사업부의 성과만을 판단했고 사업부가 기준에 미달하면 사업부 경영진은 단체로 그만두어야 했다.
허샹젠은 자신의 권한을 철저히 위임했다. 사업부장이 수천만 위안에 달하는 투자에 대한 의견을 요청했을 때, 그는 ‘당신이 알아서 결정하라’는 한 마디만 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이런 방식은 중국 민간 기업의 경영 승계 방식에 높은 기준을 세웠다. 특히, 당시 허샹젠은 다수의 의견을 물리치고 ‘법치’에 의한 기업경영구조를 확립했다. 이런 개혁은 메이디의 잠재력을 현실로 바꾸었다.
일찍이 메이디 에어컨의 에너지 효율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허샹젠은 연구 개발 부서의 마쥔(馬俊) 박사에게 돈과 장소를 내주면서 “일체 관여하지 않을 테니 반드시 효율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청했다. 메이디에서 연구 개발 인력은 개인 실험실을 신청할 수 있고, 공정한 분배 메커니즘에 따라 ‘능력 위주의 급여 체계’를 적용 받는다. 성과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결과 1998년 메이디는 연간 매출이 2배 늘어난 50억 위안에 달했고, 1999년에는 80억 위안으로 증가했다. 외부에서는 “메이디의 성공은 단순히 전통을 따르거나 맹목적으로 노력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모방과 혁신을 회피하며, 메이디만의 스타일을 확립한 제3의 길을 걸어온 결과다”라고 평가했다.
전통을 타파한 아름다운 승계
지금도 중국 기업은 창업자와 가부장 제도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알리바바와 같은 극소수의 과학기술 기업을 제외하면 여전히 전문 경영인이 두각을 나타내기가 어렵다. 개혁개방 초기 설립된 민간 기업에게 승계 문제는 큰 도전일 수밖에 없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중국 민간 경제에 잠재되어 있는 문제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허샹젠은 승계 문제를 남다르게 극복했다. 허샹젠과 전문경영인들의 관계는 ‘중국 민간 기업의 전문 경영인 제도 실천 모범 사례’라 평가 받을 정도다. 그가 전문경영인들에게 부여한 권한은 일반인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먼저 허샹젠은 월마트의 기업 경영 모델을 앞세우며 1990년대 초부터 가족과 친척들이 메이디에서 점차 물러나도록 했다. 그리고 2012년 8월 25일, 허샹젠은 팡홍보(方洪波)를 후계자로 발표했다. 팡홍보가 메이디 그룹의 회장이 된 것이다. 그가 후계자 승계 회의 석상에서 한 발언은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나는 메이디의 오늘을 위해 100%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99%에 달하는 평생의 에너지와 역량을 쏟았다. 하지만 메이디의 향후 발전에 더 이상 기여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회가 나날이 발전하고 있으니 기업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나는 물러나면서 책임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첫째는 자신에 대한 책임이고, 둘째는 메이디에 대한 책임이며, 셋째는 여러분에 대한 책임이다”라고 밝혔다. 그해, 허샹젠은 70살이었다.
성공적인 승계 이후 메이디의 연간 매출액이 1천억 위안을 돌파하자 메이디 그룹은 “5년마다 메이디의 제품군을 점진적으로 확대해 2천억 위안의 실적을 달성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이를 위해 제품군과 공장을 급속히 확장하고 다수의 영업 인력을 채용했다. 몇 년간의 노력으로 메이디의 매출 규모는 커졌지만 수익성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게다가 전반적으로 시장이 침체기에 들어서자 메이디의 허약한 체질도 드러났다. 게다가 ‘대기업병’도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마케팅 부서를 예로 들면, 실적에 따라 높은 급여를 받던 마케팅 임원들에게 비서와 운전기사가 배치되기 시작했고, 조직도 비대해져서 고비용 저효율 상태가 되었다. 허샹젠은 팡홍보를 찾아 걱정을 내비치며 문제를 짚었다. “첫째, 제품 경쟁력이 열악하다. 둘째, 회사 규모는 크지만 이익률이 너무 낮다.”
그룹을 정식으로 물려받은 팡홍보는 허샹젠이 지적한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며 세 가지 성과를 달성했다. 첫째는 메이디를 글로벌 시장 궤도에 올려놓은 것이고, 둘째는 중국에서 인수 합병을 실시한 것이다. 셋째는 규모의 확대를 중단한 것이다. 그는 주요 사업부문의 제품 모델을 2/3 줄이고, 공장 부지를 매각하며 대리점을 반 이상 줄였다. 또한 생산 위주에서 효율성 위주로 전환했다. 전환의 핵심은 분권화, 스마트화, 글로벌화였다.
이후 메이디는 2013년 선전증권거래소에 상장하면서 ‘소그룹, 대사업부’ 모델을 운영하기 시작했고, 2015년에는 ‘중앙집중화, 권위화, 관료화 타파’를 제시하면서 회사의 의사결정 단계를 줄였다. 그해, 가전업계의 전반적인 침체에도 불구하고 주주귀속 순이익은 전년대비 21% 증가했으며, 총이익은 전년대비 0.46% 증가했다.
2016년에는 포춘(Fortune)이 선정한 ‘세계 500대 브랜드’에 이름을 올렸다. 2017년에는 텐센트의 디펜더(衛士)와 IoT 클라우드를 기반으로 하는 스마트 제품 10개를 출시하면서 가전 제품 회사에서 과학기술 그룹으로 탈바꿈했다.
회사의 DNA 발전이 성공 핵심
허샹젠은 창업 초기부터 단순한 경영 철학과 관리의 개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가전 분야에 집중해 왔고, 수많은 투자 기회를 맞이했지만 시종일관 냉정한 판단력을 유지했다. 허샹젠은 자체 역량과 특성을 기반으로 회사의 산업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점을 깊이 깨닫고 있었다. 그가 이전부터 말해온 “우리는 우리가 벌 수 있는 돈을 벌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돈을 쉽게 벌지만, 너무 욕심을 내면 안 된다. 안정 속에서 발전을 추구하고, 한 단계씩 밟아 나아가는 것이야 말로 불변의 진리이다” 는 발언과 일맥상통한다. 즉 시장의 ‘파이’를 키우는 문제와 회사의 DNA를 발전시키는 것 사이에서 허샹젠은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허샹젠은 회사 지배구조에 대해서도 자신만의 가치관을 갖고 실행에 옮겼다. 1997년 초부터 회사 내부의 인센티브와 책임제를 구축해서 메이디가 고유의 사업모델을 가질 수 있도록 주도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회사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는 합리적인 지분 구조, 전문 경영인 관리 시스템, 고도의 권한 부여 운영체계, 명확하고 투명한 다수 심의와 의사결정 체제, 성과 중심적이고 장기적인 인센티브를 통해 주주와 임원진의 이해 일치화, 개방적 고용 체계가 여기에 해당된다.
몇년 전, 화웨이 회장 런정페이(任正非)의 “전쟁의 대포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에게 지휘를 맡겨야 한다” 는 발언이 회자되자, 허샹젠은 내부 회의에서 “나는 그런 방법을 10년 전에 이미 적용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 적이 있다. 허샹젠이 회사에 뿌리 내린 가치관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외에도 그는 문제에 직면하면 기본적인 논리를 활용해서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그리고 경우의 수를 고려한 다양한 방법으로 문제를 분석해 새로운 문제 해결 개념을 수립하며 위험 요소를 피해갔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러한 능력 덕분에 메이디가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하지만 정작 허샹젠은 메이디의 성공을 회사가 부단히 혁신한 결과라고 말한다. 제품 혁신, 경영 혁신, 마케팅 혁신, 제도 혁신 등이다. 그러나 이면에는 회사의 DNA를 발전시키려는 허샹젠의 뚝심있는 경영철학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래 세대로 시선 돌린 노년의 기업가
현재 메이디그룹은 과학기술, 신에너지, 산업용 로봇 산업에 매진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메이디그룹의 2024년 상반기 총매출은 2,181억 위안으로 전년대비 10% 성장했다. 1분기에는 1,065억 위안의 매출을 달성해서 그룹의 분기별 매출 신기록을 세웠다. 2분기에도 1,116억 위안의 매출을 달성하여 최초로 2분기 연속 천 억 위안을 돌파했다. 메이디의 스마트홈 사업 및 비즈니스 산업 솔루션은 전년대비 각각 11%와 6% 성장했고, 국내외 매출도 전년대비 각각 8% 와 1.3% 성장해서 강력한 사업 모멘텀을 갖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2024년 9월, 메이디그룹주식유한회사(美的集團股份有限公司)는 홍콩 증권거래소의 메인 보드에 상장되어, 중국 본토와 홍콩증시에 상장한 ‘A+H’ 상장 회사가 되었다. 이로써 메이디는 해외사업 확장에 힘을 받는 것은 물론 글로벌 기업 이미지를 구축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메이디는 이제 ‘과학 기술 리더십, 사용자 다이렉트 커뮤니케이션, 디지털 스마트 주도, 글로벌 혁신’이라는 4대 전략을 중심으로 R&D 투자 확대와 글로벌 인재 유치, 기술 선도 기업 지위, 해외 사업 지속 확장의 공고화를 통해 글로벌 과학기술 기업으로 장기적인 성장을 도모할 계획이다.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허샹젠의 시선은 메이디와 함께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2024년 11월 4일, ‘허샹젠 청년 과학자’ 1차 프로젝트가 공식 출범했다. 허샹젠 과학기금 설립 이래 최초의 자금 지원 프로젝트다. 그레이트 베이권역(大灣區: 홍콩, 마카오, 광 둥 9개 도시로 구성) 과학포럼 개막식에서 허샹젠은 영상을 통해 “과학 기금을 설립한 것은 보다 많은 과학 종사자들이 과학 연구에 매진하도록 돕고, 국가 과학기술의 발전, 변화, 혁신에 적극 참여하도록 호소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메이디 홈페이지에는 ‘기업가 정신은 과감히 변하려는 의지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이는 한평생 창업자로 살아온 허샹젠의 핵심 철학이기도 한 동시에 노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업가 정신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샹제(商界) 중국 경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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