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와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트라우마와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글 : 박창영 / '씨네프레소(영화 속 인생 상담소)' 저자, 매일경제 금융부 기자 2025-03-19

<중년의 어느 날, 영화가 말을 걸어왔다>





“장어는 슬퍼하지 않지. 그저 살아가는 데 집중할 뿐” 



-줄거리-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던 야마시타(아쿠쇼 코지)는 아내의 불륜 장면을 목격한 뒤, 분노에 휩싸여 그 자리에서 부인을 살해한다. 경찰에 자수해 수감된 그는 8년 만에 가석방되고, 자신을 모르는 외딴 시골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며 살아간다. 인간 관계를 거부한 채 뱀장어(우나기)에게만 마음을 털어놓던 그의 앞에 어느 날, 자기 아내를 닮은 여인 게이코(시미즈 미사)가 등장하는데. 과연 사람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그는 새로운 사랑에 마음을 열 수 있을까.




사람에게 마음을 완전히 닫아버린 야마시타는 장어를 친구로 삼아 살아가죠. 왜 하필 장어냐는 질문에 야마시타는 ‘장어가 말을 잘 들어준다’고 대답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장어의 장점을 이야기한 것이지만 사실 사람을 왜 싫어하는지 들려준 것이기도 합니다. 잘 들어주지도 않고, 듣기 싫은 말은 많이 하는 존재가 인간이란 것이죠. 


아마도 범죄를 저지른 이후 야마시타는 많은 비난과 조언에 시달려왔을 것입니다. 물론 ‘죄 지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견뎌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상대의 마음을 열어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건 현명한 접근법은 아니겠죠. 그의 말을 끝까지 듣고 쉽게 판단하지 않는 기다림이 필요한 것입니다. 


실제 야마시타가 끝내 자신의 진실을 털어놓는 소수의 사람은 전부 그의 얘기를 끝까지 경청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이 사람이라면 정죄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생긴 다음에야 속얘기를 꺼내놓은 것입니다.




야마시타는 강가에서 극단적 선택을 하려던 게이코를 발견하고, 생명을 건질 수 있게 돕는데요. 이후 게이코는 야마시타의 이발소에서 일하며 그를 향한 사랑을 키워가죠. 왜 자기 같은 사람을 좋아하느냐는 그의 질문에 게이코는 조심스럽게 고백합니다. 게이코는 야마시타에게 어두운 과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도 계속해서 사모해왔습니다.


그건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그의 순수한 ‘걱정’ 때문이었죠. 과거 게이코의 정부(情夫)는 그녀를 돈줄이나 욕망 해소의 수단으로만 봤을 뿐 진심으로 염려해준 적은 없었습니다. 게이코가 인간에게 기대하지 않게 된 계기죠. 


그러나 야마시타는 달랐습니다. 가석방 기간인 자신의 상황에서 게이코를 돕는 게 위험할 수 있는데도 그녀를 위한 행동을 합니다. 세상에 희망을 놓아버린 사람을 다시 살아가게 하는 건 조언이나 훈계가 아닌 사심 없는 배려임이 그녀의 말에 드러납니다.




야마시타와 밤낚시를 함께 다니던 마을의 한 남성은 그에게 장어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야마시타에게 어떤 과거가 있었는지 직접 들은 이후죠.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아마 자기 연민에 빠지기보다는 꿋꿋이 살아가라는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슬픔을 자연스레 이해할 날이 올 테니 말입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어쩌면 야마시타가 키우던 장어는 그가 아내의 배신을 목격한 뒤 갖게 된 트라우마를 형상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장어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하지만, 밤중에 끔찍한 악몽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죠. 그렇게 그는 트라우마를 굳이 자기 옆에 두고 말 걸어가면서 자기에게 생겼던 인생의 불운을 이해해보려 노력합니다.


우리는 제각기 크고 작은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어떤 생채기는 쉽게 아물지 않기도 하죠.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저 트라우마와 함께 살아가보는 것은 어떨까요. 꿋꿋이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언젠가 상처에도 무덤덤해지고, 자기와 비슷한 아픔을 지닌 사람을 토닥이게 될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게 20년도 더 된 이 작품이 우리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입니다.


<우나기>를 볼 수 있는 OTT(2월 28일 기준): 왓챠(정액제), U+모바일tv(단건 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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