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향기, 누군가에겐 삶의 이유가 된다
글 : 이한나 / 요리전문가, 작가 2025-03-14
후각은 행동반응과 감정 반응을 담당하는 뇌기능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한다. 분자생물학자이자 요리 작가, 닉 샤르마는 그의 요리 과학서 <풍미의 법칙>에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능력은 우리가 지닌 가장 강렬한 감각이다.” 그리고 기억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이 ‘향’이라 주장한다.
그래서 알츠하이머의 전조 현상으로 냄새를 잘 맡지 못하는 증세는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능력은 감각의 한 부분이지만 이렇게 육체와 정신을 종합적으로 아우르는 것이기에 가장 강렬하면서도 상징성을 갖고 있다.
향기(香氣), 좋은 냄새를 뜻하는 이 말은 후각이 감지한 즉물적인 의미이자 좋은 향이 소환하는 그 향과 연관된 상황, 맛, 경험 등의 관념적인 의미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이나 사물 등의 대상에게서 ‘향기’가 난다고 느끼는 것은 경험치를 통해 쌓인 좋은 향의 데이터들을 불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영화는 삶의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믿어 한 때 익숙하고 애틋했던 향기로운 일들을 속성으로 경험한 뒤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는 노년의 남자와 일면식도 없었던 한 십대 청소년이 큰 세대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향기를 발견하고 의지하게 된다는 이야기.
마틴 브레스트 연출, 알 파치노와 크리스 오도넬 주연의 1992년작, 여인의 향기다.
며칠간 가족들과의 여행으로 집을 비우려는 조카는 별채에 살고 있는 삼촌 프랭크를 돌볼 근처 명문고 학생 찰리를 알바생으로 고용한다. 퇴역 장교이자 군복무 시절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은 프랭크는 입이 걸고, 위압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일바생들이 좀처럼 붙어 있지 못한다. 크리스마스 휴일 멀리 사는 가족들과 보낼 비용을 벌기 위해 추수감사절 휴교기간 동안 프랭크를 돌보기로 한 찰리.
하지만 그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오자마자 영문도 모른 채 뉴욕행 비행기를 타게 된 것이다. 둘은 최고급 호텔에 묵으며 최고급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멋진 리무진 타고 심지어 프랭크는 리무진 기사의 섭외로 찰리를 차에서 대기시킨 채 여인과도 뜨거운 시간을 보낸다.
알고 보니 이번 일정을 끝으로 프랭크는 호텔방에서 생을 마감할 계획이었다. 한편 상류층 동급생들이 저지른 장난에 퇴학은 물론 명문대 추천마저 취소될 위기에 처한 찰리. 프랭크가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게 잘 설득한 뒤 집으로 돌아온 찰리는 그로서는 억울할 게 뻔한 처분이 내려질 학교로 향한다. 그런데 전교생들이 모인 강당에서 심판을 받기 직전 찰리를 포함한 강당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프랭크의 갑작스런 방문으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삶의 이유를 되찾아준 향기
알코올에 의지한 은둔자로 이 일련의 인생의 향기들을 회고할 뿐 누리기 어렵게 된 노년의 프랭크에게는 찰리의 향기가 아직은 흐릿하지만 느껴진다. 그리고 그 향기가 그에게 삶의 이유를 되찾아준다. 찰리는 프랭크의 향기가 강렬해 당황해 하지만 압도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매력을 점차 깨달으며 자기만의 향기를 쌓아갈 수 있는 롤 모델로 받아들인다. 그 터닝 포인트가 된 건 둘이 고급 레스토랑을 방문했을 때 일어난다.
테이블 안내를 받은 프랭크가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인에게서 나는 향을 느끼고 그녀와 합석을 하자고 요청한다. 프랭크-여자 손님의 멋진 탱고 춤 시연으로 이어지는 자리는 여인의 남자친구 등장으로 중단되지만 프랭크와 찰리 사이는 드디어 어떤 보이지 않은 공감대가 생긴다. 어쩌면 영화 제목 ‘여인의 향기’인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90년대 초반 정서를 반영하고 있어 조금은 올드한 측면도 없잖아 있지만 두 배우의 열연, 서사의 힘, ‘Pour Una Cabeza’에 맞춰 펼쳐지는 멋진 탱고 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통쾌함만으로도 충분한 <여인의 향기>를 추천하는 이유다.
각종 과일과 향신료의 향으로 기분 좋게 따뜻해지는 독일식 와인 음료, 글루바인. 프랑스식 뱅쇼나 영국 혹은 미국식 멀드 와인, 스파이스드 와인과 같은 계열인 글루바인은 추운 날, 집에 돌아와 한잔 하며 몸을 따뜻하게 녹여주는 음료다.
냄비 하나 가득 만들어 가족, 지인들 신구 세대가 모여 향과 맛을 음미하며 즐겨보는 <여인의 향기>. 따뜻하고, 향기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이한나 요리전문가, 작가
신문방송학을 전공했지만 다큐멘터리 연출자가 되기 위해 미국 뉴욕대에서 영화학을 공부하며 다큐 제작, 배급사에서 인턴쉽을 수행. 그 경험은 오히려 영화와 대중간의 소통 창구 역할이 적성에 더 맞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귀국 후 영화제, 기자, 영화진흥위원회 공무원, 한국영화 자막 및 시나리오 번역 작업 등의 업무들을 거치지만 또 한번의 방향 전환을 하게 된다. 우연한 제안으로 영화 〈생활의 발견〉,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밀양〉 등의 프로듀서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아마 마지막일 세 번째 방향 전환은 요리. 오래 품었던 요리에 대한 열정은 목포에서 서양 가정식 쿠킹 스튜디오로 출발, 2023년 서울의 ‘푸드 살롱’으로 재정비 한 ‘스프레드 17’. 살롱지기로 서양 가정식 원 테이블 밥집 운영하며 요리 과학서 <풍미의 법칙> 역서도 내고, 영화와 요리 관련 요리책 집필과, 쿠킹 클래스, 다양한 영화-요리 관련 팝업 등을 준비하며 재미있는 컨텐츠를 제공하려고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