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세대에게 퇴직 대비 짐정리를 권하는 이유
글 : 강성민 / 재정회계법인 회계사, 前 KBS 라디오PD 2025-03-07
TV 드라마에서 해고를 당한 직원의 상황을 그릴 때 종이로 된 정리함 하나를 들고 회사 현관을 나서는 장면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 장면을 보면서 회사에 있는 내 짐은 과연 박스 몇 개에 들어갈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 한 회사에서 만 30년을 다니다 보니 짐이 엄청 늘어났었기 때문이다.
결국 1년 전 갑자기 명예퇴직을 했는데 짐을 한 번에 챙겨올 수 없었다. 퇴사를 한 후 몇 번에 나누어 이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왜 이렇게 많은 짐이 생겼던 것일까. 그것은 나의 일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을 거친 것과 무관치 않다.
나의 커리어 역사가 담긴 수납장, 무엇이 담겨있나
KBS에는 부서가 많지만, 라디오 제작부서에서 주로 근무했던 나는 KBS본관 5층에서 25년 이상을 근무했다. 그곳에 개인 수납장이 하나 있는데, 주로 책이나 CD, 방송 자료 같은 것들을 모아 두었다. KBS에 다니면서 재무팀, 심의실 등 외부부서에 발령을 받았을 때도 그 수납장은 그대로 두고 필요한 짐만 싸서 이사를 갔다 왔기 때문에 그 수납장이야말로 나의 KBS 30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KBS에 다니며 데일리 프로그램 외에도 특집 프로그램을 많이 제작한 편인데, 공을 들여 제작한 특집이 끝나면 개인 소장용 방송녹음을 해두곤 했다.
디지털 전환이 가져다준 편리함, 그러나 정리는 어려워진
내가 입사를 했던 30년전 방송국에서는 방송용 원본을 릴 테이프(Reel Tape)에 녹음했는데, 일반 가정집에는 릴 테이프 플레이어가 없었기 때문에 그때는 특집 프로그램을 카세트 테이프(Casette Tape)에 옮겨 담아 두었다. 지금의 MZ세대들에게는 1980~1990년대를 풍미한 잇템인 워크맨(Walkman)이 낯설겠지만, 카세트 테이프와 워크맨은 라디오키즈인 나를 라디오PD로 만들어준 고마운 발명품이었다.
몇 년이 지나자 DAT(Digital Audio Tape)라는 것이 나왔다. 아날로그 방식인 릴 테이프와 카세트 테이프를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한 혁신적인 기기였는데, 디지털 오디오파일 시스템(Digital audio file system)으로 가는 과도기적 방식이어서 몇 년간만 사용했다. 하지만, 이 때 제작한 특집들은 DAT 테이프와 옮겨 놓았다. 방송이 오디오파일로 전환된 초기에는 특집을 CD로 옮겨두었었는데, 그 이후에는 그냥 파일로 보관하게 되었다.
방송을 파일로 보관하게 되니 이전에 비해 복사 시간도 절약되고 보관 공간도 필요 없고 여러가지 좋은 점이 있지만, 그 실체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다. 이것은 아날로그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 바로 바로 인화해 정리하게 되지만, 디지털 카메라가 나온 후부터는 찍어만 놓고 정리를 하지 않아 오히려 과거를 컴팩트하게 추억 하기 어렵게 된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부지런한 사람이라면 디지털 사진들도 바로 셀렉해서 정리해 놓겠지만, 나처럼 게으른 사람에게는 파일정리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애정하는 것을 쉽게 못 버리는 아날로그 세대의 비애
나의 게으름은 음악을 듣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집에 오디오도 있고 CD도 있지만, CD를 찾아서 기기에 넣고 한 시간마다 바꾸어주어야 하는 것이 귀찮아서 음질을 포기하고 요즘은 음악을 주로 유튜브로 듣는다. 그러다 보니 30년, 아니 그 이전부터 틈틈이 수집해온 수천장에 이르는 CD를 어떻게 할 지가 큰 고민이 되었다. 대학생 때부터 용돈이나 월급을 아껴 산 CD는 클래식 전문PD인 내가 직접 녹음하거나 컴필레이션 한 음반만큼이나 애정이 간다.
음반사에서 받은 수많은 프로모션CD에도 좋은 레퍼토리가 많아 선뜻 버리기가 어렵다. 더군다나 CD의 내지에는 책이나 인터넷에는 없는 정보들이 있는 것도 많다. 10여년 전 턴테이블을 버리면서 LP를 처분했는데 뒤늦게 후회가 남는걸 보면 CD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MZ세대처럼 처음부터 디지털 세대였더라면 이런 고민이 필요 없었을텐데, 아직도 CD 자켓을 펼쳐보며 추억에 잠기는 아날로그 세대의 비애다.
퇴사를 하고 일 년이 지났지만 필자는 아직도 고민하고 있다. KBS에서 30년 간의 기록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를.
근간 퇴직이 예정되어 있는 아날로그 세대라면 시간을 두고 미리미리 짐을 정리해 놓아야 필자와 같은 고민을 덜 수 있을 것 같다.

강성민 재정회계법인 회계사, 前 KBS 라디오PD
2024년 초 30년 재직했던 KBS에서 명예퇴직을 했다. 대학에서는 화학을 전공했지만 어린 시절의 꿈을 찾아 대학원에서는 클래식을 공부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따 놓은 한 동안 장롱 면허 같았던 공인회계사 자격증으로 인생 2막을 시작했다. 은퇴와 연금에 관심이 많아 KBS 라디오 PD시절, 은퇴 팟캐스트를 제작했고, <연금 부자 습관>이란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 퇴직을 앞둔 직장인들의 노후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전파하는 것을 자신의 인생 2막 과제로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