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날의 추억과 와인 |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특별한 날의 추억과 와인

글 : 박찬일 / 로칸타 몽로 셰프 겸 음식 칼럼니스트 2025-01-17

연말연시, 기억에 남아 있는 크리스마스 파티가 누구나 몇 개쯤 있을 듯하다. 어려서 본 미국 드라마에서는 그들이 도시인이든 서부 개척민이든 크리스마스 파티가 아주 중요한 순간으로 묘사되곤 했다. 이주 역사로 시작한 미국이야말로 신의 가호가 더 각별했을 터이고. 크리스마스를 그 감사의 날로 특별히 기념했으리라.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고, 우리나라가 기독교 국가인 것도 아니지만 크리스마스의 대단한 열기를 경험하며 자랐다. 



청년이 되어서는 폭발하는 에너지를 소모하는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하기야 연말연시와 크리스마스를 홍보하는 건 거의 상업적인 유통가의 몫이기는 했지만, 흥청망청하는 분위기를 우리가 왜 그리도 즐겼는지 모르겠다. 


연말연시와 와인에 대한 추억   


한국의 여러 식당에서 일하면서 크리스마스는 상당히 괴로운(?) 시기이기도 했다. 예약이 엄청나서 23일이나 24일에는 점심 2타임, 저녁 3타임을 받았다. 하루 ‘5회전’이라는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어떤 주인은 매출을 올리려고 음식에 별도로 와인을 억지로 끼워 팔기도 했다. 이런 좋지 않은 경험 때문에 한국에서 와인은 내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남는 일도 많았다. 그때 많이 선택되는 술이 샴페인이었다. 비싸고 ‘버블’이 있는 그 술은 이름 그대로 거품이 되어버리는 운명을 맞았다고나 할까. 


유럽도 기독교의 대륙답게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는 부활절의 두 배쯤 열기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대개는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오고가는 열기였다. 온 가족이 다 모이고, 비장의 요리를 먹는 날이었다. 다른 도시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일하던 시골 식당은 12월 24일, 25일 이틀간은 영업하지 않았다. 문을 연다 해도 다들 가족과 만찬하는데, 올 손님도 없었던 것이다. 그 덕에 요리사들도 가족과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그렇게 타국에서의 연말연시는 식당 장사가 별로였다. 


나는 가족이 없었으므로 혼자 골방 신세를 질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명절은 외로운 이방인을 초대해서 사람의 정을 나누는 날이기도 했다. 나는 한 가정의 연말 정찬모임에 낄 수 있었다. 내가 거기 참석하면서 제일 먼저 고민한 건 방문 선물을 뭘로 하는가였다. 동료에게 물어보니, 과자나 와인 한 병 정도가 적당하다고 했다. 나는 저렴한 스파클링을 샀다. 


스토리가 있는 와인


가장 흥분되고 궁금한 건 저녁 메뉴와 곁들여 나올 와인이 무언가 하는 점이 었다. 이탈리아인들은 중요한 만찬에도 당연히 파스타를 먹는다. 특히 평소와 다르면서 가족의 전통과 관련된 종류가 될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왕고조 할머니 대부터 먹던 토끼고기가 들어간 토르텔리(만두) 같은 것이다. 특별한 날에는 건면 스파게티는 가난한 이들도 절대로 먹지 않는다. 프레시 파스타, 즉 손으로 밀어 만든 만두류를 먹는 게 그 자리에 어울리는 음식이다. 그날은 피스타치오와 큰 닭고기, 햄으로 속을 채운 토르텔리를 대접받았다. 


자, 그때 나의 기대는 와인이 뭐가 나오느냐 하는 점이었다. 아주 비싸거나 가족 역사에 특별한 방점이 있는 와인이거나 하는 스토리가 있게 마련이라고 들었다. 이탈리아인은 비싼 와인을 생각보다 자주 접하지 못한다. 그래도 크리스마스 같은 날은 유명한 와인을 좀 딸 수 있다. 그날 초대된 나도, 비싼 와인보다는 스토리가 있는 와인이 나오기를 기대했고, 실제로 그랬다. 


외로운 나를 위로한다는 말과 함께 40년이 된 레드와인 바롤로가 등장했다. 지하 저장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수십 년을 견딘 와인이라니. 벌써 30년이 다 되어가는 일인데, 그 시절만 해도 이탈리아의 고급 와인이라면 오직 바롤로밖에 없었다. 슈퍼 토스카나도 당시 이탈리아인들은 잘 몰랐고, 요즘처럼 이탈리아 전역에서 괴물같은 고급 와인이 쏟아지던 때도 아니었다. 지역성이 강한 이탈리아답게 저마다 자기 동네의 대표 와인을 중요한 날에 마셨지만 바롤로는 전국적인 명성이 있었다. 그때 와인 맛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방인에게 연신 음식을 권하던, 식당 사장의 노모인 팔순 할머니의 인자한 모습만 떠오른다. 


올해 연말연시도 마음에 드는, 인상적인 레드와인을 한 병 드셨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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