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했다고 집에만 있으면 안 돼요!
글 : 한혜경 / 작가, 前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2025-01-10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점심시간에 분위기 있고 괜찮은 식당에 가면 남자는 거의 없고 여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뭔가 달라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자세히 살펴보니 언제부턴가 중년 여성들의 식사 모임만큼이나 남성 시니어들의 모임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었다.
지난달에도 점심 약속이 몇 번 있었는데, 내가 가는 식당마다 머리 희끗한 남성 시니어들이 적게는 몇 명, 많게는 십여 명씩 모여 화기애애하게 식사하는 모습이 눈에 띠었다. 직장인들의 회식과는 달리, 느긋하게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 여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식사를 마친 후에 근처 카페에 가보면 이번에도 또 중장년 남성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전에 심층 면접했던 은퇴자들이 “점심 때 좋은 식당 가보면 온통 여자들뿐이지 않나. 남자들은 고생하는데 여자들만 잘 먹고 잘 노는 것 같아서 얄밉기도 하고 거부감도 든다.”거나 “그래서 여자들은 나중에 남편 죽고 혼자 돼도 오래 사는 모양이다.”라며 반감과 부러움이 뒤섞인 이중적인 감정을 토로하던 기억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이 들 정도다.
나는 이런 변화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것 먹는 게 행복의 기본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으로도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건강한 시니어들이 활기차게 거리를 활보하고, 가끔 외식도 하고 모임도 가지면서 소비를 해주어야 사회 전체에도 활력이 돌고 건강보험료 지출도 아낄 수 있고, 초고령사회에 대한 국민들의 두려움도 줄어들 테니까 말이다.
'공포의 거실남',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문제는, 이런 변화가 아직은 일부에게만 해당된다는 점이다. 최근에 어떤 모임에서 “요즘 은퇴남들은 외출도 많이 하고, 점심 약속도 많은 것 같다.”는 말을 꺼내자마자 여기저기서 원성이 쏟아졌다. 집안에서 꼼짝하지 않는 남편과 아버지 때문에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내용은 이러했다.
“남편이 점점 더 외출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거실 소파에서 앉아 있는데,
‘공포의 거실남’이 따로 없다.”
“친구들에게 전화해서 점심 같이하라고 하면,
(남편은) ‘내가 먼저 전화하기 싫다.
지난번에 내가 밥 샀으면 이번엔 자기가 연락하는 게 도리 아닌가?
왜 나만 밥을 사야 하나?’ 라면서 화를 낸다.”
“남편의 외출이 뜸해지면서부터 근육이 빠지고 몸무게도 줄고,
활력이 없어지고 무기력해졌다.
문제는 온 집안의 공기 자체가 우울해지고 회색빛이 된다는 거다.”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는 B씨는 “아버지가 일에서 완전히 손을 놓은 후부터 식구들과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하루 종일 ‘바둑TV’만 보고 있다. 어쩌다 친구나 지인의 전화가 와도 ‘만나자’는 말을 절대 하지 않고 빨리 끊는다. 그러다 보니 이젠 전화도 오지 않는다.”면서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이들의 결론은 하나였다. ‘다 필요없고, 외출만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는 것.
그렇다. 나이 들수록 외출은 중요하다. 나이 든 후의 외출은 이동능력과 운동능력, 인지능력을 키워주며, 바깥세상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 인간관계를 유지시켜 주는 중요한 활동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질병이 없고 건강한 사람이라도 외출하지 않으면 신체기능이 점점 약화되면서 건강이 나빠지고, 스트레스가 높아지고 우울증이 오기 쉬우며, 고독감이나 소외감도 커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디로, 무엇을 위해 외출할 것인가? 최근에 만난 은퇴자 K씨는 외출의 어려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 저도 집사람 눈치가 보여서라도 자주 외출하고 싶죠.
그런데 평생 회사만 다니며 퍽퍽하게 살아와서 그런지
뭐 이렇다 할 아이디어가 떠오르질 않네요.
노인복지관 같은 데 가기에는 너무 젊고,
그렇다고 노상 친구들에게 전화하는 것도 부담스럽고..
특별한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요.”
멋있는 시니어는 도서관에 출근한다
이런 분들에게 나는 도서관으로 출근하는 루틴을 만들어 보시라고 말하고 싶다. 지난달에 책 빌리러 동네 도서관에 가보고 깜짝 놀랐다. 우선 도서관 공간이 밝고 환해서 놀랐고, 이용자의 연령층이 다양해서 놀랐다. 전에는 시험공부나 자격증 공부하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이렇게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함께 하는 활기찬 공간으로 변했구나,라는 생각에 마음까지 훈훈해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건 이용자의 약 70% 정도가 중장년 남성이라는 점이었다(도서관 잘 가는 지인들에 의하면, 다른 도서관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머리 하얀 남자분이 1인용 의자에 앉아 한강의 소설을 읽는 모습도 인상적이고, 젊은 시니어 남성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도 멋져 보였다. 심지어 구내식당에 혼자 앉아 점심을 드시는 남자 어르신들의 뒷모습까지도 쓸쓸해 보이기는커녕 ‘도서관이라면 ’혼밥‘도 좋지’ 싶었다(그날 점심 메뉴는 두 가지였는데, 각각 6천원과 7천원, 가성비도 최고였다).
매일, 혹은 일주일에 2, 3일쯤 도서관에 나와 책도 읽고 신문도 보고, 자료실도 이용하고, 가끔 강의도 듣고 친구도 만나면서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마음껏 이용하고 즐기는 은퇴자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신체활동과 인지활동을 할 수 있고 다양한 사람들도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바람직한가. 전에 영국 런던 근교에 머물 때, 도서관에 나와 신문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도서관에서 열리는 작은 강연을 듣거나 이민자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시니어들의 모습을 부러워하며 관찰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물론 책은 집에서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요즘 도서관은 평생학습과 복합 커뮤니티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책을 중심으로 모이는,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힘은 당신의 하루를 훨씬 더 풍성하게 해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왕이면 새로운 곳으로 외출해서 새로운 것을 경험해 보자. 새해엔 도서관으로 출근하는 루틴을 만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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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경 작가, 前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책임 연구원과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나는 매일 은퇴를 꿈꾼다> <남자가 은퇴할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의 저서를 통해 베이비붐 세대 은퇴자가 겪는 다양한 이야기를 써온 작가이기도 하다 최근의 저서로는 본 사이트에 연재하고 있는 ‘나의 은퇴일기’ 내용을 토대로 한 <은퇴의 맛>, 저자가 진행하고 있는 ‘자기 역사 쓰기 프로그램’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기꺼이 오십, 나를 다시 배워야 할 시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