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청춘을 그리워하지 않는 4가지 이유
글 : 버들치 / 작가 2024-09-19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세 가지 ‘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유머인지 교훈인지 잘 모르겠지만 둘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이야기를 듣고 아내에게도 카톡으로 문자를 날렸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금이 세 가지 있대. 바로 황금, 소금, 지금"
그러자 아내에게 바로 메시지가 왔다.
"나도 세 가지 금이 필요해요. 현금, 지금, 입금"
"·········"
한동안 침묵 후 남편이 카톡을 보냈다.
"그래, 알았어···. 현금, 쪼금, 입금"
의도하지 않았지만 혹 떼려다 혹을 붙인 꼴이 되고 말았다. 아내에게 갑질한(가르치려한) 남편의 최후?
세 가지 금에 대한 나의 정돈된 생각은 무엇일까?. '황금'은 세속적인 재물일 것이고, '소금'은 일용할 양식(음식)보다는 사회에서의 역할로 이해하고 싶다. '지금'은 일에 대한 충실성이 아닐까?
나이가 들수록 황금과 소금을 얻었으나 지금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들을 많이 목격한다. 청춘을 그리워하는 이들이다. 지나간 과거와 알 수 없는 미래 보다 현재에 집중하고 충실해야 한다.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면 자책과 후회로 인생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것과 같고, 미래의 불확실성에 빠져 걱정과 근심 속에 사는 사람은 미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지금이라는 것은 시간적,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일(행위)에 대한 충실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떤 일(행위)을 하더라도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면 지금 나는 없는 것이다.
만약 과거로 돌아가 자신이 선택한 시기부터 다시 인생을 산다고 하면 나는 20살 청춘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선택할 것 같다. 청춘이 마냥 좋은 것 같지만, 아니다. 청춘을 생각할 때 무한한 가능성에 주목하지만, 미숙하고 무모하고 유치하고 거칠고 시행착오투성이라는 사실은 무시한다. 그 당시 나는 젊음이 주는 자유분방함과 도처에 열려 있는 기회와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돈 없고, 학력 없고, 친구 없는 젊은이에겐 무기력과 불안만이 가득했다. 젊음은 나에겐 불안전과 혼돈이었다.
20살 청년 시절보다 지금이 더 좋은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그때보다 세상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선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지식과 경험은 나이에 비례한다. 꾸준히 배워 지식을 쌓고, 많은 경험과 시행착오를 겪으며 지혜와 깨달음을 건져 올린다. 나이가 들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실패의 횟수도 줄어든다. 불안과 혼돈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서 배움을 중단하면 지식은 늘지 않고 깨달음 또한 메말라 버린다. 그래서 평생 어둠 속에서 배회하고, 미망에 갇혀 헛된 것을 좇고, 미신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부지런히 배워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선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개인의 선입관이나 신념에 맞춰 세상을 해석하거나, 남에게 정의로움을 들이대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진다. 자신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하다.
둘째, 그때보다 사람을 더 잘 분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부터 결혼하기까지 사기를 많이 당했다. 다 믿었던 사람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라고 울분을 토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런 인간들이 대부분이었다. 모든 문제는 사람이 만든다. 사람은 조그마한 이익 앞에 180도 태도를 바뀐다. 돈과 권력 앞에 초연한 사람은 이순신 장군 빼고는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인간의 한계를 알고 인간에 대한 모든 기대를 버려야 인생이 순탄하다. 믿지 못할 것 중 제일 먼저 줄을 그어 삭제해야 할 것은 사람이 하는 말이다. 믿을 건 자신뿐이라는 결연한 의지가 아니고서는 제대로 이 세상을 살 수 없다. 내가 사람을 가릴 때의 기준은 (자신에게 좋은 것이 남에게도 좋은 것인 양) 두 번 세 번 권하면서 질척거리는 사람, 돈, 보증과 같은 부탁을 가볍게 하는 사람, 자기 일엔 무책임하면서 정작 남의 일에 (만약 무엇무엇이 잘못되면) 책임을 지겠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사람 등이다. 이런 사람과는 조용히 관계를 끊는다. 그를 위해서 또 나를 위해서.
셋째, 그때보다 마음이 더 평온하기 때문이다.
젊음의 미덕이 패기와 무모함(?)이라고 했던가? 젊었을 때는 차가워야 할 머리는 열받아 뜨겁고, 따뜻해야 할 가슴 또한 용광로 같아서 모든 것을 녹여버릴 것만 같다. 그래서 일 년 내내 홍역을 앓는다. 객기와 열정 사이의 그 충동이 아름답고 고귀하고 낭만적인 것 같지만 사실 남성 호르몬 테스토스테론 덕분(?) 아닌가? 그 충동성이 모험을 낳고, 그 무모함을 용기라 하고, 그 나댐과 객기가 의리라고 찬양된다. 젊었을 때는 격정에 휩싸여 전투하듯 전리품을 채워 넣는데 정신이 없었다. 채워 넣는 삶이 더 행복할 것 같지만 내 젊은 날을 생각해 보면 채워 넣어도 채워지지 않았고, 채웠다 싶으면 밑 빠진 독처럼 새는 게 많았다. 젊었을 때는 세상적인 성공이 중요했고 그 증거인 돈에 집착했다. 그래서 행복할 겨를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반면 살날보다 살아온 날이 많은 요즘은 정리하고 내려놓고 반납하면서 하루하루를 비워낸다. 비워내는 삶은 비워내는 만큼 무언가가 채워지는 느낌이다. 바로 평온이고 만족이다.
넷째, 그때보다 생활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윤택해졌기 때문이다.
생활이 궁핍하면 자존감이 추락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면목이 없고 모든 게 미안하다. 갓 결혼해서 평탄하게 잘 살던 집을 (남의 돈을 대신 갚아주느라) 팔고 네 식구가 전세를 전전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쳐진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그런 고생은 사양하고 싶다. 나락으로 떨어졌던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식은땀이 흐른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게 꼼짝없이 묶여 고문을 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또 파우스트가 메피토스펠레스에게 영혼을 파는 것만큼이나 위태로운 일이다. 살림이 윤택하다는 개념은 단순히 돈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평화가 따라오지 않는 돈은 아무 의미가 없다. 살림은 소박해도 걱정 근심이 없다면 재벌도 부럽지 않다. 심각한 일도 웃어넘기고 가벼운 일도 무겁게 임하는 사람이라면 무엇이 부러울 것인가? 최소한 내 아버지 세대보다 윤택하면 잘 사는 것 아닌가? 무얼 더 바라는가?
지금 나는 22살 청년 시절이 부럽지 않다. 비록 몸은 쇠하고 기대수명이 짧아진 것은 아쉬운 부분이지만 그것을 충분히 감당할 만하다. 지금의 나는 젊었을 때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더 현명해졌고, 더 평온하고, 물질적으로도 더 풍요롭다. 임제 선사가 외친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곳마다 참되다)의 진리도 바로 지금에 집중하라는 얘기 아닌가? 청년이든 중년이든 장년이든 노년이든 지금이 절정이고 가장 좋아야 한다. "그때(과거)가 좋았지"라고 하는 인간(?) 치고 제대로 된 사람 못 봤다. 지금, 현재에 집중하자!
버들치 작가
증권회사에서 33년 근무 후 퇴직하여 현재 기능인으로 인생 2 막을 살고 있다. 1965년에 태어나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이 세 가지 운으로 위태롭게 살아왔다. 첫 번째 운은 짧은 학력으로 증권회사에 입사한 것이고, 두 번째 운은 33년간 한 회사를 다닌 것이고, 세 번째 운은 퇴직 후에도 소일거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퇴직을 앞두고 주경야독으로 기술을 배웠으며 그 경험에 대해 네이버 '부동산 스터디' 카페에서 버들치라는 닉네임으로 글을 썼다. 그 결과물로 '버들치의 인생2막'(2023)이라는 책을 발간 했다. 단순하고 평온한 삶을 추구해 왔으며 앞으로 그럴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