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캔팅의 재미
글 : 박찬일 / 로칸타 몽로 셰프 겸 음식 칼럼니스트 2024-06-20
필자는 25년 전 이탈리아의 소믈리에 학교를 다녔는데 주임 교수는 디캔팅(병에 든 와인을 디캔터로 옮겨 담으며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을 가르치면서 흥미로운 시범을 보였다. 와인 병을 아주 높이 들어 디캔터에서 따르는 작업이었다. 이는 학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치 실핏줄에 흐르는 혈액처럼, 붉고 선명한 와인이 디캔터에 떨어지는 장면은 인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디캔팅에 대한 다양한 견해
작업이 끝나자 그는 이 행위를 왜 하는지 학생들에게 물었다. 이미 현역으로 일하고 있는 소믈리에가 대다수였던 학생들은 예상되는 답을 내놓았다.
“와인이 가늘게 떨어질수록 공기에 접촉되는 시간이 길어지므로 와인의 맛이 더 부드러워질 것입니다.” 그러자 교수는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그리고 그는 레스토랑에서 생선을 서빙할 때 그 생선이 더 맛있어지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더 답을 하지 못했다. 레스토랑에서 생선을 발라주거나, 샐러드를 버무려 주거나, 혹은 스테이크를 잘라주는 서비스는 맛을 더 좋게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퍼포먼스이자 식사의 흥미를 돋우는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생선을 잘라서 요리해서 각자의 접시에 담아내는 것도 좋지만, 통으로 익힌 생선을 손님이 보는 곳에서 익숙하고 세련된 솜씨로 포를 떠서 여러 장의 접시에 나눠담는 것은 웨이터의 숙련된 기술이자 식사의 재미를 더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그 생선이 ‘더 맛있어진다’고는 말할 수 없다.
교수는 “와인을 이렇게 디캔팅하는 것은 물론 훌륭하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왜 그런지는 정답을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공기 접촉 늘리기’가 목적이라면 다음과 같은 작업을 하면 되지 않겠느냐면서 웃기는 시범을 보였다.
와인을 넓은 바트(오븐에 넣어 요리할 때 쓰는 도자기 또는 금속제의 널따란 사각형 용기)에 콸콸 따라버리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깔때기를 이용해서 다시 병에 담았다. 우리는 경악했다. 넓은 바트에 따른 와인은 당연히 공기와 접촉시간이 엄청나게 길어진다. 확실히 디캔팅(여기서는 공기 접촉을 늘리려는 목적이므로 에어링)이 잘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도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교수는 말했다. “와인 디캔팅은 과학과 신비의 영역에 모두 걸쳐 있는 것이다. 즐거움과 실용을 주는 것이다.”
자, 이 일화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여러분은 레스토랑이나 가게에서 디캔터를 많이 보았을 것이다. 대체로 비싼 것일수록 큰 뱀처럼 꼬여 있거나 용적이 커서 와인이 그 용기 안에 담기는 동안 공기 접촉을 늘릴 시간을 보장한다. 실제로 어떤 디캔터 회사는 이를 더블 에어링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와인이 들어갈 때 순간적으로 진공 상태를 만들어 와인이 그 진공을 통과하는데, ‘팍’ 하고 산소와 접촉되며 에어링이 좋아진다는 뜻이다. 디캔터 회사는 여러 실험을 거듭하며 이런 제품을 만든다.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다고 믿는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시각적으로 보면서 더 즐거워한다. 와인이 얼마나 잘 에어링되었는지 비교하면서 마시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디캔팅 관련 알아두어야 할 것들
디캔팅은 원래 지하에서 오래 저장된 와인에서 주석산염 등이 결정화되거나 침전물이 생기는 것을 거르기 위해 유효한 방식이었다. 실제로 한국이든 외국이든 10년 이상 된 레드 와인을 주문하면 소믈리에는 대체로 디캔팅을 실시한다. 이 침전물을 씹어본 적이 있는데,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이걸 와인의 다이아몬드라고 하는데,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이런 침전물과 결정체가 생길 만큼 오래된 레드 와인이라면 마실 만한 가치가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된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디캔팅은 이제 더 자주 한다. 디캔터를 더 많이 사고, 더 많은 종류를 갖춘다. 매그넘(1.5리터, 2병짜리) 사이즈, 더블 매그넘과 임페리얼(6리터 사이즈)용 디캔터가 출시되기도 한다. 오래된 와인뿐 아니라 소위 ‘영’한 와인을 마시는 경우에도 디캔팅을 많이 하기 때문에 디캔터의 용량도 늘었다. 효과를 높인다고 바트에 따라서 디캔팅을 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디캔터를 몇 개 장만하는 것은 권장할 일이다. 보통 차이나라고 부르는, 마치 동양의 술병처럼 생긴 클래식한 것부터 구렁이가 또아리를 튼 것처럼 복잡한 모양의 것까지 두세 개면 충분하겠다. 그냥 편한 친구랑 와인을 딸 때 디캔팅을 하고 싶으면 이미 마신 병을 사용해도 좋다. 깔때기를 써서 그저 이 병에서 저 병으로 두어 번 반복하면 에어링에 도움이 된다. 풋내가 나는 아주 어린 레드 와인을 마실 때 효과가 매우 좋다.
디캔터는 세척이 늘 어렵다. 전용 솔이 나와 있으나 그것조차 닿지 않는 구석을 가진 모양의 제품도 있고, 시간을 써야 한다. 세척을 하면 세제나 물때가 남게 마련이다. 세제는 판매하는 전용세제가 아니라면 쓰지 않는 게 낫다. 보통 식초를 뜨거운 물에 타서 마지막에 디캔터를 헹구는 방식을 쓴다. 더러는 베이킹소다를 뜨거운 물에 풀어서 여러 번 흔들어 씻을 수도 있다. 디캔터를 뒤집어서 말릴 수 있도록 하는 홀더도 판매하므로 같이 구매해도 좋겠다.
박찬일 로칸타 몽로 셰프 겸 음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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