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인 내가 정의하는 진짜 행복이란
글 : 버들치 / 작가 2023-11-28
행복에 대한 책을 많이 본 것 같다. 그리고 유명인이 쓴 행복론도 빠지지 않고 읽었다. 행복론의 고전인 알랭의 행복론을 시작으로 카네기, 달라이 라마, 템플턴, 그리고 러셀의 행복의 정복까지. 행복의 정의 중 가장 심플한 것이 경제학자 새뮤얼슨의 행복 방정식이다. 행복 = 소유(소비) / 욕망.
그러므로 행복하려면 소유(소비)를 늘리던 아니면 욕망을 줄이던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소유를 늘리기도, 욕망을 낮추기도 힘들다. 소위 햄릿의 딜레마에 빠지기 때문이다.
저명인사들이 제시한 수많은 행복론에 처음엔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공감하기 어려워졌다. 당연하다. 살아온 시기, 성장 환경, 태어난 기질, 배움의 정도, 사색의 깊이... 모든 것이 나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걸 한참 후에 깨달았으니 그동안은 헛살은 셈이다. 유명 인사들의 행복론이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유명인이라는 이른바 후광효과와 적당한 권위가 더해져 그럴듯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나에게 맞지 않는 남의 행복을 훔쳐서 입고 다녔던 나의 무지와 나태함을 반성한다. 남이 찾은 행복론 보다 내가 찾은 행복론이 중요하다. 또 행복은 어떤 조건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찾고 발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관심과 몰이해로 방치되고 버려진 행복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
행복을 찾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행복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다. 나에게 행복이란 마음이 편안하고 충만한 상태 그리고 쓸데없는 걱정 근심이 없는 상태다. 소박하고 겸손하다 못해 좀 가난하다는 느낌까지 든다. 어쨌든 그러기 위해서는 끼니를 잇는데 큰 걱정이 없어야 하고, 내가 살 집 한 채는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남의 안색을 살피지 않고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이런 소박한 생각도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금방 잊히고 만다. 밖에 나가 보면 비교와 경쟁 같은 행복을 가로막는 요소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준 하나는 미리 정해두어야 한다. 흔들릴 때마다 그 기준을 다시 상기해 봐야 하니까.
행복은 조금씩 여러 곳에 씨앗을 뿌려두어야 한다. 화끈한 한방 보다 자잘한 기쁨을 맛보는 것이 더 좋다. 행복은 큰 것 하나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자잘한 행복에는 어떤 것이 있나? 나에겐 8가지가 있다.
① 배우고 공부하는 삶이 행복하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소년이노 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 일촌광음 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짧은 시간도 가볍게 여기지 마라
공자의 논어, 주자의 소학에 나오는 말씀이다. 유학의 대표 주자인 두 분이 이구동성으로 배움을 강조한 말씀이니 허투루 한 말은 아닐 것이다.
배움은 성장하는 삶과 깨닫는 삶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초석과 같다. 학생이라는 신분과 학교라는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를 배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궁하면 때와 장소 나이를 불문하고 배우고 탐구해야 한다. 아니, 궁하지 않더라도 알기 위해 배워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배움도 다 때가 있는 것이라며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것처럼)이미 늦었다며 배움을 멀리하고 포기한다. 그런 정신머리라면(?) 배움은 고사하고 항상 제자리걸음이다. 그리고 행복을 찾기 위한 여정도 신기루를 쫓는 헛수고가 될 것이다.
생계를 위해 일을 배우고 직업을 갖기 위해 기능을 습득하는 것도 배우는 것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배움이 많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이해하는 토대가 되는 경제, 사회, 사람, 자연에 대한 배움 말이다. 또 역사와 철학 등의 인문학도 포함되어야 한다. 그래야 밥만 먹고사는 인간이 아닌 전인격의 고등 동물이 될 수 있다.
눈을 감을 때까지 학생이어야 한다. 배우는 학생...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은 불행은 막아주고 행복은 배가시켜준다. 인간을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일은 철학자만이 해야 할 일은 아니다. 평범한 우리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인간 세상을 이해할 수 없고 또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면 왜 살아야 하는지 묻고 싶다. 어느 광고 문구처럼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잠시 살다가 세상을 떠야 하는가?
②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행복하다
"인생은 고해다"라는 명제를 인정해야 한다. 인생을 감탄고토의 자세로 살 것인가? 아니면 고진감래의 자세로 임할 것인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행복을 위한 것 같지만 그 반대다. 달기만 한 인생은 없고 또 입에 쓴 게 약이 되는 법이다. 그리고 고생 끝에 가끔 한 번씩 오는 성취감에 행복과 전율을 느낀다. 우리가 어떨 때 행복한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자명해진다. 미국의 이승복 재활 전문의가 쓴 책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의 내용은 잊혔지만 책 속에 밑줄 친 문구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No pain, No gain"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
사람은 선하게 태어났다는 둥,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둥의 일체의 모든 나태한(?) 긍정을 버려야 한다. 또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잘 될 거야 라는)근시안적인 낙관주의를 배격해야 한다. 고생할 각오를 하면 새로운 인생이 열린다. 그 새로운 인생이 얼마나 행복한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자기 연민에 빠지지는 않는다.
③ 일이 있어 행복하다.
은퇴 후 무위도식하며 유유자적하게 인생을 즐기겠다는 사람이 많다. 무릉도원에서 신선놀음을 하겠단 얘긴데, 이런 분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일 안 하면 뭐 할 건데(요)?"
시간이 많으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지만 생각만큼 여러모로 좋지 않다. 시간이 많으면 생산적인 일보다 비생산적인 일을 많이 도모한다. 간섭이 많아지고 쓸데없는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며 엉뚱한(?) 사건에 휘말린다. 바쁜 친구들을 불러내서 자랑질이나 하고, “내 돈 내가 쓰는 데 뭐가 문제냐”며 돈을 물쓰듯 하며 먹고 노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사는 것이 행복이 아니다. 그 건 민폐고 중독이다.
일이 없어서 죽겠다는 사람(실직사)도 있고 또 일이 너무 많아 죽겠다는 사람(과로사)도 있다. 둘 다 엄살이라고 생각하지만 둘 다 어느 정도는 진실을 담고 있다. 그러고 보면 과하지도 않고 또 쉽지도 않은 적당한 일이 좋다. 내가 인생 이모작 일자리로 생각한 것이 적당히 힘든 일에 적당한 급여를 주는 일자리다. 그러나 사람들은 적당히 쉬운 일에 상당히 높은 급여를 원한다. 그러면서 구직을 위해 노는(?) 시간을 마찰적 실업이라고 생각하고 실업 급여를 타먹는다. 또 미스매칭이라는 전문 용어를 사용하며 자신의 실업을 합리화한다.
일을 월급 받는 일로 국한하지 말아야 한다. 살아 숨 쉬며 움직이는 모든 것이 일이다. 인류공영에 이바지하지 않더라도 남들에게 또는 자신에게 뭔가 부가가치를 만들어야 한다. 그 부가가치는 대부분 돈으로 환산되지만 우리 나이가 되면 기쁨과 만족 그리고 행복감 같은 비화폐적인 것을 더 비중 있게 고려해야 한다.
④ 미워하지 않아야 행복하다.
사랑해야 행복한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그보다는 미워하는 사람이 없어야 행복하다. 특히 부자를 미워하고 잘 되는 누군가를 질시하면 불행을 달고 사는 것이다. 왜? 부자는 많고 나보다 잘 되는 사람은 부지기수니까. 특히 불평등, 불공정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라면 죽을 때까지 불행하다.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평등과 공정은 볼 수 없을 테니까. 남의 돈을 갈라 먹는 것이 평등이고 대통령을 돌아가면서 하는 것이 공평이라고 생각하는 한 행복은 물 건너 갔다고 봐야 한다.
사랑은 눈꼬리가 내려가고 입꼬리가 올라가게 만들지만, 미움은 눈이 뒤집히고 입에 거품을 물게 한다. 사랑의 영향력이 미움의 파괴력 보다 클 것 같지만 천만에다. 사랑으로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미움과 질투는 온 인류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이 그걸 잘 보여주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은 하나같이 미움과 질투에서 시작되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질투하면 한 조각 사랑의 감정도 싹이 틀 수 없다. 정서적 황무지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미움받지 않고 또 미워하지도 않는 삶이 좋겠지만 둘을 같이 이루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직장 생활을 할 때는 미움받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면 요즘은 미워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미워한다고 그놈이 죽거나 잘 못 되는 것도 아닌데 괜히 나만 사서 고생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쁜 감정은 생활 쓰레기와 같아서 정기적으로 소각하거나 청소해 주어야 한다.
⑤ 가난하지 않다는 자각이 행복이다.
부자라서 행복한 것보다 가난하지 않아 행복해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평범한 사람이라도 고종 황제 보다 더 많은 물질적 혜택과 양호한 영양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혜택에 대해 사람들은 깊게 생각해 보지 않는다.'팩트풀니스(factfullness)'와 '지구가 100명의 마을이라면' 이란 책을 읽어보면 좀 시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돌아가신 법정 스님은 무소유를 추구하며 일체의 불필요한 소유를 배격하셨는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적 소유는 그 어느 시대 보다 많다. 아니 차고 넘친다.
돈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돈 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돈을 앞에 세우면 모든 건 후 순위로 밀린다. 돈 때문에 겪은 설음과 고통이 뼈에 사무쳐도 그러나 돈은 후 순위에 두어야 한다. 돈 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음을 믿어야 돈도 보이고 돈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다. 돈에 눈이 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돈부터 벌어보자는 얄팍한 욕망은 불나방과 같다. 결국 이런 욕망은 뫼비우스의 띠와 같아서 자신을 덮치고 끝내 자신을 불태우고 만다.
부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화가 난다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 부자가 아니면 빈자라는 생각이 합당한 생각인가? 우리 모두 탐진치(貪瞋癡, 욕심, 화냄, 어리석음)의 늪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진정한 부자는 고귀한 품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인심이 야박하지 않다. 남에게 친절하다. 배우고 공부한다. 체면을 중시하지 않는다. 투정 부리지 않는다. 정리 정돈을 잘하고 주변이 깨끗하다. 원망하지 않는다. 맡은 바 소임을 다 한다. 혼자 있어도 소외감이 없다. 쓸데없이 나대지 않는다. 무엇을 봐도 거슬림이 없다. 인생에 기복이 있어도 의연하다. 시련이 오더라도 받아들이고 묵묵히 견디어낸다. 이런 성품을 많이 갖고 있다면 당신은 부자 그 이상이다.
⑥ 돈, 친구, 건강은 행복의 아주 작은 일부다.
"돈을 잃으면 작은 것을 잃은 것이요, 친구를 잃으면 큰 것을 잃은 것이지만 건강을 잃으면 모든 걸 잃은 것이다."
뭐, 폼 나는 말 같지만 그냥 옳은 얘기 정도로 생각하자. 위 세 가지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돈, 친구, 건강에 너무 매몰되지 말자는 것이다.
돈은 쓰기 위해 번다고 하지만, 돈은 쓰는 맛보다는 버는 맛이 더 좋다. 은퇴를 한 사람도 돈을 헐어서 쓰면 왠지 불안하다. 생활비 정도는 벌어야 충만한 생활이 유지된다. 그동안 번 것을 축내면서 놀고먹겠다는 생각은 게으른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돈이 없어 가난한 것보다 부자가 아니면 가난하다는 이분법적인 생각이 문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할 때 몇 천만 원이 찍힌 예금 통장을 발견했다. 기초연금을 꼬박꼬박 모으신 모양이다. 왜 굳이 안 쓰시고 모으셨을까를 생각해 봤지만 아무 의미 없는 질문이다. 아마도 쓸 때의 기분보다도 예금 통장에 꼬박꼬박 쌓일 때의 기분이 더 좋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 본다.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얼마간의 예금 잔고를 남기고 떠나신다. 나 또한 그렇겠지. 내가 죽을 때 내 예금통장 잔고는 얼마나 될까? 인플레이션 효과 때문에 아마 억 정도는 될 것이다. 그 돈을 미리 당겨 지금이라도 소중한 사람을 위해 쓰자.
친구는 묘하다. 동반자이면서 경쟁관계이기 때문이다. 친구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자. 없는 친구를 만들기 위해 느지막이 이리저리 모임을 찾아 떠돌거나 떠난 친구를 모셔오기(?) 위해 삼고초려 하는 것만큼 안쓰러운 것도 없다. 친구가 가볍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대단하지도 않다. 젊었을 때는 친구가 최고지만 나이를 먹고 가정을 꾸리면서 후 순위로 밀린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하자. 아직도 친구 좋다며 하루가 멀다 하고 같이 어울려 다니는 사람이 있는데,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라. 같이 술 먹고 놀아줄 사람으로 친구가 필요한 것이 아닌지 말이다.
건강은 밀당할 정도만 되면 된다. 다들 김종국 같은 근육남을 꿈꾸고 있다면 그건 아니라도 말하고 싶다. 아주 건강한 것보다는 병색이 완연한(?) 정도만 아니면 된다. 사람은 아파봐야 남의 아픔도 잘 이해할 수 있고 좀 더 너그러워진다. 너그러워져야 되기 때문에 대충 건강해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단 건강을 우선순위에 두느라 다른 걸 모두 내팽개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건강 관리한답시고 매주 등산을 가고, 매주 낚시를 가고, 매주 자전거를 끌고 산으로 강으로 나가는 삶이 단순히 건강만을 위한 것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골치 아픈 일을 피하기 위함이고, 아내의 잔소리가 듣기 싫기 때문이고, 자식들 꼴 보기가 싫기 때문이고, 공부하기 싫기 때문이고, 집구석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라면 곤란하다.
⑦ 중요한 사람과의 관계는 오히려 거리를 두어야 행복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관계에 있어 내가 선한 뜻을 가지고 개입하면 결과가 좋아질 것이라는 환상과 착각에 산다. 과연 그럴까? 그런 경우는 상대방도 나와 똑같은 조건이어야 가능하다. 그게 가능할까? 삶의 체험과 경험이 다른데 내가 하는 조언과 충고가 먹힐까? 조심스럽게 해도 먹힐까 말까 한데 강압하거나 강조하거나 강행하는 경우 사태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 모든 것이 그렇다. 깊숙이 개입하면 도리어 불화가 생긴다.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방이 깨달을 때 가지 기다려주거나 깨닫지 못하더라도 답답해하지 말고 그냥 가까운 이웃이라고 생각하고 충고나 조언 대신 격려의 말 정도가 좋다. 그 이상은 과유불급이다. 매번 강조하지만 존경하는 사람에게 듣는 충고(조언) 이외에는 다 잔소리다. 가슴에 손을 얻고 생각해 보라. 당신이 누군가에게 존경받을 만한 사람인지.
친하게 지내고자 무턱대고 들이댔다가는 오히려 관계가 소원해진다. 장자의 '바닷새 이야기'처럼 내가 상대방을 좋아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상대방이 무엇(나)을 좋아하는가가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면 상대방도 자신을 좋아할 거라고 착각한다. 모든 비극의 시작은 자기중심적 세계관에서 시작된다.
⑧ 정치에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행복하다.
미운 사람이 있으면 덜 행복하다. 미운 사람 중에 정치인이 제일 많다. 뉴스 화면에 ○○○이 나오면 리모컨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다들 느꼈을 것이다. 정치 뉴스를 볼 때, 다른 나라의 뉴스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자. 즉, 감정을 개입하지 말고 제3자의 위치에서 보자. 그래도 안되면 아예 채널을 돌려버리던가. 그래야 평정심을 가지고 뉴스를 볼 수 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상태 즉, 심리적 골디락스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정치는 중요하다. 중요하다고 하면서 당원 가입을 하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고 당비를 내는 사람 또한 손을 꼽아야 한다. 그러면서 정치인 윤 아무개, 이 아무개를 논하는 것 자체가 염치없는 짓이다.
정치인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회복 탄력성이 큰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대단한 분들이다. 매일 국민들에게 돌팔매를 맞으면서도 내일이면 잊고 다시 알랑방귀를 뀌며 비굴하게 아첨을 한다. 아무나 못하는 일이다. 독한 놈(?) 들이라고 생각하자. 배우의 길로 들어섰으면 오징어 게임으로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이정재 뺨칠 정도의 배우로 거듭났을 것이다.
정치인들이 불철주야 민생을 챙기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의 바람을 해결해주기를 은밀히 기대하며 투표를 한다. 정치인은 어떻게 하면 국민들의 마음을 훔칠까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마음을 도둑맞지 않도록 단도리(?)를 단단히 하고 살아야 한다. 얼마 주겠다는 얄팍한 공약과 눈먼 돈 갈라 먹자는 공약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던져버리면 그 순간부터 영원히 파우스트로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눈먼 돈 갈라 먹어야 사는 삶이라면 자신의 삶은 얼마나 초라한 삶인가를 먼저 뒤돌아봐야 한다. 이 세상에 믿을 건 자신뿐임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무심한 남자의 진짜 행복론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내가 이런 유의 행복론을 얘기 한 걸 알면 아마 깜짝 놀라지 않을까 싶다. 직장 생활 내내 내성적이고 말이 별로 없는 부하였고, 웃음기 없는 심각한 표정의 동료였고, 무심하고 비호감인 상사였기 때문이다. 즉, 행복은커녕 불행하지 않으면 다행인 사람으로 생각했을 테니까. 몇몇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니가 행복하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도 행복하다"라고. 행복은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화되는 것이라고 변명해 보지만 그래도 좀 씁쓸하기는 하다. ㅠㅠ
행복은 밖으로 샘솟는 기쁨의 표정, 깔깔거리며 호탕하게 웃는 얼굴, 활기차 보이는 언행, 감미로운 미소, 상냥한 말투 등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런 이미지에 비추어 보면 나는 행복한 사람은 아닌 듯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복하다. 일상생활에서 불만족스러운 것이 없으며 운 좋게 1960년 이후에 태어났고 또 대한민국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걸로 족하다.
버들치 작가
증권회사에서 33년 근무 후 퇴직하여 현재 기능인으로 인생 2 막을 살고 있다. 1965년에 태어나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이 세 가지 운으로 위태롭게 살아왔다. 첫 번째 운은 짧은 학력으로 증권회사에 입사한 것이고, 두 번째 운은 33년간 한 회사를 다닌 것이고, 세 번째 운은 퇴직 후에도 소일거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퇴직을 앞두고 주경야독으로 기술을 배웠으며 그 경험에 대해 네이버 '부동산 스터디' 카페에서 버들치라는 닉네임으로 글을 썼다. 그 결과물로 '버들치의 인생2막'(2023)이라는 책을 발간 했다. 단순하고 평온한 삶을 추구해 왔으며 앞으로 그럴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