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서 한국 로맨스 영화가 사라진 이유 |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극장에서 한국 로맨스 영화가 사라진 이유

글 : 김봉석 / 작가 2023-08-22

이번 8월 15일 개봉한 영화 <달짝지근해:7510>은 개봉 첫날 122,815명의 관객이 들어<오펜하이머>와 <콘트리트 유토피아>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5위를 차지한 정우성의 감독 데뷔작 <보호자>보다 높은 순위다. 8월 24일 현재 좌석판매율은 1위를 달린다. 유해진과 김희선이 출연한 <달짝지근해:7510>은 중년의 로맨스를 그린 영화다. 사회성이 취약한 중년 남자와 혼자 딸을 키우는 여자, 그리고 다양한 개성을 가진 주변 인물의 에피소드가 어우러진 로맨틱 코미디다. 관객들의 반응도 좋은데, 극장을 찾는 중년 관객층이 늘어난 지금 트렌드에 맞는 영화여서가 아닐까 싶다.




한국 로맨스영화가 주목받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극장에서 로맨스 영화 보는 거 자체가 힘들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개봉작 리스트를 보면, 외국의 로맨스 영화는 가끔 있어도 한국 작품은 찾기가 힘들다. 몇 달 전 개봉했던 <킬링 로맨스>는 로맨스라기보다 코미디영화이고, 흥행에도 실패했다. 작년에 개봉했던 리메이크영화 <동감>, 21년에 개봉했던 <연애 빠진 로맨스> 정도가 기억난다. 두 영화 모두 흥행에 실패하고, 화제를 모으지 못한 채 조용히 사라졌다.


근래 한국 로맨스 영화가 줄어든 이유는, 무엇보다 관객이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는 유튜브 등 숏폼 컨텐츠에 익숙하고, 로맨스를 본다면 2시간짜리 영화보다 알콩달콩 혹은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과정을 세세하게 보여주는 드라마가 훨씬 흥미롭다. 극장 관람료가 오르면서, 큰 화면의 장점이 분명한 액션이나 어드벤처 같은 볼거리가 강조된 장르의 영화를 보게 된다. 로맨스는 작은 화면으로 봐도 충분하니까.


하지만 아쉽다. 여전히 할리우드와 일본 등에서 로맨스 영화가 많이 만들어지고, 관객들도 좋아한다. 일본 로맨스 영화는 한국에서도 잔잔하게 인기다. 작년 일본 영화상을 휩쓴 <꽃다발같은 사랑을 했다>, 인기 소설을 각색한 <오늘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등은 한국에서도 많은 관객이 들었다. <오늘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는 특히 10대 관객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 110만 관객을 기록했다.




봉준호의 <기생충>이 아카데미 작품상 등 4개 부문에서 수상하고, 황동혁의 <오징어 게임>이 에미상 작품상 등 6개 부문을 수상하는 등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 등 영상물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할리우드 영화만이 최고라는 생각은 199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할리우드 영화는 세계 영화산업의 최전선이지만 한국영화도 당당하게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가며 경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듯 발전하게 된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는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시에는 로맨스영화가 당당하게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개봉한 한국영화는 정말 다양하고, 새로운 영화들이 줄을 잇는다. 1997년은 송능한의 <넘버 3>, 장선우의 <나쁜 영화>, 김성수의 <비트>, 이창동의 <초록물고기>가 있었고, 1998년은 이광모의 <아름다운 시절>, 박기형의 <여고괴담>, 이재용의 <정사>, 김지운의 <조용한 가족>, 임상수의 <처녀들의 저녁식사>, 이영재의 <내 마음의 풍금>이 개봉했다. 1999년은 김성수의 <태양은 없다>, 박광수의 <이재수의 난>, 장진의 <간첩 리철진>, 장선우의 <거짓말>, 송능한의 <세기말>, 강제규의 <쉬리>, 이명세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 김상진의 <주유소 습격사건>, 장윤현의 <텔미썸딩>, 정지우의 <해피엔드>가 있다.


당시 데뷔한 감독은 장윤현, 허진호, 송능한, 이창동, 임상수, 김지운, 이재용, 정지우, 장진, 이광모, 이영재, 박기형 등으로 미래의 한국영화를 예견할 개성적이며 에너지가 넘치는 영화들을 만들었다. 장선우, 이명세, 박광수, 강우석, 김상진 등 이전부터 활동했던 감독들도 새로운 스타일의 걸작들을 연출했다. 그야말로 개성적인 스타일의 영화와 감독들이 대거 등장하며 한국영화를 바꾸어 놓았다. 로맨스영화도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한 축이었다.




1997년 개봉한 장윤현 감독의 <접속>은 새로운 세대의 사랑을 그렸다는 호평을 받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한석규와 전도연은 이후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배우가 되었다. 그리고 1998년에 나온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와 이정향 감독의 <미술관 옆 동물원>(98)은 단지 새로운 세대의 로맨스를 그린 것만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방식이나 생각이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 영화였다.


<접속>은 서로 다른 공간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리워하던 남녀가 온라인을 통해 마음을 전달하다 결국 만나는 이야기다. 라디오 PD인 동현은 갑자기 떠나간 옛사랑 때문에 마음을 닫고 있다. 케이블 홈쇼핑 상담원인 수현은 친구의 애인을 좋아한다. 동현은 추억이 담긴 노래를 방송에서 틀고, 수현은 우연히 그 노래를 듣고 마음이 움직인다. 우연이지만 운명처럼 두 사람은 뭔가를 느끼고, PC통신을 통해 서로에게 닿게 된다. 지금은 인터넷을 통한 연결, 만남이 일상이 되었지만 1997년에는 낯설었다. 동현과 수현은 서로를 그리워하면서도,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야 만난다. 만나서 서로를 알아가면서 이루어지는 사랑이 아니라, 서로를 알아가면서도 만남은 최대한 늦춰진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랑의 순간들을 <접속>은 차분하게, 서정적으로 그려낸다. 인터넷과 서정성은 어울리지 않는 관계 같았지만, <접속>은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사랑할 것인지를 미리 보여준 중요한 영화다.




이어 나온 허진호의 <8월의 크리스마스>의 감성도 유달랐다. 변두리 사진관을 운영하는 정원은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남자다. 자신이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을 알고도 담담하게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주차요원 다림은 우연히 사진관에 왔다가 가끔 들리고 있다. 공간이 편하고, 사람이 따뜻하기 때문이다. 나이 차이도 많고, 서로의 처지도 너무 다른 남녀이지만 그들의 사랑은 아주 완만하게 흘러간다.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이지만, 매 순간들은 너무나 아름답고 가슴 저릿하다. 


허진호는 2001년에 만든 <봄날은 간다>에서도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들려둔다. 어쩌면 비극일 수도 있다. 두 사람의 사랑은 결국 흩어져 버리니까. 하지만 운명처럼 헤어져야만 하는 <8월의 크리스마스>의 남녀와 달리 <봄날은 간다>의 남녀는 자연스러운 이별을 경험한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듯이, 누군가와의 사랑은 세월이 흐르며 끝나고 언젠가 또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된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수많은 사랑을 보내고, 우리는 마지막 사랑을 찾게 된다.




<접속>과 <8월의 크리스마스>는 새로운 사랑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전통적인 혹은 가장 익숙한 사랑의 이야기도 여전히 감동적이다. 2003년의 <클래식>과 2004년의 <내 머릿속의 지우개>는 신파라고 말할 수 있는 극적인 사랑의 이야기다. <클래식>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고 우연과 우연이 겹치면서 반복되는 절절한 사랑이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는 아직 젊지만 알츠하이머에 걸려 기억을 잃어버리는 아내를 보살피는 남자의 이야기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떠나보내야만 하는 사랑을 그리는 <클래식>과 <내 머릿속의 지우개>는 흥행에 성공하며 화제를 모았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는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끌어 리메이크 영화도 만들어졌다. 이후에도 <아는 여자>, <너는 내 운명>,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등 로맨스영화는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지금은 로맨스 영화의 인기가 시들하지만, 사랑 이야기는 결코 사라질 수 없다. 세상에서 사랑이 사라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회와 조건이 된다면 누구나 사랑을 원하고, 지금 사랑을 하고 있다면 영원하기를 바란다. 현실은 이상적인 사랑과 많이 다를지라도. 현실에서 사랑을 막연히라도 꿈꾸듯, 영화와 소설에서 로맨스를 원하는 대중은 언제나 존재한다. 영원히 반복되면서도 언제나 새롭고, 시대에 맞게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나는 로맨스 영화가 지금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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