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부부는 무엇으로 사는가
글 : 박경옥 / OK지식나눔연구소 대표 2023-07-06
2년간의 셀프 희망고문
남편은 퇴직 후 2년간 일자리를 찾았지만 예전 일과 비슷한 일은 없었다. 영어와 스페인어에 영업력이 빵빵한 남편이었지만 그런 재능을 써먹을 수 있는 일자리는 없었다. 퇴직 후 1년, 공백 기간이 길어질수록 불안하고 초조했다. 나이 들수록 취업이 더 어려울 거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2년간 ‘내 실력을 알아주는 직장이 있지 않을까?’ 셀프 희망고문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희망고문이 아니라 어리석음이었다. 부부 둘 다 세상물정을 너무 몰랐다. 단연코 예전 같은 직장은 없다.
2년이 지나자 퇴직금은 바닥을 쳤다. 남편이 “니 가진 돈 있나?” 물어볼 때 실감했다. 내가 살짝 저축한 돈으로 두 달은 버텼지만 더 이상 돈이 없었다. 한 달 생활비가 자존심을 내려놓게 했다. 관리직을 했던 사람이 갈 수 있는 일자리가 없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육체노동 외에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현실을 인정하자 남편은 퇴직 후 약초농사 지을 때 알던 분의 소개로 밤늦게까지 일하는 택배 분류를 하게 되었다. 전업주부였던 나는 쉽게 취업시장에 들어가지 못했다. 계산원이나 일용직으로 가도 되지만 체력이 견딜 수 있을지 약값이 더 나올 것 같은 핑계와 두려움이 있었다. 솔직히 그때까지 일용직을 안 하고 최대한 버티고 싶었다. 버틴다고 생활비가 해결되지 않아 남편에게 제안했다. 환경을 바꾸자. 아파트에서 빌라로 줄이자고.
환경을 바꾸면 생각과 행동이 변한다. 작은 빌라로 이사하고 ‘미니멀 라이프’에 돌입했다. 자동차는 2010년부터 없어서 팔 것도 없었다. 대형마트의 타임세일을 이용해 30% 이상 할인상품을 구입하고, 모양 빠지는 B급 야채와 채소를 사서 생활비를 최대한 줄였다. 집을 옮기고 남편이 직장 다닐 때 준비한 개인연금 2개와 최저임금의 5~6시간 택배노동으로 생활을 안정적으로 꾸릴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몇 년 동안 배운 인문학으로 무료재능기부 강의를 시작해 서서히 유료로 전환했다.
남편 퇴직 후 7년간 많이 바뀌었다. 퇴직하면 어떤 점이 달라질까. 어떻게 준비하면 은퇴 쓰나미에 휩쓸리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아내 입장에서 퇴직 준비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퇴직을 준비하는 분과 퇴직자 아내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퇴직 후 달라지는 것들
퇴직 후 달라진 점을 수입·시간·자리·사람 4가지로 나누어 알아본다.
먼저 수입이 없어졌다. 퇴직 2년 후 퇴직금이 바닥을 쳤다고 유튜브·신문·방송 인터뷰에서 말했더니 “아니 대기업 임원, 상무보로 일했는데 퇴직금이 2년 만에 없다는 말이 이해가 안 돼요. 엄살 부리는 거 아닌가요?”라는 댓글이 달렸다. 퇴직금을 어떤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많다고도 적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도 얼마의 퇴직금을 받았다. 하지만 재직 시에 받은 ‘우리사주’ 미납금을 갚아야 했다. 거기다 남편이 일했던 큰 회사가 공중분해되었다. 우리사주로 꼬박꼬박 넣었던 돈이 다 날아갔다. 퇴직금이 그대로 있거나 불어나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거의 없다. 심지어 예상치 않은 뭉텅이 지출이 생길 수도 있다.
퇴직금은 부부만 쓸 수 있는 돈이 아니다. 가족의 미래가 걸려있다. 퇴직 당시, 아들 2명이 대학생이었다. 큰아들은 스페인에 교환학생 1년을 다녀왔다. 둘째는 일본에서 목수가 되겠다고 목조건축을 공부하러 갔다. 아들의 해외 학비와 부부 생활비로 쓰고 나니 퇴직금이 없어졌다. 다행히 아들 둘이 대학 졸업 후 바로 취업했다. 아버지 퇴직은 자녀를 빨리 독립시키는 계기가 되며, 아버지의 퇴직금은 다음 세대의 밑거름이 된다.
퇴직금이 마른 후 매달 현금 흐름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이게 가장 큰 현실이다. 다달이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집을 팔아야 한다. 남들은 “집을 팔면 되잖아”라고 쉽게 말하지만 집은 마지막 배수진이다. 인생 2막에 베이스캠프인 집은 어디든 있어야 하지 않은가.
두 번째, 퇴직 후 부부가 함께하는 시간을 살펴보자. 사실 퇴직 전에는 부부가 같이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주중에는 부서 회식이다, 거래처 접대다 해서 일주일에 3~4번 늦게귀가했다. 주말에는 접대골프로 집에 없었다. 그런데 퇴직 후 24시간 함께 있으니 불편하고 어색했다. 퇴직 후 3개월 정도는 아내가 정성을 다해 아침·점심·저녁을 차릴 수 있다. 거기까지다.
아내가 변한다. 3개월 차려준 밥상을 기준으로 “내가 30년을 벌었는데 밥을 안 차려주나?” 말하면 부부싸움이 된다. 어떤 부부는 남편 퇴직 후 의논을 해서 ‘삼시세끼’를 어떻게 할지 정했다고 한다. 아침은 남편이 빵과 커피, 과일로 차린다. 점심은 각자 알아서 먹는다. 저녁은 아내가 된장찌개, 나물이 있는 한식 밥상을 차린다. 각자 한 끼씩 분담하면 집안에 평화가 온다. 부부가 함께하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가 퇴직 부부의 삶의 질을 좌우한다.
세 번째는 자리다. 자리는 다르게 말하면 위치다. 퇴직 전은 가장 연봉이 많은 시기로 직위가 높았을 것이다. 에베레스트를 등반할 때 해발 8000m 정상 부근의 하산 지점에서 사고가 많이 발생한다고 한다. 퇴직 전 내가 받았던 높은 연봉이나 직위는 생각하지 않아야 내리막 경사로에서 넘어지지 않고 내려갈 수 있다. 퇴직 후의 자리와 위치는 내가 정한다. 아무도 만들어주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남편은 택배 분류를 시작한 해에 원광디지털대 동양학과에 입학해 4년간 국가장학생으로 공부했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마포구 공덕동의 50+캠퍼스에서 오전에 사주명리, 주역, 인도철학을 공부하고 오후에 땀 흘리는 노동을 했다. 아마 택배 일만 했으면 ‘나는 왜 여기에 있지?’라는 자괴감에 빠졌을 것이다. 대신 공부와 일을 병행해 지행합일(知行合一)하는 일상을 꾸려서 극복할 수 있었다. 사회에 기여한다는 뿌듯함이 생겼다.
퇴직 후 본인이 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스스로가 의미 부여를 해야 한다. 이때 옆에서 자리와 의미를 만들어 주는 의례가 중요하다. 남편이 공덕동에서 공부하는 시간이 많아 ‘공덕선생’이란 호를 내가 지어주었다. 공덕(功德)을 쌓아 자신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 미래지향적인 의미도 포함한다.
나 역시 무료강의를 시작해 강사라는 자리를 만들었다. <오늘, 남편이 퇴직했습니다> 책을 써서 작가가 되었다. 남편 퇴직 후 6개월마다 새로 명함을 만들었다. 이제 1인기업 ‘OK지식나눔연구소’ 대표다. ‘지식농부’라는 브랜드로 사업자등록을 하고 특허청에 상표출원을 했다. 이처럼 퇴직 후는 스스로 자리를 만들어가는 시기다. 그 길은 결코 꽃길이 아니다. 울퉁불퉁한 길이다. 앞이 보이지 않지만 위험과 기회가 있어 긴장되고 떨리는 길이다.
네 번째는 사람이다. 퇴직 후 자연스레 인간관계가 정리된다. 회사를 중심으로 했던 모임은 거의 끊어진다. 이제 아무에게도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 친구나 잘 아는 사람이 취업을 도와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특히 동창들 모임은 별 의미가 없다. 아는 사람은 정서적으로 가까울 뿐 새로운 일자리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퇴직 전 나의 직함이나 직업을 모르는 사람이 아무 편견 없이 일자리를 소개해줄 수 있다. 공부나 취미, 취업 활동을 같이 하는 사람과 친구가 되면 기회가 생긴다. 기회를 만들려면 밥을 같이 먹어야 한다. 코로나19 이전에는 ‘1만원의 행복’이 유행했는데 요즘은 밥값이 올라 ‘2만원의 행복’으로 수정해야겠다. 2만원 내고 활동을 같이 하는 사람과 밥 먹고 커피도 마시면서 정보를 교환한다. 이런 자리에서 자연스레 자신을 소개할 수 있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사람들이 나를 알아준다. 자연스레다른 사람을 돕고 모임에 기여할 때 다시 만나자고 하고 일자리도 소개해 준다. 사귀는 사람은 동년배도 좋고 아래, 위로 10년 차이 나는 사람들은 소통을 잘하면 서로에게 멘토가 되어 좋다.
2020년 코로나19가 시작되자 나는 줌(Zoom)으로 공부를 시작해 30대 1인기업 대표들과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젊은 사람들의 빠른 실행력을 따라갈 순 없었지만 새로운 트렌드를 배워 온라인 강의를 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챗GPT를 비롯해 구글의 협업 도구 사용을 익히는 등 디지털 역량을 높이고 있다.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젊은 사람과 만나면 액티브해진다. 그들이 잘 사용하는 디지털을 배우면 시니어들에게 일할 기회가 온다. 블로그·유튜브·인스타·페이스북에 하는 온라인 홍보를 배워 수입을 만들 수 있다. 자신의 일로 돈을 받는 사람은 프로라 할 수 있지만, 한번 프로라고 영원한 프로는 아니다. 다음에도 나를 선택할 수 있게 정성을 들여야 한다.
퇴직 후 50년을 살아야 하는 100세 시대다. 어떤 일도 그냥 되는 일은 없다. 부부가 힘을 합쳐 수입이 나오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인생 후반전에 3가지 기술을 갖출 필요가 있다.
퇴직 후 활기찬 삶을 위해 필요한 3가지
남편을 통해 함께 은퇴자의 삶을 살아보고, 퇴직 후 활기차게 사는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 엄선한 인생 후반의 3가지 필수 기술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빨리 잊어버리는 기술이다. ‘회사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해서 실적이 좋았는데 그들이 나를 잘랐어?’ 억울하지만 이런 생각은 몸이 망가지는 독이 된다. 잊기 힘들면 매일 1시간 이상 걸으면서 화를 삭이고 내려놓아야 한다. 아무리 화를 내도 그들은 나를 다시 안 부른다.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는 방법을 찾고 과거는 빨리 잊는 것이 건강에 훨씬 좋다. 과거를 잊으면 남을 의식하지 않게 된다. 퇴직 후 택배를 하든 대리기사, 경비를 하든 당당하게 살아간다. 남이 뭐라든 내 인생을 살게 된다.
두 번째, 나누는 기술이다. 퇴직하면 회사 인간관계는 거의 없어진다. 초등학교 동창, 종교모임, 같이 고생했던 친구, 가족, 지인이 남는다. 이마저도 그 사람들에게 시간, 돈, 정보를 나누지 않으면 관계를 지속하기 어렵다. 돈만 모으고 돈을 못 쓰는 사람, 놀 줄 모르는 사람 곁에는 사람이 없다. 학사·석사·박사보다 인기 있는 사람은? ‘밥사’다. 밥을 기분 좋게 사고 돈을 잘 쓰는 기술, 나누는 기술이 필요하다.
세 번째, 디지털 기술이다. 협업이 필수인 시대에 새로운 기술을 배우지 않으면 함께 일할 수 없다. 챗GPT를 비롯한 여러 ‘생성형’ 인공지능이 사회 곳곳에서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상황에 구글 협업 도구 등 디지털 역량을 키워야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다. “나 때는 말이야, 그런 것 안 배웠어. 직원들이 PPT 다 만들어주었어” 하는 미련이 남는 사람은 변화하는 현실에서 도태된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4가지를 갈고 닦아야 한다. 이 4가지는 소통하기 위한,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한 기본기술이자 삶의 무기다. 이 4가지는 초등학교 과정에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것을 발전시킨 사람과 아닌 사람은 인생 후반전에 큰 차이가 난다. 한 직장에서 오래 일한 사람은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다.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기술이 있으면 부가가치가 높아진다. 자신의 능력에 날개를 단다. 강사로 나가 지식을 나누고 책을 쓸 수 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의 강의를 유튜브에서 보고 있지 않는가.
퇴직, 은퇴 쓰나미는 피할 수 없다. 퇴직자와 퇴직자 아내를 기다리는 안정적인 노동시장은 없다. 퇴직 후 현실은 쓴맛이다. 60년대생을 비롯한 퇴직자들이 재취업하면 열악한 노동, 3D 노동을 60~75세까지 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언젠간 우리 모두에게 닥칠 것이다.
하지만 퇴직했다고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퇴직 후에도 사회에서 맡을 역할을 자신이 개척하면 된다. 자신이 주체적으로 인생 후반기에 누릴 새로운 자부심과 정체성을 만들어가면 된다. 뭐가 두려운가. 퇴직 후에도 당당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천억원대 자산가이자 블로거 세이노의 저서 <세이노의 가르침> 속의 내용을 새겨보자. “현실에 빗대어 미래를 미리 계산하지 말라, 제대로 공부하면 보상의 수레바퀴는 천천히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배우고, 나누고, 경제적 자립을 이루는 것, 그것이 퇴직 후 삶의 핵심이다. 자유로운 퇴직생활을 즐기시길 진심으로 응원한다.
"퇴직 전 준비 못해 가장 후회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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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옥 OK지식나눔연구소 대표
25년간 전업주부로 지내다, 남편 퇴직 후 현재 퇴직미래설계, 퇴직분노조절 등을 연구 및 강의하는 OK지식나눔연구소 대표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오늘 남편이 퇴직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분노조절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