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했다고 계속 그렇게 TV만 보실 겁니까
글 : 송양민 / 가천대학교 명예교수 2023-07-06
은퇴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괴로움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밀려드는 ‘자유 시간’이다. 출근할 직장도 없고, 해야 할 일도 없는 상황이 너무 버 거워진다. 그래서 어디라도 좋으니 아침에 출근할 곳이 있으면 정말 좋겠다고 말들 을 한다. 하지만 평생을 직장에 매여 있었는데 정년퇴직 후에도 스스로 다시 속박 되길 원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제부터 느긋한 마음으로 인생의 여백(餘白)을 즐기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내고 즐겨야 한다. 무얼 해야 할지 생각이 막막한 사람은 책상에 앉아 ‘은퇴생활 일 과표(日課表)’를 짜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필자는 오랫동안 은퇴 생활 상담을 해오 면서, 은퇴자들이 연간 계획도, 월간 계획도 아닌 ‘하루 일과표’를 다 채우지 못해 쩔쩔매는 것을 의외로 많이 보아왔다.
사람들은 잠자는 시간, 몸 씻는 시간, 밥 먹는 시간은 자신 있게 채운다. 하지만 그 뒤부터는 펜을 머뭇거리는 분들이 하나둘씩 생겨난다. 대기업에서 일했던 사람 들일수록 힘들어하는 경향이 있다. 현역생활을 바쁘게 정신없이 지내온 사람일수 록, 하루 일과표를 채우는 것을 어려워한다. 꽉 짜진 틀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은 퇴 후 홍수처럼 밀려드는 자유가 당황스러운 것이다.
통계청의 ‘2020년 노인실태조사’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고령자들이 어떻게 하루 생활을 보내는지 잘 나타나 있다. 이 조사에 따르면, 고령자들은 하루 24시간 가운 데 8시간 28분을 ‘잠자는 시간’, 2시간 1분을 ‘식사하는 시간’, 1시간 42분을 ‘개인 건강과 외모 관리 시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 ‘청소 등 가사노동’에 2시간 17분을 사용하고, ‘전철과 버스를 타는 이동시간’에 1시간 12분을 쓰는 것으로 나타난다.
‘노후생활의 꽃’인 취미·여가 시간은 수면시간 다음으로 많은 6시간 51분을 할애하여, 외견상으로는 활발한 여가생활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가생활의 구 체적인 내용을 들여다보면 문제가 많음을 알 수 있다.즉 ‘TV 시청과 라디오 청취’ 로 보내는 여가 시간이 3시간 50분, 가족 및 친구들과 어울리는 ‘교제(交際) 시간’ 이 1시간 23분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우리 고령자들의 하루는 가사노동, 친교 활동, TV 시청 등과 같은 가벼운 것들로 쭉 채워져 있다. 문제는 이렇게 목적의식 없이 그냥 시간을 보내는 생활은 곧 지루해지기 쉽다는 점이다. 은퇴자들이 공부나 책을 읽으며 보내는 ‘학습(學習) 시간’이 하루에 ‘2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은 충격적 이기조차 하다.
은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를 준다. 이 자유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면, 무엇보다 자신만의 목적과 관심사가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주위에서 좋다고 추천하는 사회활동에 자주 기웃거리며 혼자 보내는 시간 을 줄이려고 한다. 골프, 축구, 배드민턴 등 운동 동호회도 새로 가입하고, 학교 동 창회와 종교 모임까지 챙긴다.
하지만 확실한 목표 없이 돌아다니기만 하는 은퇴자들의 삶은 공허해지기 쉽다. 이런 분들과 은퇴상담을 하다 보면 ‘이렇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 맞나요?’라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그 표정에서 묻어나는 뭔가 불안하면서도 해결책을 바라는 눈빛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저것 좋다는 활동을 다 한다고 해서 ‘행복한 은퇴 생활’ 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은퇴 생활 일과표를 짤 때는 아래와 같이 대략 4가지 사항을 유념하여 만들어 보자.
첫 번째는, 바쁜 생활이 꼭 좋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은퇴자들이 흔히 겪게 되는 심리적 증상 가운데 하나가 ‘외로움을 피하려면 잠시도 한가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다. 그래서 일부러 많은 모임을 만들고, 이곳저곳에 머리를 들이밀려고 한다. 이런 삶의 자세는 나중에 인생의 공허함만 키울 뿐이다. 삶의 목적을 세우는 생애 설계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 고, 거기에 적합한 생활 일과표를 짜야 한다.
두 번째로, 배우자와 함께 지내는 시간을 되도록 많이 확보한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한국과 일본, 미국의 고령자 가운데 한국인들이 ‘부부가 함께 보내는 시간’ 이 가장 적고, 부부가 ‘각자 자신을 위해 쓰는 시간’은 가장 많다고 한다. 자녀 양 육이 대부분 끝나는 은퇴 생활을 시작하면, 부부관계가 신혼 초기보다 더 만족스러 울 수 있다. 은퇴 후 최고의 친구는 ‘배우자’라는 말도 있다.
세 번째로, TV 보는 시간을 크게 줄여야 한다. 여가는 희랍어로 스콜레(Scole)라 고 한다. 이는 영어 School(학교)와 Scholar(학자)의 어원이 되었는데, 교양을 쌓고 자기 수양을 힘쓴다는 뜻이다. 즉 여가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는 시간’이 아니 라,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또 다른 공부 시간’을 의미한다. 귀한 후반 인생 시간을 TV 앞에서 너무 많이 소비하는 것은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
네 번째로, 사회참여와 봉사활동에 좀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 뭔가 의미 있는 활동을 할 때 사람은 자신의 삶에 만족을 느낀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자원봉사와 같은 이타적인 활동이 미약하다. 미국 은퇴자협회(AARP) 조사에 따르면, 미국 은퇴 자들의 활동은 종교(42%), 자선 및 사회복지활동(17%), 학교(12%), 간병·의료봉사 (9%), 정치적 활동(6%)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비중이 40% 가까이에 달한다는 얘기다. 반면 우리 고령자들의 자원봉사 참여율은 6.5%로 아주 낮게 나타나고 있다. 노년 학 관련 연구 성과를 보면, 남을 돕는 활동을 하는 은퇴자들은 생활 만족도가 높아 지고, 사망위험도 낮아진다고 한다. 자원봉사는 남에게 자신이 베푸는 것보다 몇 배나 많은 보답을 받는 생산적인 여가활동이다.
이런 원칙들을 생각해가며 은퇴 생 활 일과표를 만든다면, 우리들의 은퇴 생활은 지금보다 훨씬 활기차게 될 것이다.
송양민 가천대학교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 후, 83년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경제부장과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벨기에 루뱅 대학교에서 유럽학 석사, 연세대학교에서 보건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가천대학교로 옮겨 보건대학원장, 특수치료대학원장을 역임한 뒤 2024년 2월 퇴직했다. 관심 연구분야는 인구고령화, 보건정책, 경제교육 등이며, 보건ㆍ복지ㆍ노동ㆍ연금분야 연합학술단체인 사회보장학회 회장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경제기사는 돈이다』, 『30부터 준비하는 당당한 내 인생』, 『밥 돈 자유』, 『100세시대 은퇴대사전』, 『ESG 경영과 자본주의 혁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