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의 나는 왜 기능을 배우기로 했는가 |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50대의 나는 왜 기능을 배우기로 했는가

글 : 버들치 / 작가 2023-03-31




2015년 10월, 50대 초반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명예퇴직을 하고 계약직으로 전환했다. 고정된 월급을 받던 정규직 월급쟁이에서 매년 계약을 연장해야 하는 불안정한 신분으로 전락(?) 한 것이다.

나의 첫 번째 사회생활의 시작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1984년이다. 짧은 배움을 뒤로 하고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동네 철공소에 들어갔었다. 물론 나의 적성이나 능력 등은 누구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일주일 정도 일한 뒤, 사장님의 오토바이 뒷 좌석에 실려 이번엔 프레스 공장으로 짐짝처럼 옮겨졌다. 그분의 허리춤을 잡고 오토바이 뒷 좌석에서 느꼈던 위태로움은 나이 든 지금도 생생했다. "내 인생도 글러먹었구나"라는 최초의 자학이 독백처럼 튀어나왔다. 새로 들어간 공장은 금형에 재료를 넣어 고무호스를 찍어내는 프레스 공장이었다. 1년 정도 일했다. 새벽에 일어나 어둠을 뚫고 공장에 향했고 어둠을 뚫고 집에 돌아와 고단한 몸을 누였다. 어두운 새벽에 걸었던 그 길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연옥으로 향하는 길과 같았다. 영원히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과 막막함에 나는 두렵고 외로웠다.

군 제대 후 그 연옥으로 향한 길에서 나를 구원해 준 곳이 A증권회사였다. 1988년 3월에 들어왔다. 짧은 학력에도 불구하고 대기업에 다닌다는 이유로 어깨에 힘주고 다녔다. 그 덕에 결혼도 하고 애들도 키우고 집도 장만했지 싶다. ​

그렇게 운 좋게 A증권회사에 들어와 27년간 근무하다 2015년에 계약직으로 전환된 것이다. 출근하는 사무실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급여가 절반으로 줄었다. 비로소 정신이 바짝 들었다. 엄동설한에 잠옷 바람으로 문밖으로 던져진 느낌이었다.

계약직으로 근무할 수 있는 기간을 대략 5년 정도로 잡았다. 그 5년 동안 무엇을 배워 어떻게 먹고살까를 고민했다. 먹고사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을 수 있겠다. 투자로 먹고사는 방법, 사업으로 먹고사는 방법 그리고 노동으로 먹고사는 방법이다.




첫 번째, 투자로 먹고사는 방법. 

가장 폼 나는 일이다. 선망의 대상이고 품격이 있어 보인다. 또 여유롭고 전문가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다들 워런 버핏을 꿈꾸고 도널드 트럼프를 동경한다. 하지만 투자는 쉽지 않다. 투자가 쉬워 보이는 것은 일부 극소수의 성공 사례 때문이다. 내가 32년을 금융 투자업에 근무한 사람임에도 투자에 신중한 것은 많이 배우고 똑똑한 사람도 어려워 하는 것이 투자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2020년과 2021년 같은 상승장일 때 돈을 번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달콤한 시간은 생각보다 짧다. 전설적인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이 한 말을 새겨들어야 한다. "누구나 다 계획은 있다. 한 대 처맞기 전까지는" 그렇다. 하락장을 겪어보기 전에 성공을 말하는 것은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을 보고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27년 동안 투자의 쓴맛과 단맛을 겪어본 결과 50대의 나에게는 투자가의 삶이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두 번째, 사업을 일으켜 먹고사는 방법. 

우리가 추구하는 사업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소상공인 또는 자영업자 정도이다. 가장 흔한 사업이 요식업이다. 사장님 소릴 들을 수 있고 또 종업원을 몇 명을 거느릴 수도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전까지 전국적으로 카페 열풍이 불었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서 조그마한 카페를 열어 커피를 볶고 창밖의 변화를 감상하며 조용히 늙어가는 그런 꿈을 누구나 한 번쯤 꿈꾸었으리라. 그때 창업을 했으면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코로나19 이후로 빈 상가가 속출하고 여기저기서 자영업자들이 짐을 싸는 걸 목격했기 때문이다. 특히 50대 중반이라 사업을 하기에는 애매하다고 판단했다. 이래저래 사업은 안 될 것 같다. 그래, 일단 접자. 안전하게 가자.




그럼 먹고사는 마지막 방법은 몸을 파는 일만 남는다. 

몸을 파는 일이라고 하니 좀 이상하다. 노동을 판다고 하자. 노동에도 나름 서열이 있다. 머리를 쓰는 사무직과 근육을 쓰는 기능직 말이다. 이른바 화이트 칼라와 블루 칼라로 갈린다. 머리로 먹고사는 직업이 깨끗한 환경에서 일하고 나름 폼 나 보여도 스트레스는 기능직에 비할 바가 아니다. 실적과 진급을 위해 과도한 업무도 마다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충성 경쟁 또한 뜨겁다. 반면 근육을 쓰는 직업은 일하는 공간이 척박하다. 풍찬노숙은 물론이고 때론 몸이 축나기도 한다. 하지만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많지 않다. 가장 큰 장점이다. 지금까지 머리를 쓰는 일을 해온 나다. 좋지 않은 머리를 가지고 용을 썼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몸의 편안함 보다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훨씬 더 컸다. 직장 생활을 하는 내내 차라리 몸은 피곤해도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 그래서 기능인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기능으로 먹고살겠다는 생각은 아버지와 무관하지 않다. 아버지는 목수였다. 노동판은 아버지의 왼손 약지 손가락 한 마디를 거두어 갔다. 고단한 삶을 살다 가셨다. 옆에서 아버지의 삶을 바라보는 심정은 어렸을 때는 마뜩지 않음이었고, 철이 든 다음에는 죄송함 이었다. 속죄와 감사의 마음으로 아버지가 살아낸 그 노동판의 척박한 환경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었다. 그게 자식 된 도리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렇게라도 해야 아버지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근육을 쓰는 기능은 정직하다. 일한 만큼 가져간다. 또 임금 격차가 금융 서비스처럼 크지 않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장인은 아니더라도 숙련공 소리는 듣는다. 그런데 사실 우리 나이가 되면 사무직으로 들어갈 만한 직장이 별로 없다는 것이 더 솔직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사람은 자기 합리화에 능한 동물이다. 나도 예외일 수 없다.

숙고 끝에 퇴직 5년 전부터 낮에는 회사를 다니고 야간이나 주말을 이용해 기능을 배웠다. 주경야독의 시간이었다. 앞으로 이어질 글은 그 경험에 대한 것이다.

뉴스레터 구독

미래에셋 투자와연금센터 뉴스레터를 신청하시면 주 1회 노후준비에 도움이 되는 유익한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 이름
  • 이메일
  • 개인정보 수집∙이용

    약관보기
  • 광고성 정보 수신

    약관보기

미래에셋 투자와연금센터 뉴스레터를 구독한 이메일 조회로 정보변경이 가능합니다.

  • 신규 이메일

미래에셋 투자와연금센터 뉴스레터를 구독한 이메일 조회로 구독취소가 가능합니다.

  •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