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이여, 여성들에게 배워라!
글 : 송양민 / 가천대학교 명예교수 2022-04-15
은퇴한 한국 남자들은 “나이를 먹으니 외롭다”고 자주 말한다. 함께 살던 자녀들이 모두 성장해 분가(分家)해 나가는데다, 학교 동창생과 직장 동료 등을 빼면 친구 네트워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은퇴생활에 들어가 5~10년이 지나면 기존 네트워크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주변의 친구들이 줄어들면 새 친구를 사귀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나라 남성들은 노후생활에 접어들면 사회활동의 범위가 줄어들고, 극심한 심리 위축을 겪는다.
은퇴를 체면 손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은퇴자들의 권익보호 단체인 대한은퇴자협회(회장 주명룡)는 매월 회비를 내는 정식 회원이 5백 명에도 못 미친다. 은퇴자라는 이름이 주는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회원 가입을 꺼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 단체 이름에서 은퇴자라는 문구를 빼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대한은퇴자협회는 미국 은퇴자협회를 본떠서 만든 NGO(비정부기구) 단체이다. 우리나라 은퇴자협회가 모델로 삼고 있는 미국 은퇴자협회는 회원이 3500만 명에 달한다. 대부분이 회비를 꼬박고박 내고, 자원봉사 활동을 왕성하게 펼치는 사람들이다. 낙관적인 생활 자세를 가진 미국 사람들은, 태어나서 젊은 시절엔 일을 하고, 나이를 먹으면 은퇴를 하는 ‘자연의 섭리’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항상 현실에 충실하게 살아간다는 뜻이다.
유럽의 은퇴자들은 오히려 은퇴를 빨리하고 싶어 해서, 유럽 국가들은 국민들의 은퇴 연령을 늦추느라 골치를 앓고 있다. 노령연금 지급 부담을 줄이기 위한 고육책(苦肉策)이기도 하지만, 현역 생활에서 일찍 물러나 내가 평생 꿈꿔왔던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다는 욕구가 유럽인들의 마음속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직장 은퇴를 사회생활의 끝으로 생각하는 우리나라 남성들이 되새겨봐야 할 생활 자세이다.
직장 은퇴를 체면 손상으로 생각하는 한국 남성들과는 달리, 우리나라 여성들은 나이를 먹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젊었던 옛날은 옛날이고, 나이가 든 지금은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밥을 살 돈이 넉넉지 않다고 해서 친구들을 멀리하거나, 외출을 삼간다든지 하는 일도 거의 없다. 젊은 시절은 그 시절대로, 나이든 시절엔 또 그 시절대로 열심히 적응하여 살아간다. 그래서 60세가 넘어도 할 일이 많고, 만날 사람도 많다.
태어날 때부터 감성지수(感性指數)가 탁월한 여성들은, 평생 100명 이상의 친한 친구를 갖는다고 한다. 인적 네트워크가 이처럼 풍부하니, 마음이 외로울 때나 슬플 때, 얼마든지 마음을 풀 수 있고, 그에 따라 스트레스도 줄어든다.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7~10살 정도 더 오래 사는 데는 주변 사람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지내는 것이 크게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우리나라 여성들은 국제적으로 비교해볼 때도 사교성이 아주 높은 나라에 속한다. 여고와 대학시절 친구, 남편 친구의 아내들, 자녀가 다니는 학교의 학부형, 같은 아파트 단지 주민, 같은 교회와 성당에 다니는 동년배 여성 등등 여러 친구가 끊이질 않는다. 살던 지역을 떠나, 전혀 모르는 도시로 이사를 가도 순식간에 새 친구를 많이 만들어 낸다.
나이가 들수록 친화력(親和力)이 더 많이 생겨나, 친구 네트워크가 더욱 강해진다. 은퇴 후엔 집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는 한국 남성들과는 DNA가 전혀 다른 셈이다. 이런 낙천적인 성품 때문에 여성들은 남자보다 외로움을 덜 타고, 더 오래 사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 남성들은 여성들의 강한 사회 적응력을 하루 빨리 배울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남자들은 은퇴를 하면 밖에 외출하는 것을 꺼리고 대부분 집에서 TV나 신문을 보며 지낸다. 심심하다 보니 아내가 밖에 나가면 ‘어디 가느냐’, ‘언제 오느냐’ 꼬치고치 캐물으면서 아내를 귀찮게 한다. 본인이야 답답해서 그렇게 하겠지만, 갑자기 아내에게 의존하는 생활태도는 아내에게 큰 부담을 안겨줄 수 있다.
박상철 서울대 명예교수가 발표한 ‘한국의 백세인 장수보고서’를 보면, 친구를 잘 사귀고 솔직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100세까지 장수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은퇴한 후에 가급적 집에 머무르지 말고 밖에 많이 나가 친구를 사귀라는 얘기다. 친구들의 수가 많은 사람일수록 더 오래 산다는 의학연구 결과도 나와 있다.
출퇴근이 필요한 것은 현역시절 뿐만이 아니고, 은퇴 후에도 출퇴근이 필요하다. 그래야 정신건강에 좋다. 갈 데가 없으면 근처 구립 도서관이나 시립 도서관에 가서 책이라도 읽을 일이다. 현역시절에 쌓은 지식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가 자원봉사 활동을 하는 것은 더 좋다.
일단 밖에 나가 활동하다 보면, 그동안 우리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고, 이를 통해 노년 인생의 새로운 전기(轉機)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시작이 없는데, 끝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송양민 가천대학교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 후, 83년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경제부장과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벨기에 루뱅 대학교에서 유럽학 석사, 연세대학교에서 보건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가천대학교로 옮겨 보건대학원장, 특수치료대학원장을 역임한 뒤 2024년 2월 퇴직했다. 관심 연구분야는 인구고령화, 보건정책, 경제교육 등이며, 보건ㆍ복지ㆍ노동ㆍ연금분야 연합학술단체인 사회보장학회 회장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경제기사는 돈이다』, 『30부터 준비하는 당당한 내 인생』, 『밥 돈 자유』, 『100세시대 은퇴대사전』, 『ESG 경영과 자본주의 혁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