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는 노인들의 선생이다.
글 : 이근후 /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2022-03-07
요즘 노인들에게 충고하는 많은 사람의 말 가운데는 이런 것들이 있다. “젊은 세대를 존중하고 그들의 견해를 존중하라, 조언하되, 비평하지는 마라, 미래를 열 사람은 젊은이들이다.” 이런 말에 동의하고 실천하는 노인은 별로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노인의 입장에서 보면 젊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 서툰 것을 보면 내 경험을 통해 꼭 한두 마디씩 삶의 훈수를 들고 싶어 한다. 이런 마음에도 불구하고 듣는 사람들은 지혜로 듣지 않고 고리타분한 꼰대 이야기처럼 느끼면서 듣는다. 이러니 노인이 아무리 지혜로운 이야기를 한다고 한들 그것을 받아주는 청년들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도 청년 시절에 교수 생활을 하면서 선배님들의 지혜로운 말을 그냥 해 보는 잔소리쯤으로 여긴 적이 있다. 물론 내가 철이 덜 들어서 그렇긴 하지만 지나놓고 보니 그 한마디 한마디가 지혜 그 자체다.
그런 지혜를 왜 그때는 알아듣지 못했을까 후회하면서 후학들에게 좀 더 진지하게 일러 주고 싶었지만, 청년들 역시 내가 청년 시절에 느꼈던 느낌과 별로 다름이 없다. 나는 첫 직업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출발하여 이화여대 의과대학 교수로 정년퇴임을 했으니 경험이라고는 30년 넘게 해온 교직 생활 뿐이다. 이 일생의 내 역할을 마감하면서 정년퇴임 때 기념 강연을 했는데, 한동안 무슨 이야기를 해 주어야 늙은이가 하는 통상적인 꼰대 같은 인상을 주지 않을까 여러 번 고민했다. 내가 생각해낸 정년퇴임 기념 강연의 제목은 이렇다. “지금까지 나는 여러분들의 스승이었습니다. 오늘 정년 퇴임을 맞아 오늘부터는 여러분들이 나의 선생입니다.”라는 내용이다. 이 제목은 내가 여러 번 고심 끝에 정한 제목이면서 내가 실제로 했던 경험과 미래의 염원을 담은 것이기 때문에 그냥 관행적이고 허식적인 제목이 아니었다.
나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의과대학 교수로 학생과 수련의도 교육하고, 마음이 불편해서 찾아오는 환자도 돌보고 또, 주제를 갖고 연구하는 세 가지 역할을 수행하면서 30여 년을 보냈다. 혼자 세 가지 역할을 해내자니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게 해낸 역할이 없어 후학들에게 단지 미안한 생각이 많다. 그런데, 그나마 정년 퇴임으로 교직을 떠나게 되면 교직에 있을 때보다 그 기능을 더 만족스럽게 해낼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한 일이다. 학교에 있을 때는 하나라도 더 제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정신의학적 최신 정보나, 지식을 열심히 공부하여 전달했지만 내가 학교를 떠나고 보면 그럴 기회가 많이 줄어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줄어드는 내 의학적인 최신 정보나, 자료들은 제자들이 공부해서 나에게 가르쳐 달라는 희망을 이야기 한 것이다.
이 말은 정년퇴임 이후 지금까지 실천해 오는 나의 행동이다. 내 제자들은 지속해서 최신 의학 정보나 경험을 쌓기 때문에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 틈만 있으면 나는 그런 궁금증을 제자들에게 묻는다.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그 발전 속도가 빨라 내 이해가 느린 점도 있다. 이렇든 저렇든 하나도 빠뜨리지 말아야 할 정보들이다. 이런 귀중한 정보를 나에게 알려주니 내 궁금증도 풀리고 내가 퇴임 때 기념 강연을 한 제목과도 어울린다. 나는 내 후학들이나, 제자들이, 친절하게 내 궁금증을 풀어 주는 데 대해서 무한한 감사를 느끼고 있다. 누가 이렇게 나한테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고맙고, 고마운 일이다.
우리들이 흔히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호칭은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그러나 선생님이라는 원래의 뜻은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을 두루 이루는 말”이다. 그런데 한문의 뜻을 그대로 해석해 보면 먼저 태어났다는 말이다. 선이란 먼저 또는 처음이란 뜻이고 생은 태어났다는 뜻이니 넓은 의미로 사용하자면 나보다 먼저 태어난 모든 사람은 선생이라고 존댓말로 불려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하루 빚이 무섭다고 그 하루의 경험이 나보다는 지혜를 쌓는데 귀중한 날이 되기 때문에 도처에 선생이 아닌 분이 없다.
나는 정신과 의사가 된 초기에 환자를 만나면 환자의 인격이 황폐화되어 환자들로 하여금 일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경험을 쌓으면서 정신장애인들과 밀접한 생활을 하다 보니 내 생각이 얼토당토않은 편견이었음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초기의 내 편견을 변명하자면 교과서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지금은 조현병이라고 부르는 정신분열증을 처음 발견했을 때는 “조발성 치매”란 병명을 붙였었다. 당시에 이 병을 발견한 학자들은 사춘기 전후로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인격의 황폐화를 초래하여 치매 상태에 이른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런 이후 많은 학자와 임상가들이 더 세밀하게 관찰하고 연구해본 결과 모든 조발성 치매자가 인격의 황폐화를 갖는 것은 아님을 발견했다. 말하자면 정신장애인이 앓고 있는 정신병리적인 현상은 그 개인의 정신 상태의 일부이지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치매 상태에 이루진 않는다는 것을 연구해 냈다.
내가 정신과를 공부하면서 많은 환자를 보았지만, 초기의 진단이 조발성 치매라고만 진단 할 수 있는 장애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정신장애인이 고통받는 마음의 한 부분을 제외하면 그 밖의 능력은 나보다 월등히 뛰어난 분들이 많았다. 예를 하나 들어보면 이런 일도 있었다. 음악대학에 다니는 환자 한 분이 입원했다. 불면증과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입원을 했었는데 그때 우리 병실에서는 금요일마다 금요음악회라는 이름을 붙여 봉사자를 초청하여 음악회를 열곤 했었다. 한번은 초청된 봉사자가 사정이 있어서 오시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이 음악회가 정식 음악회가 아니라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했던 터라 봉사자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미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실습 나온 의과대학 학생들에게 누가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학생이 있다면 대타로 출현을 해 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한 학생이 지원해서 금요음악회를 무사히 마쳤다.
음악회를 마치면 환자들과 둘러앉아 음악회를 활용하여 치료적으로 얼마나 환자에게 전달되었는지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음악대학에 다닌다는 그 환자의 말은 이렇다. “이번 연주자는 참 좋은 곡을 들려주셨는데 몇 번째 소절에서는 음계와 박자가 맞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정신장애자는 조발성 치매처럼 모두 황폐해져 능력이 없는 인간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내 선입관을 많이 수정하고 있던 과정이라서 그 선입관이 잘못되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를 그 학생으로부터 다시 확인 받았다.
이런 내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나에게 어떤 것이든 가르침을 주시는 분은 연령 고하를 막론하고 고마운 선생님이다. 내가 교수로 일평생을 재직했기 때문에 나만 선생이 아니다. “젊은 세대를 존중하고 그들의 견해를 존중하라, 조언하되, 비평하지는 마라, 미래를 열 사람은 젊은이들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충고를 나이 든 사람일지라도 귀 기울여 들을 만한 선생님의 말씀이다. 이런 충고들도 머리로는 이해가 되겠지만 선뜻 실행으로 옮기기는 어려운 요인들이 많다. 아마도 제일 많은 요인은 노인들에게 젊은이는 언제나 철이 덜 든 서툰 젊은이로만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되돌아 생각해보자. 우리도 그럼 나이를 지나면서 지금에 이르지 않았는가. 내가 경험한 일생의 지혜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세대를 맞아 청년들만이 경험하는 내용을 우리들이 귀 기울여 듣는다면 그 또한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왜 노인들은 자기들의 경험만을 젊은이에게 강요하고 젊은이들은 왜 노인들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을까 아마도 전달하고 소통하는 방법이 문제일 것 같다. 노인이 먼저 청년들의 미숙한 경험이지만 그들을 이해하려고 든다면 청년인들 왜 노인의 이야기를 듣지 않겠는가. 소통의 방법을 한 번쯤 생각해 보자, 실천해보자 실천하는 것만큼 나에겐 발전이 있을 것이다.
이근후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이자 정신과 전문의로 50년간 환자를 돌보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퇴임 후 아내와 함께 사단법인 가족아카데미아를 설립하여 청소년 성 상담, 부모 교육, 노년을 위한 생애 준비 교육 등의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76세의 나이에 고려사이버대학 문화학과를 최고령으로 수석 졸업하면서 세간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주요 저서로는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싶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