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확행보다 소확성이 좋다
글 : 2022-03-02
코로나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요즘 내 주변에는 무력감이 든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지난 주에 만난 친구 A도 코로나 시국에 직장 다니는 후배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은퇴자도 힘들긴 마찬가지라는 이야기 끝에 이렇게 말했다.
“은퇴하고 나서 처음에는 좋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 일도 안 하고 사는 것 같아서 죄의식마저 들 정도야.”
나는 “에이, 무슨 죄의식씩이나? 그리고 집안일도 일이고, 친구 만나는 일도 일 아닌가?” 라면서 친구를 위로했지만, 친구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잘 알 것 같았다. 세상은 어수선한 데 시간은 빨리 가고, 난 뭘 하고 있나? 이런 마음이 드는 걸 거다. 한마디로 ‘성취감’을 느끼고 싶다는 말일 것이다.
현역에 있을 때는 성취감에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직장 일을 한다고 해서 아, 내가 오늘도 내가 뜻하거나 목적한 바를 이뤘구나, 라는 식의 대단한 성취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일 같지도 않은 자잘한 잡무에 시달린다는 생각 때문에 힘이 빠진 적도 많았다. 하지만 그때는 내가 해내야 할 일이 뭔지 분명히 알고 있었고, 때로는 주말이나 휴일도 없이 일에 몰두하다 보면 그것만으로도 너무 바쁘고 피곤해서 성취감에 대한 고민에 빠질 여유조차 없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성취지향적 인간’이라는 평을 들으면 인간미가 없다는 말처럼 들려서 기분이 좋지 않았고, 그보다는 ‘관계지향적 인간’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했던 기억도 난다.
그런데 은퇴 후에 집안일이나 친구 만나는 일 외에는 특별한 일 없이, 뚜렷한 목적도 성취도 없는 하루하루를 보낸다고 생각하면 ‘성취감’의 문제가 새삼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성취감은 행복의 중요한 요소다. 영국의 일간지 <더타임즈>가 ‘가장 행복한 사람’에 대한 정의를 현상 공모했을 때 1위, 2위, 3위는 다음과 같다.
1위. 모래성을 막 완성한 아이
2위. 아기의 목욕을 다 시키고 난 어머니
3위. 세밀한 공예품 장을 다 짜고 나서 휘파람을 부는 목공
어떤가. 위의 세 사람이 느끼는 행복감이 모두 성취감과 관련된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대단한 성공을 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 대단히 ‘능력 있고 좋은 사람’처럼 보이는 것도 아니지만, 작고 소소한 일에 힘껏 몰입하고 즐기며 뭔가를 완성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해냈을 때의 그 만족감이 행복인 것이다.
게다가 내 친구 A처럼 은퇴한 후에도 성취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편안하게 맛있는 것 먹고, 직접적인 즐거움을 주는 활동을 하는 등의 ‘쾌락적’ 행복만으로는 충분히 행복하지 않고, 뭔가 ‘의미’가 있는 삶이어야 더 행복해진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는 A도 동의한 부분이다.
“이 나이에 뭔가 성취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게 욕심일까, 싶으면서도 아무 일 하지 않고 지내는 게 재미도 없고 자꾸 뒤처지는 것 같아. 이상한 건 몸은 편한 데도 건강이 안 좋아지는 기분이야...”
은퇴한 후에까지 ‘의미나 성취감’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쾌락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 중에 어느 쪽이 더 건강할까? 얼핏 생각하면 쾌락적 행복을 추구하는 쪽이 더 건강할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행복과 건강에 관한 연구결과들에 의하면 쾌락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보다 의미나 성취감을 통해 행복을 느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더 건강한 것으로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쾌락적 행복과 의미를 추구하는 행복이 면역과 유전자 발현에 미치는 영향을 비교 연구한 스티브 코울(Steve Cole) 교수와 바바라 프레드릭슨(Barbara Fredrickson) 연구팀은 의미 있는 행복을 추구하는 집단이 쾌락적 행복을 추구하는 집단보다 면역과 유전자 발현에서 더 긍정적이라는 결론을 냈다. 그 이유는 인생에 목적이 있다는 것, 의미나 성취감을 추구한다는 것이 ‘살아 있음’의 기쁨을 주고 면역 시스템을 강화시켜서 질병과 싸우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쾌락적 행복은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쾌락적 행복 또한 정서적인 행복감을 주는 건 사실이지만, 놀랍게도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스트레스 상황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과 유사할 정도로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내 친구 A처럼, 인생의 의미나 성취감을 중요시하는 사람은 비록 의식하지는 못할지언정 본능적으로 건강에 더 좋은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은퇴자의 일상에서 어떻게 의미와 성취감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나는 ‘소확성’, 즉 ‘소소하지만 확실한 성취’를 통해 그 답을 찾기를 제안해 본다. 요즘 ‘소확성’은 성취할 수 없는 게 많지 않다고 여기는 MZ 세대들에게도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한때 유행했던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최신 버전인 셈이다. 요즘 MZ 세대들은 예를 들면, 아침에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팔굽혀 펴기 10개 하기, 10개의 영어 단어 외우기, 스마트폰 앱으로 요가하고 필라테스 하기 등등의 소소한 활동을 통해 작은 성취감과 기쁨을 느낀다고 한다.
은퇴자들에게도 ‘소확성’은 필요하다. 취향에 따라 무언가를 만들거나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혹은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는 등 각자 자신에게 맞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고민해보면 좋을 것이다. 비록 즉각적인 즐거움이 돌아오는 건 아니더라도 좀 더 의미 있고 장기적인 즐거움과 성취감을 주는 게 무엇일까? 고민할 필요가 있다.
나의 경우 소확성을 느끼기 위해 그날그날 한 활동을 자세히 기록해보기 시작했다. 스케줄을 적어두는 수첩 외에 다른 수첩을 마련해서 오늘 집에서 혹은 집밖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누굴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떤 글을 쓰거나 읽었는지 등등에 대해서 자세히 적으면서 오늘 이런 일이 있었구나, 오늘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그 일을 끝냈구나, 누군가에게 조그만 도움이라도 줄 수 있었구나, 라면서 작은 성취감을 느껴보는 것이다. 별 볼일 없이 지나가버리는 것 같은 하루하루에 의미를 부여하고, 작은 성취감, 작은 성공도 소중히 여기기 위함이다. 물론 대단한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오랜만에 책상을 정리했다거나 건강이 좋지 않은 선배님께 전화를 드렸다는 등의 작고 사소한 일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성취한 게 많다는 걸 느끼게 되어 기분이 좋아진다. 100세 시대를 살아가려면 성취감, 성공, 성장이라는 단어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 작고 소소한 성취감, 작지만 소중한 성공, 미미하지만 의미 있는 성장을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