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 출신 김영균 화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예술활동엔 은퇴가 없어요."
글 : 이필재 / 인물 스토리텔러 2022-02-28
“훗날 스스로 자신 있어 할 만한 취미생활을 인생 1막에 시작해야 합니다. 골프, 등산도 좋지만 자신의 작품이 남는 예술 취미를 들여 보세요. 95세의 어느 어른처럼 후회하지 않으려면 경제적 여유가 있을 때 시작하는 게 중요해요.”
올해 초 <은퇴자의 예술 따라가기>라는 책을 낸 김영균 작가는 “행복은 물질적 풍요로움에서 오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책엔 ‘자신만의 행복을 찾기 위한 늦깎이 예술 경험자의 제언’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그가 말한 ‘95세 어른’은 오명철 전 동아일보 전문기자가 십여 년 전 칼럼에서 소개한 ‘95세 어른의 수기’라는 시의 화자이다.
“나는 젊었을 때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덕에 63세에 당당한 은퇴를 할 수 있었죠. 그 후 95번째 생일에 후회의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모릅니다. 퇴직할 때 30년 더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하고 싶었던 어학 공부를 시작하려 합니다.”
김 작가는 금융감독원 등에서 관리감독 업무를 담당했다. 정년퇴직 후 민간기업에서 상임감사, 사외이사를 지냈다. 63세에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서예도 입문했고, 카메라도 들었다. 햇수로 14년 동안 네 차례의 개인전을 비롯해 공모전, 그룹전, 동호회전 등 48번의 전시회에 참가했다. 금감원과 통일원 회의실엔 그가 그린 그림이 걸려 있다. 명함도 수채화가, 서예가, 사진작가 3종 세트이다.
-지금의 삶에 만족하십니까?
“만족할뿐더러 행복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집 한 칸 있고 세 끼 밥 먹을 수 있으면 물질적으로는 더 이상 욕심을 부릴 필요 없어요. 무엇보다 은퇴 후 30년을 살아야 하는 시대입니다. 그 시간이 즐거워야죠.”
-예술가는 재능을 타고 나야 하지 않나요?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그림은 그립니다. 예술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예술작품을 보면 느낄 수 있고, 감동적인 음악을 듣고는 눈물을 글썽이죠. 누구나 잠재적인 예술가입니다. 나름의 감수성과 경험이 있으면 시도할 수 있어요. 지적 능력, 교육 수준과도 무관합니다. 배우려는 노력이야 필요하죠.”
올해 일흔다섯인 그는 지금도 약속 장소에서 재즈가 흘러나오면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했다. 또 보통사람도 아파트 거실에 그림 한 점은 거는데 행복에 대한 욕구를 채우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일을 멋지게 끝냈을 때 그 결과물에 대해 예술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감수성을 발휘해 잘 해낸 일은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그가 어머니 이야기를 했다. 바느질 솜씨가 좋았던 어머니는 한국전쟁으로 피난살이를 할 때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삯바느질을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그에게 틈틈이 학용품을 사줬다. 어머니는 헝겊 조각을 모아 이불보도 만들었다. 알록달록한 조각 이불보였다. 어머니가 만든 알록달록 베개 마구리를 보고 이웃 여인네들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그는 비록 프로 화가만큼은 못 그리지만 그림을 즐길 수는 있고 프로 못지않게 그림에 대한 지식도 쌓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존 러스킨은 “애정과 기술이 함께할 때 걸작이 탄생한다”고 말했다.
"열심히 배우다 보면 잘 그려서 큰 상을 받고 싶은 욕심이 생깁니다. 그 유혹에서 벗어나 지속적으로 즐기기 위해 언젠가부터 남과 비교를 하지 않기로 작심을 했어요."
-수채화의 매력이 뭔가요?
“산뜻한 감성을 담을 수 있습니다. 수채화는 표현의 기법이 자유롭지만 면밀한 계획을 세워 채색해야 합니다. 색칠하고 나서 마르면 그 위에 또 칠하는가(wet on dry) 하면 칠이 마르기 전에 그 위에 덧칠을(wet in wet) 하기도 하죠. 또 유화처럼 수정은 거의 못하지만, 비용이 유화의 4분의 1 수준입니다. 퇴직자가 시도할 만한 경제적인 취미죠.”
-서예를 하면 뭐가 좋습니까?
“한자 서예는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하지만, 글씨로 그려내는 재미가 있어요. 한자 서예는 의상미(意象美)를 추구하고, 서체도 다양하죠. 연구할 게 많아 신중년이 취미로 삼을 만합니다.”
입체파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 피카소는 한자 서법에 끌려 추상화에 응용했고 “만일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먼저 서법가가 되고 그 후에 화가가 되었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폰카로 사진 잘 찍는 팁 좀 주시죠.
“폰카는 초점이 자동 조절되고 흔들림 방지 기능이 있지만 그래도 적당한 거리에서 정지 상태서 찍어야 선명한 화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진을 인물, 풍경 등 장르별로 저장해 두면 폰에서 편리하게 찾을 수 있죠.”
그는 단국대·동서울대의 평생교육원, 수원 서예박물관 등에서 그림 등을 배웠다. 당초엔 퇴직 후 IPO 전문가나 펀드매니저가 되려 했었다고 말했다.
-왜 그 길로 나가시지 않았나요?
“그런 일은 재미가 없잖아요? 또 당신네 회사는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선 안 된다 지적질 하는 게 내키지 않았습니다. 문화심리학적으로 재미있을 때 가장 행복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는 과거 인생 1막의 이력과 그 시절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면 혁명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창조하는 예술을 취미로 삼아 예술 덕후 소리를 듣게 되면 꼰대와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책도 내셨는데 관련 강의는 안 하시나요?
“4월에 도서관협회에 가서 합니다. 찾는 곳이 있으면 재능기부 강의를 할 용의도 있습니다.”
-2막에 책을 써 보라고 권하시겠습니까?
“꼭 해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인생을 정리하는 의미도 있죠. 책을 줄 때 맛보는 보람도 있습니다.”
-예술적 취미생활을 언제 시작하는 게 좋습니까?
“30대 말 늦어도 40대 초반에 조기 은퇴하는 게 목표인 파이어(FIRE)족도 있지만, 마흔 정도가 적당합니다.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나이죠. 저는 많이 늦은 셈이에요. 은퇴 후 재무설계도 미리들 하잖아요?”
그는 퇴직 후 단국대 요리학교에서 1년 간 요리를 배웠다.
“요리는 과학이자 하나의 예술입니다. 생일 등 특별한 날이면 집에서 파스타를 만듭니다. 평소엔 아내의 영역을 침범하는 거 같아서 안 해요. 자랑질로 느껴지는지 아내도 탐탁지 않아 해요.”
-친구들은 많은 편입니까? 인생 2막에 친구 관계는 어떻게 유지하는 게 좋다고 보나요?
“70~80명의 친구들과 주기적으로 만납니다. 되도록 자주 만나려 노력해요. 학창 시절 친구, 사회에서 만난 친구들이죠. 어릴적 친구들이 아무래도 더 정겹죠.”
-인생의 변곡점이 된 사건이 뭔가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입니다. 반장이었는데 반 청소 상태를 점검하지 않고 운동장에서 코끼리 놀이를 하며 놀았어요. 이 날 한 시간 이상 벌을 섰고 담임선생님에게서 이런 훈시를 들었습니다. ‘하던 일을 꾸준히 성실히 하고 그때그때 기분에 좌우되면 안 된다.’"
-시니어들이 대접 못 받는 사회가 되어갑니다.
"집 앞 은행 지점이 문 닫는다는 소식에 어르신들이 발을 동동 구릅니다. 자동화도 됐겠다 경비를 절감하려 점포를 줄이는 거겠죠. 열심히 일해 우리 사회를 이만큼 발전시킨 분들입니다. 사회 변화에 적응하려 이분들이 다시 공부를 해야 하나요? 당사자들도 노력해야겠지만 기술 변화로 노인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국가가 정책과 제도로 뒷받침해야 합니다."
-버킷 리스트는 뭔가요?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마을길에 일년생 화초를 심고 싶습니다."
-묘비명에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살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신세진 것을 갚으려 했다.”
-인생 2막을 앞둔 사람들에게 어떤 조언을 주시고 싶습니까?
“노인을 죽이는 최악의 암살자는 은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예술 활동엔 은퇴가 없어요. 그래서 오늘도 여조삭비(如鳥數飛)-새가 날기 위해 날갯짓을 계속 하듯 열심히 그리고, 쓰고, 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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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재 인물 스토리텔러
30여년 국내ㆍ외 저명한 인사를 인터뷰한, 우리나라 최고의 인터뷰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연세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다. 그 후 《중앙일보》 편집국 기자, 《이코노미스트》 편집장, 《월간중앙》 경제 전문 기자, 《이코노미스트》《포브스코리아》 경영 전문 기자 겸 부국장, 《더스쿠프》 인터뷰 대기자로 일했다. 연세대 언론홍보영상학부 초빙교수를 지냈고, 한국잡지교육원, 한국언론재단 미디어교육원, MBC저널리즘스쿨 등에서 가르친다. 저서에 『진보적 노인』, 『운명의 한 문장』, 『CEO 브랜딩』, 『한국의 CEO는 무엇으로 사는가(공저)』, 『아홉 경영구루에게 묻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