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처럼 되기 싫었어요
글 : 김병수 /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前 서울아산병원 교수 2021-04-02
방안퉁수! 밖에서는 제대로 할 말을 못 하고 집에서만 큰소리치는 사람을 두고 일컫는다. 상담하다 보면 아버지를 닮기 싫다, 아버지처럼 되기 싫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한 내담자가 자신의 아버지를 ‘방안퉁수’라고 했다. 자신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그렇게 불렀다면서. 자신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끔찍이 싫었다고 했다. ‘나는 절대로 아버지처럼 되지 않을 거야!’라는 마음을 품고 친구 같은 아빠, 믿음직한 남편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모습이 아버지와 꼭 닮은 것을 보고 괴로워했다. 거래처나 직장 상사, 동료들에게 스트레스를 받거나 회사 일이 꼬이면 퇴근해서 아내와 다투거나 자녀에게 화를 냈다. 이런 일이 잦아지자 ‘회사에서 고생하며 일하는 것도 아버지처럼 되기 싫어서였는데… 지금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고, 자괴감에 빠졌다.
예전에 상담했던 부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평소 점잖던 남편이 잠꼬대로 고함을 지르며 욕을 해서, 아내가 깜짝 놀라 남편을 병원에 데리고 왔다. 남편에게 꿈 기억을 물었다. 자신을 무시하는 직장 상사가 꿈에 나왔고 그 사람과 욕을 하고 싸웠다고 했다. 회사에서는 “좋은게 좋은 거다.” 하면서 참고 지냈지만 속으로는 그 상사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녔다고 했다. 계급장 떼고 한 번 붙어 보고 싶었는데 꿈에서라도 소원 풀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아내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화가 나도 집 밖에서는 찍소리 못 하고 속으로 꾹꾹 누르고 살아가는 일. 그건 대한민국 직장인이라면 남, 여,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그럴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달라지고, 문화가 변해도 마찬가지. 우리는 모두 가면을 쓰고 산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라는 무대에서 역할 연기를 하는 것이 인생이다. 생존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이렇게 살다 보면 솔직한 감정을 억누르게 되고 그것이 엉뚱한 사람에게 짜증과 화로 튀어나오게 된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란 나약한 존재의 숙명이다.자기감정에 대한 자각이 먼저다. 감정에 대한 알아차림이다. 가슴에서 불이 올라오고, 뚜껑이 열릴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아, 내가 화가 났구나~’하고 자기감정을 알아차리는 것. 이것만 잘해도 분노로 인해 낭패 볼 일이 확 준다. 그다음에 감정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고질적인 사례는 자신이 부적절하게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변하지도 않고 주변 사람이 입게 되는 상처도 크다.
분노의 숨은 뜻을 잘못 이해하는 게 문제이지, 분노 그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이 감정은 어떤 의미일까?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고 의식화하는 훈련이 중요하다. 감정을 발산하기 전에 “감정의 숨은 뜻은 무엇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감정에 대한 자각이 늘면 조절도 쉬워진다. 자연스러운 감정과 친해지면서 받아들이기도 편해지고, 표현도 부드러워진다.
“아버지처럼 되기 싫었다!”고 외쳤던 이의 진짜 고통은 가족에게 화낼 때마다 아버지처럼 변해가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요즘 아빠들은 어린 자녀와 친구처럼 지내고 싶어한다. 하루 종일 회사에서 시달려도 퇴근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자녀와 놀아 주고 짧은 시간만이라도 대화를 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 “아들과 친해지고 싶어서 애를 많이 씁니다.” 라고 말하는 이에게 자기 나름의 이유가 있느냐고 물으면 “우리 아버지는 너무 바빠서 내가 어릴 때 제대로 대화도 못 했어요.” 라거나 “어릴 때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나는 아버지의 정을 몰라요. 내 아들이 나처럼 느끼지 않기를 바라요.”라고 한다. “어릴 때 아버지가 너무 엄격하고 무서워서 나는 친구 같은 아빠가 되어야지.”라는 이야기도 흔히 듣는다. 그런데 과연 아들이 아버지와 완전히 다른 모습일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본다. 아들은 분명히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아버지를 (외양뿐만 아니라) 성격이나 행동에서도 점점 닮아가기 마련이다. 이런 변화를 거스르기도 어렵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피는 못 속인다고 하는데, 이 말도 사실이다. 나이가 들수록 유전자가 미치는 영향력도 커져서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 모습을 점점 더 닮아 간다. 생물학적 결정론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우성학을 함부로 옹호하려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뿌리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거다.
자신의 근원적 역사를 부정하면 할수록, 마음의 고통은 커진다. 자신의 아버지를 부정하기보다는 아버지의 역사를 이해하는 게 먼저다. 당신이 살아낸 질곡 같았던 삶을 알아가는 게 먼저다. 아버지가 태어났을 때의 현실과 그 속에서 어떻게 성장했으며, 아버지의 아버지는 아버지를 어떻게 대했고, 아버지의 형제와는 어떤 관계였는지, 학창 시절과 졸업 후 사회생활을 하면서 당신은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럴 때마다 그의 마음이 어떻게 변해갔을지 추적해 보는 거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을 때 경제적으로 넉넉했는지 자식이 태어났을 때 불안하지는 않았는지, 가장으로 어떤 마음이 들었을지 비록 지금 당신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는 없어도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아버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는 거다. 그렇게 아버지가 살아온 인생 궤적을 따라가 보는 거다. 그리고 아버지가 살아내야만 했던 인생을 ‘지금의 나라면 당신보다 더 잘 살아낼 자신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과연 자신있게 “그렇다” 라고 할 수 있을까?
과거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자기 자신과도 좀 더 친해질 수 있다. 나의 근원을 부정하지 않게 되면 내가 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변한다. 자신의 뿌리를 싫어하면, 자기 자신도 싫어진다. 나의 아버지를 반드시 좋아할 수는 없어도, 그의 삶을 우리는 이해할 수는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자기 마음에 풀리지 않던 매듭 하나가 풀리는 느낌이 든다. 조금 더 가벼운 지금 현재를 살아낼 수 있다. “아들과 아내에게 훌륭한 아버지가 되어야만 해!” 라고 강요하듯 자신을 몰아세우기 보다는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가족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아버지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말이다.
김병수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前 서울아산병원 교수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부 교수로 근무했으며 현재는 직접 의원을 개원해 원장으로 있다. 한국정신신체의학회, 한국인지행동치료학회, 대한우울조울병학회에서 임원으로 활동했으며, 다양한 매체 출연과 강연, 칼럼 등을 통해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마흔, 마음 공부를 시작했다》,《이상한 나라의 심리학》,《감정의 온도》, 《마음의 사생활》, 《당신이라는 안정제》(공저), 《버텨낼 권리》, 《사모님 우울증》, 《흔들리지 않고 피어나는 마흔은 없다》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당신 안의 예술가를 깨워라》 《우울증의 행동활성화 치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