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진 대표 작가 구본창 "나는 매일 서른여덟이다" |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한국 현대사진 대표 작가 구본창 "나는 매일 서른여덟이다"

글 : 이필재 / 인물 스토리텔러 2020-03-31

"만년 서른여덟이라고 착각하고 삽니다. 지난해까지 대학 강단에 섰지만, 대학원생 보면 어떨 땐 꼭 형 같아요. 한번은 약 타러 병원에 갔다 줄을 섰는데 간호사가 '아버님'이라고 해 깜짝 놀랐어요."

고희를 바라보는 사진가 구본창은 "항상 새롭게 시작한다는 자세로 일한다"고 말했다. 그의 초심이다.
"상업적인 일을 맡아도 내 작업 하듯 이 일을 어떻게 해야 고객이 만족해할까 고심을 하죠."




그는 요즘 1주기를 앞둔 고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사진전 준비를 돕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실제 나이가 서른여덟이었을 땐 꼭 30년 전이다. 고희를 바라보는 그가 작가로 발돋움해 서울 청담동에서 처음으로 큰 전시회를 열었을 무렵이다.

올해 들어 그는 두 번의 전시회를 열었다. 그중 한 전시회는 뉴욕서 했다. 오는 5월엔 시드니에서 전시회를 연다. 한국 현대사진 대표 작가로 통하는 그는 "오랫동안 현역으로 활동하는 건 왕성한 호기심 덕분"이라고 말했다.
"다른 작가들의 작업은 물론이고 평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관심이 많아요. 청소기 회사 다이슨을 창업한 제임스 다이슨은 어떻게 저렇게 성능이 뛰어나고 아름다운 청소기를 만들었는지, 유니클로의 속옷은 어떻게 저런 탁월한 기능성을 갖췄는지 궁금해요. 이런 관심과 호기심이, 기복은 있었지만, 꾸준히 작업을 하게 만듭니다."

핸드폰이 좋아져 조명이 없는 어두운 곳에선 핸드폰 사진이 더 잘 나오는 시대다. 특별한 장소, 특수한 상황에선 누구나 폰카로도 멋진 사진을 남길 수 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좋은 작품을 남기려면 삶에 대한 생각이 웅숭깊어야 한다.


그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렇듯이, 자신도 마치 컴퓨터의 폴더처럼 다양한 테마의 수십 가지 박스를 비장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그중 한 개를 열어 집중적으로 매달려 하나의 작품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작업을 하지 않을 땐 재미있는 사진을 수집하고 관심 있는 신문 기사를 스크랩한다. 다큐멘터리, 세계의 기행 프로그램, 디스커버리 채널도 많이 본다. 또 길에서 수시로 폰카로 사진을 찍는다. 이런 것들이 다 그에겐 영감의 원천이다. 그처럼 스튜디오를 하는 후배들 중엔 문 닫은 지 10년 된 그의 제자도 있다. 지속적으로 전시회를 하는 그에게 이들은 "아직도 무슨 관심이 그렇게 많으냐"고 묻는다.


인터뷰 날 만난 그는 장발에 청재킷 차림이었다. 연두색 셔츠를 바지 위로 내서 입고 있었다. 젊게 사는 비결이 무엇인지 물었다.
"젊은 사람들이 무엇에 관심 있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살핍니다. 새로운 디지털 디바이스도 가능하면 직접 경험하고 즐기려 노력해요."

그는 경영학도 출신이다. 고 김우중 대우그룹 창업주의 연세대 상대 후배이다. 대학 졸업 후 대우그룹의 모태 격인 대우실업에 들어갔지만, 해외 주재원으로 나갈 수 있는 작은 회사로 옮겼다. 독일 주재원으로 나간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함부르크조형미술대학에 입학했다. 오일쇼크로 경영이 어려워진 회사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이 대학에서 그는 사진디자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독일로 떠난 건 학비가 거의 안 들었고 학교 때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 함부르크에 출장 온 선배가 "인생에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고 격려한 것도 그가 뒤늦게 사진을 공부하는 데 힘이 됐다.

지하철 타고 학교 다니는 동안 때로는 돈 벌어 차 샀다는 고국의 친구들 이야기가 떠올라 고민하기도 했다. 돌아와 2~3년 대학 시간강사를 하며 버틸 땐 경제적으로 궁핍해 독일로 돌아갈 생각도 했었다. 독일 유학파인 그는 당시 국내 사진계에선 비주류였고 인맥도 없었다. 고교 졸업 당시 그의 미대 진학에 반대했던 아버지는 그 시절 돈 몇 만 원 꾸러 가면 "그러게, 멀쩡하게 다니던 대우실업 때려치우고 왜 사진 쟁이가 되었느냐"고 타박을 했다고 한다. 훗날 그가 사진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자 치매가 아버지를 덮쳤다. 어머니는 그가 유학 중에 세상을 떠나셨다.

사진가지만 경제 원칙에 충실해

작품 활동을 하면서 그는 경영학도 출신답게 경제 원칙에 충실했다. 단적으로 사진 장비에 대한 투자는 최소화하고 최대의 투자 효과를 노렸다. 과욕을 부리지 않았고 낭비도 하지 않았다. 그 덕에 사진가로서는 드물게 자기 건물을 지었다. 그는 또 예술을 하지만 신용을 중시하고 약속도 잘 지켰다. 송상(松商·개성상인)으로 유명한 개성 출신이었던 부모들이 어려서부터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지 마라"고 훈계한 덕이기도 하다.

유학파 사진가가 드물던 시절 그는 사진학과에 대한 세간의 평판을 바꾸는 데도 기여했다고 한다. 구본창 같은 명문대 출신도 가는 학과란 인식이 학부모들 사이에 생긴 것이다.



그의 작품을 관류하는 키워드는 한국적 정서, 시간의 궤적, 그가 발견한 피사체의 감춰진 매력 같은 것들이다. 그는 '백자' 연작과 '비누' 연작으로 명성을 얻었다. 문양도 빛깔도 빼어난 청자에 너나없이 주목하던 시절 그는 박물관을 순회하며 수더분한 백자를 증명사진 찍듯 찍었다. 백자는 본래 다소곳하고 완벽한 대칭도 아니다. 박물관 카탈로그 속 백자와 달리 그의 백자는 초상화를 연상시킨다. 포커스가 나가게 찍어 뽀시시하다. 핑크빛 백자도 있다. 본래 초벌로 구워 유약을 바르기 전의 자기가 핑크빛이다. 그는 조선 여성의 살결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일반 백자는 선비, 핑크빛 백자는 조선 여성인 셈이다.

비누 연작은 조석으로 쓰다 보면 닳고 닳아 자투리가 되는 비누에 대한 애틋함을 담았다. 그는 일상에 남은 세월의 흔적을 기록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 시절 화우회(미술반)를 했다. 경영학과 동기로 연상극우회(연세대 상대 연극반)를 했던 영화감독 배창호를 위해 연극 포스터를 그려주고 초대장도 만들어줬다. 그 시절엔 그러나 미술에 재능이 있다는 소리를 못 들었다고 한다. 유학 시절 초엔 그냥 비주얼 아트를 하고 싶었다. 그때 들은 사진 수업 때 교수에게서 칭찬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때마침 친해진 독일 친구가 사진을 잘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사진을 전공했다. 지금도 교류하는 독일 친구는 정작 일찍 결혼해 호구지책으로 그래픽 디자이너가 됐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천재성은 없다고 말했다.

좋은 작품엔 작가의 영혼·땀 서려 있어

"그러나 작가가 되려면 재능 내지는 작가로서의 남다른 감성은 있어야 합니다. 운명처럼 기회를 잡아야 하고, 무엇보다 10년 넘게 꾸준히 노력해야 합니다. 돈 많이 준다고 옮기면 결국 작가로서 꽃피울 수 없어요."

그는 피사체의 물성과 질감을 중시한다. 찍으려는 대상의 표면을 무시할 순 없지만, 껍데기와도 같은 표면을 벗겨냈을 때 드러나는 사물의 본질을 사진에 담으려 한다.
"표면은, 말하자면 화려하게 화장한 모델의 화장발 같은 거예요. 조명과 찍을 때의 환경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표면 뒤 감춰진 본질이 모습을 드러내죠. 그 순간을 60분의 1초, 125분의 1초에 포착하는 겁니다."

그는 좋은 작품엔 작가의 영혼과 더불어 그가 흘린 땀이 서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만족하는 인생이 행복하고 행복해지는 게 곧 인생의 성공"이라고 주장했다.
"알차게 살았고, 외람되지만 다 이루었다고 자부합니다. 실은 독일 유학 시절 나에게 예술적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이미 꿈은 이루어졌어요.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만으로도 그때 너무 행복했어요. 만일 학부 전공을 살려 대우실업을 계속 다녔다면 원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모범적인 직장생활을 했겠죠. 이제 내가 이룬 걸 사회와 후배들에게 환원해 인생 대차대조표의 차변과 대변을 맞추려 합니다."

인생 2막에 취미로 사진에 입문한 사람들에게는 몰려다니지 말고 혼자 있는 시간을 더 많이 확보하라고 조언했다.
"여행은 함께하더라도 촬영은 따로 하는 게 좋습니다. 다른 사람과 찍으면 집중이 안 돼요. 출사 마치고 함께 어울려 한 잔 하는 건 좋지만, 작업은 나 홀로 하는 게 좋습니다."

그는 "같이 다니면 비슷한 사진을 찍게 마련이고 남이 찍는 걸 답습하면 작가로 성장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유학 시절 독일에 6년 산 그는 취소 연락 없이 예약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노쇼'는 독일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영화관에서 엔딩 크레디트 자막이 올라가기도 전 서둘러 일어서는 우리나라 관객들을 보고 한 일본인이 기겁을 하더라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음악회가 끝났을 때 차를 빼겠다고 우르르 일어나는 모습도 눈살이 찌푸려진다고 했다.
"연주회장에서 늦게 도착한 관객을 몇 번에 걸쳐 들여보내는 것도 거슬립니다. 비행기 비즈니스석에 되는대로 벗어 놓은 슬리퍼와 바닥에 굴러다니는 담요, 백화점 출입문에서 뒷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매너는 우리도 좀 고쳤으면 좋겠어요. 뷔페 식당에서 남긴 음식, 한 사람이 가도 네 사람이 갈 때와 똑같은 양의 식당 반찬은 곧바로 음식물 쓰레기가 됩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으니 시니어부터 좀 달라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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