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문제로 이혼까지? |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공간 문제로 이혼까지?

글 : 한혜경 / 작가, 前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2019-10-08

엊그제 친구 두 명을 만나서 수다를 떨었다. 수다에도 엄연히 주제는 있는 법. 이날의 주제는 '은퇴와 공간 문제'였다. 공교롭게도 세 명 모두 본인 혹은 남편의 은퇴 후에 생긴 집안의 공간 재배치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것이다. 연구원이었던 친구 A의 남편은 은퇴 직후에 책, 논문, 자료 등을 포함한 짐을 엄청나게 많이 집으로 가져왔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빠듯하던 공간에 방 하나도 모자라 다른 방까지 쌓아 놓은 '잡동사니(A의 표현)'를 보며 놀라서 입을 열지 못하는 친구와 아이들에게 그 남편은 꿈이라도 꾸는 듯한, 아주 낭만적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고 한다. 


"그동안 못다 한 연구를 이제부터라도 마음껏 하려구..." 


A는 입까지 삐죽이며 말했다.


"얘들아 생각해 봐. 솔직히, 그동안 못한 연구를 이제라고 할 수 있겠니? 다 때가 있는 거지. 사실 기러기 생활하던 남편이 집으로 돌아온 것 자체가 나한테는 엄청난 부담이거든. 그것도 모르고 온갖 잡동사니까지 잔뜩 싸 가지고 들어오는 건 뭐니? 온 집안이 꽉 차서 숨을 쉴 수가 없어. 애들은 애들대로 이참에 자기들이 독립하겠다고 난리고... 글쎄,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니?"




친구 B가 말했다.


"그래도, 너희 집은 방 하나만 문제잖아. 난 도대체 집에 있을 데가 없어."


부부 둘만 사는 넓은 집에 있을 데가 없다니, 무슨 말인가, 궁금해하는 우리에게 B가 설명했다.


"남편이 은퇴 후에 이것저것 배우고 열심히 사는 건 좋은데 40평 아파트를 혼자 다 쓰면서 어질러 놓는다니까. 한때는 목공예를 한다고 온 집안을 어질러 놓더니 요즘엔 열대어를 키운다며 거실에다 커다란 어항을 갖다 놓고 난리를 피우는데 너무 정신 사나워서 집에 있을 수가 없어. 열대어니 뭐니 꼴도 보기 싫어서 방안에만 있다 보면 감옥에 갇힌 것 같고... 돈만 있으면 이참에 오피스텔이라도 얻어서 내 공간을 마련하고 싶어."


B는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이 나이에 이게 웬일이니? 있을 데가 없어서 이렇게 고민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어. 이혼이라도 하고 싶다니까."

'공간 문제로 이혼까지?' 싶기도 했지만, 친구들 이야기를 백 퍼센트 이해할 수 있었다. 어느 시대에나, 나이 들어서도,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공간'을 갖는 것은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자들만 은퇴 후 공간을 둘러싼 고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전에 인터뷰했던 남성 은퇴자들도 비슷한 내용을 하소연했었다. 집안에 내 공간이 없다, 아내나 아이들은 다 자기 방이 있는데 나만 방이 없다, 남의 집에 얹혀사는 것 같다, 거실에 앉아 있는 것도 눈치가 보인다, 소외감이 느껴진다... 평생 가족을 위해 고생했는데, 내 쉴 곳 하나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인생 헛산 기분이다, 허무하고 슬퍼진다... 오피스텔이라도 얻어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비슷했다.




은퇴하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진다. 직장에 나가지 않으니, 매일 나갈 곳이 없으니 당연한 일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꼭 그것만은 아니다. 갑자기 집이 좋아지는 것이다. 나도 내가 이렇게 집을 좋아하는지 처음 알았다. 젊었을 때는 집에 있으면 일도 안되는 것 같고, 뭔가 뒤처지는 것 같기도 해서 노상 밖에 나가서 일하고 책도 밖에서 읽었다. 힘이 남아돌아서 그렇게 밖으로 싸돌아다녔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일종의 반작용일까? 이젠 웬만하면 돌아다니고 싶지가 않다. 한때는 젊은 사람들처럼 카페에서 원고를 쓰거나 고치는 일도 해본 적이 있건만 지금은 밖에 나갔다가도 어서 빨리 집에 돌아오고 싶어진다. 편한 옷 입고 집에 있는 시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은퇴 후 각자 자기만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도 내 경우는 좀 나은 편이다. 일찌감치 나의 능력과 한계를 간파했기에 상당한 양의 책과 자료를 모두 다 정리했고, 꼭 필요한 책이나 자료는 은퇴 전부터 미리미리 집에다 날라 놓았다. 남편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열대어를 키우거나 목공예를 하는 등의 취미나 열정, 손재주 그 어느 것도 없는지라 공간을 차지할 만한 일을 애초에 벌이지 않는다. 최근에 고등학교 'OB 합창단'에 들어갔지만, 자신이 맡은 부분을 연습하기 위한 ‘입’과 악보를 놓을 공간만 있으면 되니 큰 문제가 없다. 나는 오래전부터 식탁 한쪽에 노트북을 놓아두고 원고를 쓰다가 집안일도 하며 그렇게 지내왔다.


그런데도 갈등은 있다. 처음에 이사했을 때부터 책상과 책꽂이를 놓아둔, 일명 서재라고 부르는 작은 방을 ‘남편 방’이라고 지정해 주었는데도 남편은 도대체 그 방에는 잘 들어가지 않고, 내가 일하는 식탁이 보이는 거실 소파에 주로 앉아 있는 것이다. 소파에 앉아서 TV도 보고, 노래 연습도 하고, 가끔 영어 공부도 한다. 결국 집안의 다른 공간은 쓰지 않는 채 두 명이 거실과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남편이 잠옷 바람으로 소파에 앉아서 ‘점심은 언제 먹나?’ ‘간식 안 주나?’ 기다리는 모습이 영락없이 ‘공포의 거실남’이자 ‘종간나’(종일 간식까지 챙겨줘야 하는) 같다. 남편은 남편대로 식탁을 차지하고 앉아 일에 몰두하고 있는 내가 못마땅한 모양이다. "왜 책상을 놔두고 '신성한' 식탁에서 일하냐?"고 다그친다. 그때마다 난 "책상보다 여기가 좋다. 그 책상은 당신 것이지 않나?" 라고 우긴다. 그러다가 식사 때가 되면 남편의 잔소리를 피해 식탁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책을 부랴부랴 치우면서 눈치를 본다.





물론 가끔은 좋을 때도 있다. 카페에 앉아 있는 것처럼 심심치 않고 그때그때 필요한 정보도 주고받고 적당한 백색 소음이 뇌를 자극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건 기분이 좋을 때의 이야기다. 뭔가 의견이 맞지 않거나 화가 났을 때, 좁은 공간에 함께 있다 보면 적개심도 높아지기 마련이다. 별것 아닌 일에도 서로 눈을 흘기며 언성을 높이면서 큰 싸움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특히 정치 이야기 같은 예민한 화제는 절대 피해야 한다.


혹시 내가 이혼을 한다면 적어도 50%는 공간 문제 때문일 확률이 높다. 그러므로 이혼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각자 외출 횟수를 좀 더 늘이거나 외출 시간을 엇갈리게 조정하거나 하루빨리 공간을 재배치하여 각자의 공간에 머무는 시간을 늘릴 필요가 있다. 마침 11월 중순에 이사 계획이 있다. 벌써 공간을 둘러싼 치열한 심리전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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