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원했던 파이어족, 되고 보니 현실은 달라 |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그렇게 원했던 파이어족, 되고 보니 현실은 달라

글 : 한혜경 / 작가, 前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2022-12-30



40대에 은퇴했다는 ‘파이어족’을 만났다. 한 5년 전쯤부터인가, 어느 정도 돈을 모은 후 조기 은퇴해서 하고 싶은 일 하며 삶을 즐긴다는 ‘파이어(FIRE)’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실제로 파이어를 실천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건 처음이다.


은퇴 후 근황을 묻는 내게 그는 이 말부터 했다.

“역시 이론과 현실은 다르더군요.”


그는 자신이 MBTI 유형 중 INTJ라면서 매사에 계획적이고 용의주도하고 내향적이기까지 해서 일찍 은퇴해도 외롭지 않게 잘 지낼 수 있는 타입이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하지만 은퇴 후 의 삶은 생각처럼 굴러가지 않았다. 예상과 가장 달랐던 건 L씨 스스로 ‘이 나이에 이렇게 놀아도 되나?’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는 점이라고 했다.


내가 물었다.

“아니, 왜요? 돈 걱정 없는 40대 중반의 파이어족이라면, 하고 싶은 일 하며 인생을 즐긴다 한들 뭐라고 할 사람도 없을 테고, 노는 일에 스스로 당당해도 되지 않나요?”




L씨가 대답했다.

“일을 그만둔 첫해에 그동안 살아보고 싶었던 유럽 도시에 한두 달씩 머무는 식의 여행을 했어요. 어딜 가도 내 또래 사람들은 모두 열심히 일하느라 바빴고, 낮시간에 레스토랑에서 느긋하게 식사하는 사람들은 나이 든 은퇴자나 노인들뿐이더군요. 그래서 그분들과 인사하고 이야기도 나누며 지내곤 했는데, 배울 점도 많았지만 기분이 이상했어요. 나도 노인이 된 것 같고... 내가 젊은 나이에 특별한 목적도 없이 떠돌아다니는구나, 현타가 왔죠.”


유럽이나 미국 같은 나라의 파이어족은 무얼 하면서 어떻게 지내나? 궁금했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없었다고 했다. 하긴 이해가 가는 일이다. 이마에 파이어족이라고 써붙이고 다닐 리도 없고, 한군데 모여 사는 것도 아닐 테니까.


그는 이야기를 나눌 자기 또래의 친구가 많지 않다는 게 생각보다 큰 문제라고 했다. 일상에서 부딪히는 소소한 이야기를 나눌 동년배가 없다 보니까 자신의 생각이 옳은지, 잘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물었다.

“그래도 파이어족이 되는 게 꿈인 사람들 많잖아요... L씨를 부러워하는 친구들이 꽤 많을 것 같은데요?”


그가 대답했다.

“글쎄요... 처음에는 바쁘게 살고 있는 친구들한테 뭔가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요즘에는 친구들이나 전 직장동료들한테서 느껴지는 활력, 에너지 같은 것들 때문에 압도당하고 괜히 쫄리는 느낌이 들기도 해요. 아무래도 공통 화제가 많지 않다 보니 만남 자체도 줄어들고요.”


L씨는 요즘에야 70 넘어서까지 일하셨던 부모님이 ‘그 젊은 나이에 은퇴한다고? 직장에서 사고 쳤냐? 어디 아프냐?’ 라며 걱정했던 마음을 알 것 같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파이어족이 되기엔 준비가 부족했던 게 사실이죠. 돈이 있다고 곧바로 삶을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충분치 않았어요. 몰두할 일이 없다 보니까 얼마 전엔 그렇게 싫어했던 회의시간이 갑자기 그리워지더라구요. 예전의 활력을 다시 찾을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중입니다.”

 

은퇴 후 3년이 지난 나도 격하게 공감하는 건 ‘은퇴 후 현실이 이론과 같지 않다’는 L씨의 말이다. 짧게 일했던 곳까지 합하면 총 네 곳의 직장을 거쳤고, 조직의 쓴맛도 충분히 맛봤던 터라 그토록 은퇴를 기다렸던, 그래서 하루 빨리 은퇴해서 좀 더 자유롭고 흥미진진하게 살고 싶었던, 은퇴에 관한 책도 냈던 내게도 이론과 현실의 괴리감은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주변을 둘러보면 비슷한 시기에 은퇴한 친구들의 사정도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물론 파이어족과는 달리, ‘이 나이에 이렇게 놀아도 되나?’라는 고민은 하지 않는다. 자타공인 놀아도 되는, 아니 놀아야 하는 나이니까. 하지만 한창 일할 때에 비하면 뭔가 빈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출퇴근의 쳇바퀴에서 벗어난 것 자체에는 만족하지만 여전히 출근하는 친구들 보면 부럽다, 이 나이에 월급 받는 것도 부럽고, 이 나이에 일할 거리가 있다는 것도 부럽다, 매일 아침마다 갈 데가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라고 말하는 은퇴자들이 여전히 많다. 그러다 보니 수십 명이 가입해 있는 동창들의 단톡방에 누군가의 일 관련 소식, 예를 들면 임용, 승진, 혹은 전시회나 공연, 책 출판 같은 소식이 올라오면 ‘축하한다’ ‘부럽다’는 카톡 소리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얼마 전에도 수십년 간 만남을 이어온 친구들의 만남에서 어라? 이건 뭐지? 이런 장면 한두 번 본 게 아닌데? 싶어서 쓴 웃음이 나왔다. 20,30대부터 만나면 매일 입에 달고 살던 “앞으로 뭐 하지?”라는 질문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노인복지를 전공한 동료들 모임에서는 “지금쯤은 이런 사업 해봐도 먹힐 것 같지 않아? 수요는 충분한데...” 라며 사업 아이템에 관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럴 때마다 신기하다. 어쩌면 세월이 지나도 대화 내용이 변하지 않는지, 지치지도 않는지.

 

그렇다. 파이어족을 포함하여 여전히 많은 은퇴자들이 무슨 일을 하며 살까, 고민하고 있다. 일은 생계 수단이기도 하지만, 나를 표현하는 수단,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기준,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무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은 말했다. “일은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생명력이다.... 우리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의 기쁨을 자아내거나 고통을 줄여줄 때 우리는 이 일이 의미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진짜로 일이 주는 기쁨은 바로 현실감의 축소, 오롯이 일에 매진하는 그 순간의 가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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