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에 사는 재미를 잃었다면
글 : 버들치 / 작가 2025-04-09
요즘, TV 예능의 대세는 리얼(엿보기) 예능이다. 우후죽순처럼 거의 모든 예능이 똑같은 포맷을 차용하고 있다. 고정 패널들이 삼삼오오 모여 어떤 특정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대리만족을 느끼고 위안을 받으며, 격한 공감을 날린다. 때론 과장되게 때론 탄식조로. 볼거리가 영화나 연극 오페라와 같은 문화 예술의 분야라면 그러려니 하건만 남의 생활을 엿보는 것은 생소한 일이면서 또 낯선 일이다.
하기야 사는 게 재미없다는 사람들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특히 50대 이상의 장년층이라면 말이다. 50대 이후로 들어서면 재미보다는 지루함에 더 익숙하다. 생활이 정체된 느낌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하나같이 답답한 일상 아닌가? 진급이 막히고. 월급이 동결되고. 아이들도 통제 밖이고. 아내마저도 홀연히(마음이) 떠나게 된다. 부모님도 세상을 뜨면 점점 끝까지 왔다는 느낌은 배가 된다. 갈 데(?)까지 간 인생이 뭐가 재미있겠는가?
하지만 무리하게 재미있는 일을 도모하기보다는 평이한 일상을 견디어 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생각하기에 따라 지루함일 수도 있고 또 한가함일 수도 있다. 지루함과 한가함은 비슷한 것 같지만 그 둘은 천지 차이다. 비슷한 것은 시간이 많다는 것이고 다른 점은 마음의 불안과 평온일 것이다. 지루함은 짜릿함을 추구하지만 한가함은 평온함을 추구한다. 당신은 지금 지루한가? 아니면 한가한가?
선수의 삶 vs 해설가의 삶
타인의 삶을 엿보는 부작용은 선수는 없고 해설가만 양산한다는 점이다. 삶은 자신이 살아가는 것이다. 타인의 삶을 대신 살 수도 또 대신 살아도 안 된다. 참고할 수도 없다. 삶의 문제는 정답이 없기에 누구누구의 삶을 참고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즉, 뾰족한 수가 없다. 내 문제를 내가 푸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
삶을 잘 살아 나가기 위해서는 문제를 자주(시행착오) 그리고 많이(경험) 풀어봐야 한다. 삶을 책임지는 주체인 선수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제삼자인 해설가로 살아갈 것인가는 전적으로 자신이 선택할 몫이다.
우리가 타인의 삶을 훔쳐보는 것은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과 또 뭔가 없나 하는 욕심 때문이다. 이런 사람의 삶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다. 자기의 삶을 주도적으로 사는 사람은 훔쳐보지도 또 기웃거리지도 않는다. 대부분 사람은 잘 사는 사람을 보면 심사가 뒤틀린다. 편치가 않다. 본받기보다는 긍정적인 열 가지보다 부정적인 한 가지를 언급한다. 자신이 잘 못 살아온 것 같은 판결문을 받은 기분이 되기 때문이다.
또 안돼 보이는 사람을 보며 반면교사로 삼기보다는 혀를 끌끌 차며 한심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멸시하고, 조롱하고, 경멸하고 심지어 저주하는 사람도 있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극단적이고 이분법적이다. 이래저래 누군가의 삶에 참견하거나 관심을 갖는 것은 생각만큼 얻을 게 없다.
그러나 사는 재미를 느끼려고 해도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그렇게 쉬우면 다들 보는 재미 대신 사는 재미를 느끼고 살 텐데... 가장 큰 이유는 힘들고 어렵다는 거다. 때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세상에 쉬운 일 치고 가치 있는 것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 생각을 바꾸고 태도를 바꾸고 행동을 바꾸는 건데 쉽겠는가?
그래서 오마에 겐이치란 분이 변하고 싶으면 세 가지를 바꾸라고 했나 보다. 사는 곳, 만나는 사람, 시간을 쓰는 방법 말이다. 변하고자 하는 생각이 중요한 게 아니라 변하겠다는 행동의 중요함을 일깨운다. 생각만으로 변했다면 다들 판. 검사를 하고 다들 대통령을 했을 것이다.
사는 재미가 있으려면 뭐든 해야 한다. 머릿속에 뭐 할까는 소용이 없다. 생각나는 대로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른 걸 해보면 된다. 실행과 실천이 없는 삶은 송장이나 다름이 없다. 남의 얘기 말고 자신의 얘길 만들어야 한다.
사는 재미를 찾아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란 책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읽은 책인데 이젠 책 이름만 기억할 따름이다. 그때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사랑한다는 개념이 그토록 중요한가라는 물음이었다. 종교인도, 지식인도 아닌 내가 사랑이란 화두를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사랑을 가족 정도로 만족하지 못하고 지인과 이웃 그리고 모든 인류까지 확장하려고 했으니... 나중에 알았다. 내겐 그런 열정도 에너지도 없다는 사실을. 사랑은 내겐 너무 거창한 개념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보단 내겐 살며, 일하며, 배우며가 더 마음 편하게 다가온다. 나만의 세 가지 원칙을 가지게 된 이유다.
첫째, 내 몫의 인생을 산다.
남들이 어떻게 사나 관심을 두지 않는다. 참고는 하겠지만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남이 가진 재물. 권력, 명성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보단 내가 가질 수 있는 것과 갖고 싶은 것에 집중하자. 소망과 욕심을 구별하자. 무엇을 행하더라도 불안하면 욕심이다. 태어나면서 그릇이 정해졌다면 그 그릇을 채우는 과정이 내 몫의 인생을 사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릇이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채우는 인생이 내 몫을 사는 인생이다. 그릇의 크기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릇을 채우는 데 집중하는 삶이다. 그릇의 크기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그릇을 얼마나 채웠느냐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당신 그릇은 얼마나 차 있는가?
둘째, 남에게 짐이 되지 않는다.
민폐를 가장 싫어한다. 누구에게 짐이 되는 것은 죽기보다도 싫다. 상부상조란 미덕도 있지만 내겐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사회생활을 하는 인간의 특징 때문에 누군가와 연결되고 협업하고 협동하고 분업을 하지만, 아무튼 누군가에게 짐이 되지 않는 존재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즉, 질척거리지 않는 깨끗한 삶을 살고 싶다. 남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면 자립이 필요하다. 스스로 생각하는 생각의 자립, 스스로 살림을 꾸려나가는 경제적 자립 말이다. 자립을 저해하는 가장 큰 적은 소위 우상과 멘토와 스승이라고 칭하는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다.
셋째, 맡은 바 소임을 다한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기본적인 마음가짐이 아닐까? 공동체를 이루고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기본이 되는 소양이 바로 맡은 바 소임을 다 하는 자세다. 스피노자의 마음가짐이다. 누굴 탓하지도 누굴 원망이지 않고 자신이 하는 일에 집중한다. 존엄한 삶이 이런 것이 아닐까. 네가 먼저 하라는 요구보다 자발적인 헌신과 해야 할 일을 하는 당당함이 바로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우리 나이(50대)에는 살며, 일하며, 배우며가 다라고 생각한다. 셋 모두 목표 지향적이 아닌 과정 중심적이다.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어떤 목표를 세워 이루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50대가 되면 획기적인 무언가를 이루기엔 늦은 나이라고 직감하기 때문이다. 아니, 하늘 아래 이룬다 한들 뭐 대단한 것이 있던가?
경계인이 될 결심, 외로워질 결심
우리의 하루하루가 심각한 것은 자유, 평등, 정의와 같은 거창한 담론에 휩쓸리기 때문이다. 평등, 공정, 정의와 같은 거창한 담론을 만드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걸 이념화하고 절대화하면 그 순수성은 파괴되고 괴물로 변해버린다.
결과의 평등, 기회의 평등까지 바라지 말자. 그보단 인격의 평등을 먼저 실천하자. 공정을 들먹이며 사사건건 시비를 걸기 전에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자세가 공정이다. 남에게 정의로움을 바라기 전에 나의 책임과 책무를 다 하는 것이 정의로움이다. 말과 글로써는 평등, 공정, 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남에게 요구하기 전에 내가 먼저 평등, 공정, 정의를 실천하자.
하지만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동분서주하는 우리는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남에게 따뜻한 눈길 한 번 주기도 힘들다. 김수영 시인이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란 시에서 혼자 중얼거렸듯이 나란 인간은 얼마나 작은가?
경계인이 되어야 한다. 극단을 피해야 한다. 무엇인가에 열광적인 관심과 뜨거움을 정의로움으로 생각한다면 늘 인생이 위태롭다. 한 발 떨어져야 한다. 남들이 우유부단하고 답답하다고 할지라도 성급히 결론을 내리면 안 된다. 경계인은 늘 외롭다. 남들이 보기엔 회색분자 같고 또 우리 편이 아니라고 따돌릴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은 흑과 백보다는 회색 지대가 더 많다.
버들치 작가
증권회사에서 33년 근무 후 퇴직하여 현재 기능인으로 인생 2 막을 살고 있다. 1965년에 태어나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이 세 가지 운으로 위태롭게 살아왔다. 첫 번째 운은 짧은 학력으로 증권회사에 입사한 것이고, 두 번째 운은 33년간 한 회사를 다닌 것이고, 세 번째 운은 퇴직 후에도 소일거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퇴직을 앞두고 주경야독으로 기술을 배웠으며 그 경험에 대해 네이버 '부동산 스터디' 카페에서 버들치라는 닉네임으로 글을 썼다. 그 결과물로 '버들치의 인생2막'(2023)이라는 책을 발간 했다. 단순하고 평온한 삶을 추구해 왔으며 앞으로 그럴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