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않는 버스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의 기막힌 사연
글 : 김웅철 / 지방자치TV 대표이사, 매일경제 전 도쿄특파원 2022-10-06
버스가 오지 않는 버스정류장이 있습니다.
일본의 한 지방 도시 마을 한 곳에 설치된 이 버스 정류장은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습니다.
왜 이런 정류장을 만들어 놓았을까요?
그 배경에는 치매 고령자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싶다는 ‘착한 거짓말’이 숨겨져 있습니다.
다음은 올해 일본공익광고협회가 주최한 공익광고 경진대회에서 신문광고 부문 대상을 받은 작품의 카피 내용입니다.
“독일의 한 요양시설에서는 치매 노인들의 배회(徘徊)가 잇따라 발생해 시설 관계자들이 대응에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직원이 ‘배회하는 치매 노인들 대부분은 버스나 전철 등 공공교통기관을 이용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직원은 요양원 앞에 ‘버스가 오지 않는 버스정류장’을 설치했습니다.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배회)노인에게 ‘저기 버스 정류장이 있으니 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리면 어떨까요?’라고 말을 건네며 버스 정류장으로 안내하고, 5분 정도 지난 후 ‘버스가 늦어지는 것 같으니 (정류장) 안에서 커피라도 한 잔 하시는 게 어때요?’라고 말하면 노인은 얌전하게 요양원으로 되돌아간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도 이 ‘버스가 오지 않는 버스정류장’을 설치하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치매 고령자들의 생명과 존엄을 지키는 ‘착한 거짓말’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광고에서 말한 독일의 요양원은 뒤셀도르프 벤라트(Benrath) 지구에 있는 ‘벤라트 시니어 센터’(Benrath Senior Center in Düsseldorf)입니다. 웹매거진 ‘IDEAS FOR GOOD’ 참조 (https://ideasforgood.jp/) 시니어 센터의 ‘가짜 정류장’의 효과가 알려지면서 요즘 유럽의 많은 요양시설이 버스가 오지 않는 버스 정류장을 만들어 놓고 있다고 합니다.
치매에 걸린 사람은 단기기억은 거의 기능하지 않지만 옛 습관 같은 장기기억은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버스정류장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기다리면 버스를 타고 집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벤라트 요양원은 환자가 멀리까지 나가서 버스정류장을 찾지 않아도 되도록 시설 바로 옆에 가짜 버스정류장 간판을 세운 겁니다.
가짜 정류장은 환자의 마음을 달래주는 효과를 발휘합니다. 시설의 치매 노인이 “집에서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돌아가야 한다”고 하면 요양원 직원들은 이들을 억지로 말리거나 화제를 돌리지 않고 “저기 버스정류장이 있어요”하며 정류장으로 안내합니다. 그러면 치매노인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며 안심하고 버스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자신이 왜 버스를 타려고 했는지도 잊어버리고 버스가 늦어지는 거 같으니 (요양원) 안으로 들어가 기다리자고 말하면 마음이 누그러져 선뜻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벤라트 요양원의 ‘가짜 정류장’ 사례가 알려지면서 유럽의 많은 요양 시설이 가짜 버스 정류장을 만들어 놓고 있다고 합니다.
치매 인구가 600만 명을 넘어선 일본에서도 치매 노인들의 배회는 대응이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치매노인이 배회하다 기차에 치어 사망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고 있습니다. 광고 카피 속의 일본의 ‘가짜 버스정류장’은 아이치 현 도요하시 시(豊橋市) 한 마을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마을의 한 ‘치매 카페’ 근처에 설치되어 있는데, 치매 노인을 위한 가짜 정류장이라는 뜻에 공감한 도요하시철도 회사가 예전에 사용했던 ‘진짜 버스정류장’을 양도해주면서 만들어졌습니다. ‘앙키 카페’라는 이름의 이 치매카페 사례가 매스컴을 타면서 치매 노인들의 배회 문제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일본은 2012년부터 치매 정책의 하나로 전국 시읍면에 치매 카페를 설치하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치매 카페란, 치매 환자와 그 가족들, 지역주민, 의료 간병 전문직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정보와 고민을 나누는 곳입니다. 지역 주민들이 치매환자나 가족들의 고민을 공유하고, 전문가와의 상담도 가능합니다. 카페라는 익숙한 공간 속에서 도움을 원하는 쪽과 도움을 주는 쪽이 만나 교류하며 지역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치매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여하는 마을 거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치매 카페로 활용되는 장소는 다양합니다. 요양원, 지역 주민센터, 쇼핑센터, 일반 주택에도 설치됩니다. 최근에는 스타벅스 등 젊은이들에게 핫한 곳에서도 정기적으로 치매 카페 이벤트가 열리기도 합니다. 현재 일본의 치매카페는 전국에 약 8000곳이나 됩니다.
도요하시 시는 ‘치매 프렌들리 마을’로 이름이 알려져 있는 데, 요양 기관은 물론 기업과 학교 등 지역의 다양한 단체가 함께 치매 정보를 공유하면서 대응하고 있습니다. 시에서는 정기적으로 ‘치매와 함께하는 마을 만들기’ 보고회를 진행합니다. 가짜 정류장 프로젝트에 참여한 도요하시 철도회사는 또 치매 고령자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도록 직원들에게 치매 고령자 대응 현장 실습 교육을 수시로 시키고 있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김웅철 지방자치TV 대표이사, 매일경제 전 도쿄특파원
서강대 경영학과 졸업, 同대학 대학원에서 사회학 석사를 받고 상명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 게이오 대학 연구원, 매일경제신문 도쿄특파원과 국제부장, 매경비즈 대표, 매일경제TV 국장, 경제tv EBC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초고령사회, 일본에서 길을 찾다》, 《초고령사회 일본이 사는법》의 저자로, ‘노인대국 일본’을 주제로 다양한 칼럼과 책을 쓰면서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초고령사회의 모습과 해법에 대해 연구했다. 《복잡계 경제학》, 《대공황 2.0》, 《2014년 일본파산》, 《똑똑하게 화내는 기술》 《아직도 상사인줄 아는 남편, 그런 꼴 못보는 아내》등 다수의 일본 서적을 번역했고, 《연금밖에 없다던 김부장은 어떻게 노후 걱정이 없어졌을까》, 《일본어 회화 무작정 따라하기》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