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싸움에 자존심 대결까지, 친구 관계 '싹둑' 해버릴까 |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눈치 싸움에 자존심 대결까지, 친구 관계 '싹둑' 해버릴까

글 : 이제경 / 100세경영연구원 원장 2023-06-05

친한 후배에게서 늦은 밤에 전화가 걸려왔다. 오랫동안 이어온 친구 모임에서 빠지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하소연이었다. 은퇴 후 함께 골프를 즐길 목적으로 몇 년 전부터 돈을 모아왔고, 지난해부터 곗돈으로 골프를 치기 시작했단다. 그런데 요즘 들어 불협화음이 잦아졌다고 한다. 아직도 일하는 친구들은 주말을 고집했고, 은퇴한 친구들은 비용을 줄이기 위해 주중을 원했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친구들은 해외 골프도 원했고, 아예 해외 골프 회원권을 사자고 제안한 친구도 있었다. 후배의 고민은 깊어졌다.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골프 날짜 잡기도 쉽지 않았다. 이제는 눈치보기를 넘어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면서 모임이 와해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매번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모임을 갖기 보다는 차라리 모임 탈퇴가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지금 같아서는 오늘 밤에 당장 절교를 선언하고, 모임에서 나가고 싶다고 토로했다.    




나는 일단 후배 마음을 진정시켰다. “하룻밤 자고 다시 생각해 보자. 모임 탈퇴는 내일 해도 늦지 않아. 절교를 공식 선언하면 다시 되돌릴 수 없으니 신중하게 판단하자. 5년 또는 10년 이후에도 지금의 결정이 후회되지 않도록 말이야.” 


인간관계 때문에 고민하는 후배 전화를 받고 난 뒤 문득 동화책 『절교 가위』가 떠올랐다. 어린이들의 친구관계 고민을 담은 책이지만, 오히려 인생 후반기에 접어든 사람들에게도 딱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날 때마다 돈자랑에 이어 요즘엔 자식과 손주자랑 하는 꼴을 더 이상 보기 싫다며 반세기 가깝게 사귄 친구들을 ‘절교(絶交) 가위’로 싹둑 잘라내는 모습이 소꿉장난하는 어린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나이 들수록 사람 사귀기가 어려워진다. 참여하는 모임 수와 참여 횟수가 확연하게 줄어든다. 은퇴 이후엔 소비 여력이 예전만 못하기에 만남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고, 무엇보다도 건강이 예전 같지 않아 만남 자체가 힘에 부치기도 한다. 젊었을 때엔 출세나 성공을 위해 내키지 않는 모임에도 참석했지만, 은퇴 후엔 남 눈치 볼 필요가 없어진다. 또한 점점 더 자신과 가족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친목 활동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여기에 나이가 들수록 서운함이 늘어나고, 분노 조절이 힘들어지면서 ‘절교 가위’를 쉽게 꺼내게 된다. 이렇게 하다 보면 외톨이 신세는 시간문제다. 이런저런 이유로 절교를 하다 보면 남은 친구는 거의 없고, 심지어 가족까지도 등을 돌릴지도 모른다. 노후의 최대 적은 고독이라고 했지 않았나. 나이 들수록 ‘절교 가위’가 무뎌져야 하는 이유다.  




어떻게 하면 ‘절교 가위’가 무뎌지게 할 수 있을까. 우선 나이가 들수록 감정조절 능력이 젊었을 때보다 떨어진다는 점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뇌과학자들은 대뇌피질과 대뇌변연계의 기능 부조화에서 감정조절 능력의 저하 원인을 찾아냈다. 즉 나이가 들수록 감정을 조절하는 대뇌피질의 전두엽 기능이 떨어져서 화가 났을 때 브레이크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버럭 화를 잘 내거나, 심지어 ‘폭주노인’이 등장하는 이유도 이런 신체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절교 가위’를 휘두르다 보면 주위에 아무도 남지 않을 수 있다.


‘절교 가위’를 함부로 사용하고 싶지 않다면 ‘자기 심리학’에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불쑥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이유는 ‘타고난 감정(1차 감정)’이 아니라 자존심에 상처를 받으면서 생겨나는 2차 감정이기에 스스로가 노력하면 개선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상대방이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가 나게 마련인데, 분노와 절교로 이어지는 과정은 자신이 자초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열등감이나 질투심이 분노와 같은 2차 감정의 원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감정바보』란 책을 펴낸 와다 히데키 정신과 의사는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해선 ‘당위적 사고(Should Thinking)’와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라고 말한다. ‘당위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상대방에게도 당위적 사고를 원한다. 그게 깨지면 화를 내고, 분노를 느끼게 된다. 결국 ‘절교 가위’가 무뎌지게 하려면 당위적 사고와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즉 내 생각을 상대방에게 강요할 게 아니라 서로의 생각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생각의 다름을 인정한다 해도 상대방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돌출행동을 한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나보다 늙은 사람은 저렇게 이상행동을 보이는 게 당연해. 늙을수록 대뇌피질의 전두엽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거든.”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하룻밤 자고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과민반응을 보였던 것 같아요. 나도 이젠 늙었나 봐요. 친목모임을 깨지 않기로 마음먹었어요. 화를 못 이겨 절교를 하면 결국 내가 더 큰 마음의 상처를 입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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