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세 홍여사는 어떻게 슈퍼에이저(Super-Ager)가 되었을까? |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92세 홍여사는 어떻게 슈퍼에이저(Super-Ager)가 되었을까?

글 : 김동선 / 조인케어 대표/숙명여대 실버비즈니스학과 초빙대우교수 2022-05-02

젊었을 때에는 모이면 자식들 얘기로 꽃을 피웠는데, 나이들면서는 부모님 이야기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부모님이 낙상을 하시는 바람에 요양병원을 알아보느라 정신없었던 이야기, 새벽에 호출을 받고 응급실로 달려간 이야기, 치매가 있으신 부모님을 모시는 문제로 형제들이 옥신각신한 이야기까지. 이때 이박사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흐른다. 


“아니, 자네 모친은 어떠신가? 지금 90세도 넘으셨지? 혼자서 생활하셔도 괜찮은가?” 집안 사정을 잘 아는 친구가 물어온다. 


“아, 우리 어머니가 올해 만으로 92세이시지. 얼마 전에 책을 한 권 번역하셨다네. 번역하느라 고생하셔서 요즘 허리가 안 좋으시다고 하네.” 입이 벌어진 동창들 사이에서 그는 ‘우리 아이가 반에서 일등 했어’라는 표정이다. 




이 일을 전해 들은 나는 그의 어머니를 취재해 보기로 작정했다. 나이가 들면 자꾸 단어가 혀끝에서만 맴돌고,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이 보통인데, 90대에 번역을 했다니... 말로만 듣던 슈퍼에이저를 만나보기로 했다.


슈퍼에이저(Super-Ager)란, 평균적인 노인들에 비해 수 십 년 정도 뇌의 노화가 느린 사람들을 일컫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30세에 지능이 최고에 도달하고 이후 계속 쇠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하버드의과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슈퍼에이저들의 뇌는 젊은 사람들 못지 않게 뇌피질이 두껍고 해마의 크기도 별반 줄어들지 않았다고 한다.


또 이들은 ‘한계를 극복하고 성취감에서 즐거움을 얻으며’, ‘쉼없이 바쁘게 살아가며’, ‘열정을 가지고 몰두하는 취미를 갖는’ 등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전쟁의 아픔을 공유하며 번역을 하기도...


1930년 생인 홍성숙 여사는 서울대학교 가정교육과를 다니던 중 6.25를 만났다. 


부산으로 피난가 그 곳에 마련된 임시교정에서 수업을 받았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조국, 굶주리던 기억이 이번에 책을 번역하게 된 동기가 됐다. 책의 제목은 ‘13세 소녀와 한국전쟁’. 저자는 나나미 벌링엄으로, 전쟁이 발발할 당시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와 함께 서울에 살다가 피란길에 오른다. 서울이 북한군에 의해 접수된 날, 가족은 서울을 빠져나오지만 아버지는 바로 검문에 걸려 잡혀가고 이후 나나미는 한국말 한 마디도 못하는 어머니와 남동생을 데리고 5개월에 걸친 도보 피란을 했다. 그녀는 이 책에서 실제 경험을 어제 일처럼 상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나나미는 이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영국인과 결혼, 현재 영국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영국인 참전군인을 통해 나나미씨 이야기를 듣게 됐어요. 영국에 살고 있는 나나미씨와 몇 차례 서신을 교환하던 중, 너무나 깊게 각인된 피난길 기억,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저에게도 느껴지는 듯 했어요. 나나미씨는 전쟁중에 공산군에 의해 즉결 처형을 당할 뻔하기도 했지만 많은 한국인들이 그녀를 숨겨주었고 식량을 나눠주었기에 피란지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답니다. 마음에 맺힌 이야기를 글로 풀어가면 그녀에게 치료가 될 것 같아, 글로 써보라고 권유했지요.”


나나미씨가 손으로 작성해 보내온 원고는 그리 두툼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어와 영어, 한국말, 한자가 마구 뒤섞여 있어 번역하는 것이 만만한 일은 아닌 듯 했다.




“막상 원고를 받으니 번역할 사람이 없는 거에요. 할 수 없이 제가 시작했지요. 예수님이 광야에서 기도했다는 시간만큼, 딱 40일이 걸렸어요. 다른 일은 젖혀두고 매일 책상 앞에 앉아 몇 장씩 번역을 했습니다. 알아보기 힘든 한자도 있었고, 일제 강점기 이래 쓰지 않던 일본어니까, 기억이 가물가물한 부분도 있어, 인터넷을 뒤져가며 번역을 했지요.”


그렇게 번역된 원고는 마침 같은 동네에 사는 출판인이 도와주어 책으로 만들어지게 됐다. 출판비용은 본인과 이 일을 시작하도록 부추긴 여동생이 주로 냈다. “번역한 글을 감수받을 길이 없어 수정없이 책으로 나왔다”고 하는데, 번역은 매끈하고 단어 선택도 적절하다.


90대에 이토록 총명한 비결을 물으니, ‘달리 없다’며 손사레를 치지만, ‘뉴스나 유튜브를 볼 때 새로운 단어나 이름이 나오면 그것을 종이에 적으면서 시청하는 습관’을 알려준다. 슈퍼에이저들은 공감능력이 뛰어나며 사람들과의 연대를 유지하는 특성이 있다. 이러한 요인때문인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실시한 연구에서는 비슷한 숫자의 남녀를 대상으로 수퍼에이저를 찾아본 결과 여자가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남녀 모두 사회적 활동 수준이 높은 특성을 보였다.


그녀가 이번 번역을 하게 된 동기 역시 “나나미씨의 한국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주위에 알리고,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됐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녀는 혼자 살지만 심심할 틈이 없다. 코로나 전에는 모교 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렀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사진 출사를 나가고, 복지관에서 새로운 컴퓨터프로그램을 배웠다. 자녀들이 홍여사로부터 새로운 프로그램을 배워야 할 지경이란다. 지금은 자녀들의 성화로 운전대를 놓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직접 운전을 했다. 


“제가 일곱 형제의 맏이에요, 가까이 사는 동생들, 동창들, 교우들까지 어디를 가더라도 데리고 다녀야 하는 데 운전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저뿐이라서요.”


번역 일 지속을 위한 자기관리, 슈퍼에이징의 원동력 


“그런데 번역이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저는 번역을 하다가 허리가 나빠져서 처음으로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답니다. 이전에는 감기나 배탈 같은 잔병말고는 병원을 다녀 본 적이 없어요. 약이라면 비타민, 영양제 이외에 먹는 것이 없고요. 이빨도 임플란트 1개 한 것 말고는 멀쩡하답니다.” 


신체건강 뿐 아니라 뇌의 건강을 위해서도 운동이 필요하다. 특히 유산소운동과 고강도의 운동을 일정 시간 간격을 두고 반복하는 방식이 뇌건강에 효과적이라는 연구가 있는데, 홍여사 역시 커뮤니티센터에 나가 체조와 PT를 꾸준히 하고 있다.




한편, 수퍼에이저들은 고통에 의연하며 불평을 하지 않는 초긍정적인 유형이라는 분석도 있다. 하버드의대 연구에서는 수퍼에이저들이 기억력 과제를 수행할 때 전방대상피질이 활성되는 것이 발견됐다. 이 영역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끈기와 인내를 담당하는 영역이다. 좋은 교육을 받고 편안한 삶을 살았겠구나 싶은 선입견과 달리, 그녀의 중년기는 눈물바람으로 지낼 뻔한 것이었다. 힘든 일들이 다 지나니, 오히려 노년기가 더 행복하다는 그녀. 


하지만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나 계획’에 대해서는 말을 많이 아낀다. ‘저도 몸이 예전같지 않아요.’라고. 자신이 노인임을 부쩍 강조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 코로나 이후에 교회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를 기피하게 됐다. 노인들이 나타나면 젊은 사람들이 곤란한 얼굴을 하기 때문이란다. 물론 코로나 감염 때문에 걱정하는 것을 아니까,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지 말자는 마음에 되도록 외출을 하지 않게 됐다고.


미국의 심리학자인 캐롤 라이프(Carol Ryff)에 따르면, 노인들의 삶의 만족감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환경에 대한 통제와 자율이 매우 중요하다. 더 이상 운전을 하지 못하는 데 따른 제약, 사회적 격리 등은 홍여사의 활기를 앗아가는 모양이다. 그래도, 유튜브에서 깍두기를 맛깔스럽게 담구는 방법을 배웠다며, 한 번 해보겠다는 의욕을 살짝 내비친다. 인생은 기승전결이 아니라, 기승전전이다. 90대에도 꿈꾸고 도전하는 슈퍼에이저들을 응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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