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만화 '빨강머리 앤' 감독 잠들다 |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추억의 만화 '빨강머리 앤' 감독 잠들다

글 : 김봉석 / 작가 2018-04-27

지난 4월 5일,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다카하다 이사오가 별세했다. <반딧불이의 묘>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추억은 방울방울> 등의 극장용 애니메이션과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 <엄마 찾아 삼만리> <빨간머리 앤> <알프스 소녀 하이디> 등의 TV 애니메이션이 대표작으로 한국에도 많은 팬이 있다. 그리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를 만든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애니메이션 제작사 스튜디오 지브리를 설립하여 일본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바꾼 인물로 평가된다.



출처: 네이버 인물검색 

'다카하다 이사오'


1990년대 말, 전통의 디즈니 스튜디오와 <토이 스토리>로 디지털 애니메이션의 명가가 된 픽사의 감독과 애니메이터들은 존경하는 감독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다 이사오를 꼽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에서도 1990년대 들어, 다양한 일본 애니메이션을 비공식적인 루트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명동이나 고속터미널 지하에 가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아키라> 등의 일본 애니메이션과 <러브레터> <소나티네> 등 일본 영화를 복사해주는 가게들이 있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찾는 사람들은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다 이사오의 작품을 첫손에 꼽았다. 대학가에서는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소규모 상영회를 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1960, 70년대부터 <우주소년 아톰> <밀림의 왕자 레오> <요괴인간> <마징가 Z> 등 일본 애니메이션이 방영되었다. 하지만 당시에 일본산이라는 것을 알았던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애니메이션의 국적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일본색이 드러나는 작품은 애초에 수입하지도 않았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1970, 80년대 <우주전함 야마토> <은하철도 999> <기동전사 건담> 등 성인들이 보기에도 수준 높은 걸작들이 등장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미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해외에서도 인정을 받게 된다.



출처: 네이버 영화 '우주전함 야마토'


나 역시 다카하다 이사오의 애니메이션에 반했었다. 다카하다의 죽음을 접하고 감회에 젖은 이유다. 미야자미 하야오와 다카하다 이사오 둘 다 위대한 감독이지만 지명도를 비롯하여 흥행이나 평가 등에서는 대부분 미야자키가 앞서 있다. 다카하다의 작품 역시 걸작이 많고, 미국과 유럽의 유명 미술관에서 전시를 할 정도로 예술성을 인정받았지만 미야자키만큼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다카하다의 작품들을 떠올려 보면, 미야자키의 작품 이상으로 기억나는 장면들과 여운이 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이웃집 토토로>를 좋아하지만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과 <추억은 방울방울>을 뛰어넘는다고 말할 수 없다. 아니 그 작품들 중에서 하나만 꼽아야 한다면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을 내세우고 싶다. 작품도, 인생도 결코 지명도와 세간의 평가만으로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출처: 네이버 영화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다카하다 이사오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선배였다. 도에이동화에서 애니메이션을 시작한 다카하다 이사오는 연출력을 인정받으며 명성을 날렸다. 하지만 명작동화를 각색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다카하다 이사오는 후배인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1985년 스튜디오 지브리를 만들었다. 이후 다카하다 이사오의 작품은 사실과 현실의 경계를 치열하면서도 아름답게 그려내는 스타일로 변해간다.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를 각색한 <첼로를 켜는 고슈>가 그런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1988년에 만든 <반딧불이의 묘>는 한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특히 유명한 작품이다. 전쟁이 마지막으로 치닫고 있을 때, 어머니와 집을 잃은 남매가 방황하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반딧불이의 묘>는 희생자의 입장만을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핵폭탄의 피해를 강조하며 희생자임을 선전하는 태도와는 달리 <반딧불의 묘>는 미국을 적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죽이는 것은, 군국주의와 그에 동조한 어른들의 사악함과 무관심이다. 남매의 적은 미국이 아니라 일본 사회 자체다.



출처: 네이버 영화 '반딧불이의 묘'


<추억은 방울방울>은 도시생활에 지친 여성 회사원이 시골에 가서 겪는 사건들과 과거의 회상을 유려하게 엮어낸다. 다카하다 이사오는 소소한 일상의 정겨움과 그리움을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 안에 탁월하게 그려낸다. 도시보다는 농촌, 서양보다는 동양, 혁신보다는 전통에 천착했던 다카하다 이사오의 사상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1994년 다카하다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을 만든다. 도시의 확장으로 숲이 점점 줄어들고 생존의 위협을 받자 너구리들은 대책을 세운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연구를 시작하고, 일부 너구리들은 전쟁을 주장한다. 이상주의자인 미야자키 하야오가 근원적인 문제를 끌어안고 가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과 반대로 다카하다 이사오는 초현실의 세계를 현실로 끌어들여 풍자하며 한바탕 굿잔치를 벌인다. 



출처: 네이버 영화 '추억은 방울방울'


미야자키 하야오가 <원령공주>에서 말하듯이 인간과 자연의 생존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모순된 상황에서 <원령공주>의 주인공들은 삶의 길을 택한다. 너구리들도 마찬가지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은 비극적인 환경파괴의 연대기이자 인간에 맞서 싸운 너구리들의 투쟁사다. 다카하다 이사오는 전통적인 만화 기법과 유희정신으로 고난의 연대기를 장쾌하게 써내려간다. 능글맞은 나레이션이 흐르면서 너구리들의 낙천전인 생활들이 펼쳐진다. 사람들이 보지 않으면 너구리들은 두 발로 서서 다니고,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모습이 변하기도 한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은 흥겨운 풍자와 익살이 가득하고, 인간과 자연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을 유지하는 애니메이션이다.



출처: 네이버 영화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으로 정점에 달했던 다카하다 이사오는 99년 소품의 느낌을 주는 <이웃의 야마다군>을 만들었다. 전통적인 셀 애니메이션이라기보다 신문이나 잡지의 유머러스한 4컷 만화를 보는 듯한 기분의 작품이다. 서민적이고, 풍자와 익살이 다카하다의 주무기임을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이웃의 야마다군>은 흥행에 실패했고, 다카하다는 2009년 젊은 날 만들었던 명작 동화 스타일의 <빨간머리 앤>을 연출했다. 그리고 2013년의, 일본의 오랜 전설을 바탕으로 한 <가구야 공주 이야기>가 그의 유작이 되었다.


다카하다 이사오는 화려함을 구가하는 예술가가 아니었다. 따뜻하고 성실하게 인간에 대한 믿음을 환상적으로 보여준 애니메이션 감독이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정체기에 있는 지금, 다카하다 이사오의 죽음은 한 시대가 끝났다는 선언 같기도 하다. 테즈카 오사무의 애니메이션과 명작 동화, 로봇 애니메이션과 특촬물 등 다양한 장르를 구가했던 일본 애니메이션의 화려한 역사에서 다카하다 이사오는 명작동화의 한 획을 그었다. 그리고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해냈다. 서구의 명작동화가 아니라 <반딧불이의 밤>과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등에서 일본의 환경과 사상 그리고 다카하다 자신의 철학을 결합하여 미야자키 하야오 이상으로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해냈던 것이다.



출처: 네이버 영화 '반딧불이의 묘'


모든 것은 변한다. 시대도, 예술도 변한다. 하지만 한 시대에 만들어진 걸작들은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지속된다. 이미 고전으로 평가받는 다카하다 이사오의 애니메이션들 역시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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