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고 부자는 어떤 사업으로 성공했나 |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중국 최고 부자는 어떤 사업으로 성공했나

글 : 샹제(商界) / 중국 경제지 2023-05-17



마화텅과 마윈을 제치고 중국 부호 1위에 오른 중산산은 누구인가?



중국 1위 생수 기업 농푸산취안(农夫山泉) 중산산(鍾睒睒) 회장의 사무실. 깨끗이 정돈된 책상에 돈키호테 조각상이 보인다. 


돈키호테는 스페인 작가 미구엘 드 세르반테스가 만들어낸 캐릭터다. 기사가 자취를 감춘 지 10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라만차(La Mancha)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돈키호테가 등장했다. 그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의협심을 발휘해 정의를 행하고, 시대와 맞지 않는 기행을 일삼다가 마침내 꿈에서 깨어났다. 꿈이 사라진 순간, 그의 생명도 함께 사라졌다. 어떤 의미에서 돈키호테는 세속적인 세상에 맞서 생명의 꽃을 피워낸 것이다. 


스페인 작가가 던진 환상과 고독이 중산산에게 어떤 길을 보여준 건 아닐까? 


눙푸산취안(農夫山泉)의 내부 관계자에 따르면 중산산은 미니멀리스트로 절제가 몸에 배었으며, 심지어 비서도 없이 혼자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이에 대해 중산산도 “나는 ‘독고다이’다. 동종 업계에서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라고 웃으며 인정하기도 했다.


남들과 다른 행동은 세상으로부터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그러나 고독은 중산산에게 생각하고 깨우칠 시간을 주었다.


“인류는 모두 점에서 시작되었다. 점을 계속 그리면 원이 되고, 원에서 과학이 생겨난다. 원을 깨려면 원을 그려야 하고, 타원이 그려지면 그것이 바로 혁신이다.”


정해진 기존 궤적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끊임없이 점만 그리면서 반경을 돌파하려는 소수의 사람들을 비웃는다.


수많은 유명인사들도 유명해지기 전에는 중산산처럼 쉽게 조롱을 받곤 한다. 중산산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려면 억울함을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때 그에게도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악당 같은 모습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문인(文人)으로서 최소한의 자긍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브랜드를 공격하는 자에게는 공격적인 맹수 같은 모습을 드러냈지만, 서민과 재난 앞에서는 충성스런 기사의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들이 쌓여 마침내 오늘날의 중산산을 만들어냈다. 


중산산에게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화려한 모험은 끊임없이 타원 그리기를 시도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완타이바이오와 ‘30분 갑부’


2020년 이전까지 ‘산’(睒: 언뜻 볼 섬)이라는 한자는 일반 대중이 잘 사용하지 않는 글자였다. 산(睒)은 ‘깜박임’을 의미하는 ‘산’(閃)과 같은 음을 가졌다. ‘산(睒)’자를 형상화하면 그림 중앙에 불을 2개 둔 빛나는 눈이 있다. 이 눈은 깊은 곳을 응시할 때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두운 밤을 폭파시킬 만한 힘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68년 전, 한 젊은 부부는 갓 태어난 아이에게 ‘중산산’(鍾睒睒)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들은 아들이 몇 년 후 미장공이 될지 몰랐다. 더 나아가 미장공이었던 소년이 왼손에는 눙푸산취안을, 오른손에는 제약회사인 완타이바이오(萬泰生物)를 쥐고 아시아 최고 갑부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2020년 4월 중산산이 직간접적으로 73.3%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완타이바이오가 중국 A주 증시에서 상장했다. 완타이바이오는 코로나19 진단키트와 백신 개발로 우뚝 섰다. 


그로부터 몇 달 후인 9월 8일, 눙푸산취안이 기업공개를 통해 대중 앞에 새로이 섰다. 이 생수 브랜드는 상장 첫날 주가가 85% 폭등하며 투자자들에게 감로수의 출현을 알렸다. 직간접적으로 지분 83.98%를 보유한 창업주 중산산의 자산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재산이 668억 달러에 육박, 텐센트의 마화텅(馬化騰) 회장과 알리바바 그룹 마윈(馬雲)을 제치고 새로운 중국 최고의 갑부로 떠올랐다. 


이때부터 이전에 생소했던 ‘산’(睒)이라는 글자는 더 이상 사전의 한 귀퉁이에 숨지 않고, 주요 언론 1면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중산산이 몸담은 생수 사업은 전통 산업 분야에 속한다. 인터넷 전환이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 불안하지 않았는지 물었을 때, 중산산은 결연한 눈빛으로 “산업 업그레이드가 산업 전환보다 더 중요하다”라고 답했다. 


당시 그는 전통산업 분야의 기업가 대부분이 ‘인터넷 전환’과 같은 말에 현혹되어 제품 연구라는 본분을 잊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제품은 기업이 사회를 이롭게 하는 매개체이며, 기술과 창조의 결정체인 것이다.


전통 산업의 집단적 불안은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다. 


오랫동안 중국에서 부(富)라는 강은 인터넷, 에너지, 부동산 분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다. 중국 최고 갑부의 왕좌도 몇몇 특정 거물이 번갈아 가며 차지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산산은 전통산업 코스를 벗어나지 않았다.


눙푸산취안의 상장 당일, 자본시장의 흥분은 빠르게 진정되었고 중산산은 중국 최고 갑부의 자리에서 30분간 머물렀다. 겨우 30분이었다. 이 대수롭지 않은 일로 조롱이 넘쳐났다. 호사가들은 그를 '30분 갑부'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역사는 조용하면서도 무서운 관객과도 같다. 선조들이 쌓아온 업적을 끊임없이 쇄신해야만 역사는 기꺼이 더 많은 지면을 내어줄 것이다. 중산산이 바로 그 지면을 차지하는 사람이다. 그는 수차례나 세상을 놀래키며 시장의 기대를 뒤엎었다.


2020년 마지막 날 ‘블룸버그 억만장자 지수’(Bloomberg Billionaires Index)에 따르면, 중산산의 자산은 778억 달러로 집계되어, 인도 릴라이언스 인더스트리 회장 무케시 암바니를 넘어 아시아 최고 갑부로 등극했다. 1년 후, 후룬(胡潤)이 선정한 부호리스트에서도 중산산은 여전히 중국 최고의 갑부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2022년은 과학기술 소비의 해로 불린다. 모두가 과학기술계의 놀라운 성적표를 기대하고 있을 때, 중산산은 뛰어난 성과로 앞서 나가며 다시 한번 후룬 중국 부호리스트 1위에 올랐다. 2천억 위안의 문턱에서 발길을 돌린 다른 부호들과 달리, 그는 4천억 위안 관문을 돌파하여 20여 년 만에 중국 최고 갑부의 자산 기록을 경신했다. 


중산산을 ‘30분 갑부’라고 비웃던 호사꾼들은 마침내 침묵했다. 2위안에 불과한 농푸산취안 한 병이 기어코 중국 최고 갑부의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늘 짧은 머리를 유지하고 안경을 쓴 중산산은 이제 일흔 노인이지만 길에서 마주쳐도 명성 높은 최고 갑부임을 알아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 그의 차림새는 허름한 아파트에 살면서 글을 쓰는 문인에 가깝기 때문이다.





문인과 악당


“나는 성격상 아부를 못한다. 사람들과 교류하거나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부동산은 할 수 없었다.”


다른 기업가들이 사교와 접대로 바쁠 때, 중산산은 책 페이지를 넘기며 마음을 밝히길 더 즐겼다. 


중산산은 업계 인사들 사이에서 ‘고독한 늑대’로 불렸다. 고독한 늑대 기질에 담긴 고상함과 오만함은 젊은 시절의 ‘문인’ 중산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산산 사업의 중심은 문인 기질을 토양으로 한다. 저장(浙江)방송통신대학교 중문학과를 졸업한 그는 저장일보(浙江日報) 기자로 입사해 5년 동안 근무했다. 명예를 각별히 중시하고 절제된 자세를 보이는 중산산의 행동거지는 이러한 이력에서 연유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중퇴한 그는 미장공과 목수 일을 했다. 가오카오(高考: 중국 대학입학시험)가 부활한 후 2년 연속 시험에 응시했지만 모두 낙방했다. 다행히 방송통신대학의 등장은 그에게 운명의 기회를 열어주었다. 기자가 된 후 문인 중산산은 펜을 무기로 사람들을 구하고, 성공을 위해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 나갔다.


30세 즈음 ‘훙멍쉐(洪孟學)는 왜 떠났는가’라는 르포를 써서, 저장일보 편집장인 정멍슝(鄭夢熊)으로부터 논평 추천을 받았고, 인민일보의 추천도 받았다. 중산산은 기사에서, 독학으로 기술자가 된 훙멍쉐가 재능을 펼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훙멍쉐는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는 공장에서마다 어려움을 겪었다. 나중에 그는 화가 나 농촌 기업으로 발걸음을 돌렸고, 그곳에서 사업가로서 봄을 맞이했다.


중산산의 보도는 시대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었다. 당시는 국유기업이 강력한 힘을 휘두르고 있어서, 기업가가 뜻을 이루기 어려운 시기였다. 기사가 인쇄되고 출판되자 바로 돌풍을 일으켰다.


중산산은 훙멍쉐를 통해 자신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농촌에서 지내며 답답함을 느끼고, 사람을 우롱하는 시대를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훗날 중산산과 훙멍쉐 모두 부끄럽지 않은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말이다.


유명해진 후 중산산은 업계 거물들을 인터뷰할 기회가 더 많아졌지만, 영원히 부의 방관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매일 기자들은 수많은 부자 탄생 스토리를 써내려 갔다. 그 역시 조금만 발돋움해도 기회가 몰려올 것 같았다. 중산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회를 엿보던 그는 마침내 1988년, 좋은 기회를 맞이했다. 당시는 중국 정부가 하이난(海南) 경제특구 설립을 공식 승인한 때였다. ‘십만 대군’이 하이난으로 몰려갔고, 많은 창업가들이 가방을 둘러메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땅 끝까지 달려갔다. 중산산도 그중 한 명이었다.


당시 그는 하이난에서 중국 최초의 민간 신문인 ‘태평양포스트’(太平洋郵報)를 창간했지만 안타깝게도 사업은 흐지부지됐다. 그 후 그는 꿈꿔온 사업과 거리가 먼 버섯을 키우고, 새우 양식을 하고, 커튼을 팔면서 생활했다. 


중산산이 하이난에서 칩거하듯 지낸 3년은 식음료 기업 와하하(娃哈哈)의 전성기였다.


중산산이 하이난으로 떠나기 전, 같은 저장(浙江)출신인 쭝칭허우(宗慶後)는 빌린 돈 14만 위안을 가지고 항저우 와하하 영양식품공장을 설립했다. 쭝칭허우의 와하하는 드링크제로 큰 히트를 쳤고, 3년 만에 건강기능식품 시장에서 2위를 차지했다. 


당시는 지금의 비즈니스 시스템처럼 성숙한 시대가 아니었다. 많은 사업가들이 ‘악당’같은 모습으로 성공한 사람의 과실을 훔치며 지름길로 내달렸다.


와하하를 본 중산산 역시 기회를 잘 포착하는 ‘악당’의 면모를 드러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침묵하고 싶지 않았던 본능이 작동한 것이다.


우연한 기회로, 중산산은 하이난의 특별구역 특혜 때문에 와하하 드링크제의 하이난 유통가격이 다른 곳의 시장가격보다 낮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다시 고향인 저장으로 돌아갔고, 기자로 쌓은 인맥을 활용해 하이난과 광시(廣西)에서 와하하 에이전시권을 순조롭게 얻어냈다. 


‘고독한 늑대’ 중산산은 결코 좁은 땅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야망으로 가득 차 있어 ‘첫 번째 성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당시 광둥(廣東)지역은 와하하 상품이 부족했고, 시장가격은 광시와 하이난보다 훨씬 높았다. 중산산은 저렴하게 얻은 와하하 드링크제를 하이난에서 광둥성 잔장(湛江)으로 이동시켜 고가에 판매했다. 이는 명백히 금지된 ‘관할 외 지역 덤핑 판매’ 행위였다. 결국 불법행위가 드러나자 중산산은 와하하로부터 에이전트 자격이 박탈되었다.


이때 ‘악당’ 중산산은 자금 지원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있었고, 이미 와하하를 경험하며 노하우를 얻은 상태였다. 그는 못해도 쭝칭허우의 길을 따라 건강기능식품 산업에 진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자양강장과 장수 효과를 얻기 위해 거북이와 자라로 만든 보양탕을 마시는 것이 유행하고 있었다. 중산산은 이를 이용해 건강 기능성 환약을 만들고 싶었다. 그는 하이난 현지에서 노련한 전문가 3명을 고용했다. 약 반년 만에 ‘양생당 자라환약’(養生堂龜鱉丸)을 개발, ‘양생당’(養生堂)이라는 회사를 설립해 중장년층을 겨냥한 시장을 개척했다.


이때, 문인 중산산이 다시 나타났다. 그는 ‘자라환약을 아침, 저녁 두 알씩 먹으면, 매일 자라를 고아 먹는 것보다 낫다'라는 고전적인 슬로건을 내세워 황금기를 일궈냈다. 


마찬가지로 사업 성수기를 맞이한 이가 있었다. 바로 훙멍쉐다. 이전부터 서로의 재능을 아꼈던 두 사람은 마침내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양생당 주주 명단에서부터 눙푸산취안 설립까지 우정을 지속했다.


중산산이 단순한 마케팅 괴짜였다면 그의 비즈니스 이력은 눙푸산취안까지 지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항상 위기에 맞서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1995년, 전국의 자라 건강기능식품 브랜드는 큰 재난을 맞이했다. ‘포커스 인터뷰’라는 매체에서 ‘성다’(聖達) 브랜드가 중화자라진액에 흑설탕물을 섞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파장이 커지자, 중산산은 기자를 공장으로 초청해 양생당의 제조 과정을 취재하도록 하고, 여러 공익보건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신제품이 순조롭게 출시된 후, 중산산도 업계 진입 문턱을 높여 표절 시도를 차단했다. 불과 1년 만에 ‘자라 환약’은 전국적으로 팔려 나갔고, 중산산은 이로 인해 갑부가 되었다. 이때 중산산은 이미 성공한 건강기능식품 사업가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규제가 심해지면서 건강기능식품 산업이 혹한기에 접어들었다. 


이때 쭝칭허우와 와하하는 비즈니스 판도를 생수 분야로 확대하고 있었다. 바로 여기에서 쭝칭허우는 새로운 부의 전설을 만들어냈다. 강력한 유통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와하하 정제수(純淨水)가 중국 구석구석까지 뻗어 나갔다. 


고향으로 돌아온 중산산은 마찬가지로 생수 사업을 계획했다.





운반자와 초월자


저장으로 돌아온 중산산은 숨을 고르고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저장은 호수와 늪이 많은 지역이다. 이곳은 반짝이는 풍부한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고, 아낌없이 만물에 스며든다. 첸다오(千島) 호수는 만물을 키워내는 동시에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생명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절로 우러나오는 그 순간, 중산산은 돈의 노예가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 눈앞이 환해진 그의 영혼은 만물과 함께 대자연의 윤택함과 풍요로움 속에 빠져들었다. 창업 초기의 미성숙한 모델과 아이디어도 자연스레 깨끗이 씻겨 나갔다. 


악당처럼 따라하고 모방하는 것이 실제로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성공’의 대명사로 만들기에는 부족하다. 중산산은 항저우에서 양생당식수유한회사(養生堂飲用水有限公司, 후에 ‘눙푸산취안’으로 개명)를 설립했다. 그리고 그동안의 악당 기질을 버리고 마침내 진정한 기업가로서 첫 번째 획을 긋는다.


그는 자신과 회사를 ‘대자연의 운반자’라고 정의했다. 산업화의 질곡에 갇힌 사람들은 자연에 가까운 품질, 더 순수한 상태를 추구했다. 중산산은 창업에 대한 새로운 영감이 떠올랐다. 그는 천연수가 정제수보다 더 건강하다는 개념을 제시했다. 정제수 생산을 영구 중단하고 천연 미네랄 워터를 출시할 것이며, 눙푸산취안은 ‘물을 생산하지 않는다. 단지 대자연의 운반자일 뿐’이라는 슬로건을 내건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이 슬로건은 주요 TV방송국 채널에서 울려 퍼졌다.


이 슬로건을 증명하기 위해 눙푸산취안은 3가지 실험을 실시했다. 먼저 정제수와 칼륨, 나트륨, 칼슘, 마그네슘 및 기타 무기질이 함유된 눙푸산취안 물을 흰쥐에게 각각 먹였다. 정제수를 마신 흰쥐의 생존율은 20%, 눙푸산취안 물을 마신 경우는 40%로 나왔다. 천연수로 재배한 수선화는 정제수에서 재배한 것보다 더 건강했다. 혈액 2방울을 정제수와 천연수에 떨어뜨린 후 고속 원심분리기로 원심분리 했을 때 정제수 안의 적혈구는 터져버렸다.


타깃이 와하하의 정제수를 가리키자, 쭝칭허우는 그냥 앉아서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와하하는 다른 60여 곳의 회사와 함께 ‘불공정 경쟁’을 이유로 눙푸산취안에 소송을 제기했다. 눙푸산취안 역시 가만있지 않았다. ‘허위 사실 유포’라는 명목으로 와하하를 법원에 고소했다. 


중산산이 시작한 이 비즈니스 전쟁은 결국 눙푸산취안의 승리로 끝났다. 2012년부터 2022년까지 눙푸산취안은 10년 연속 중국 생수시장에서 시장 점유율 1위 자리를 지켰다. 이렇게 눙푸산취안은 생수 시장을 통일했다. 자신을 ‘대자연의 운반자’로 여기는 중산산은 대자연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눙푸산취안은 이미 둥팡슈예(東方樹葉), 차파이(Tea π), 눙푸궈위엔(農夫果園) 등 브랜드 음료 사업과 칭쭈이(清嘴) 캔디, 무친(母親) 소고기육포 등으로 대표되는 식품 사업을 파생시켰고, 모두 양생당을 통해 소유하고 관리했다. 



완타이바이오 인수


중산산은 대자연의 운반자일 뿐만 아니라 기술의 운반자이기도 했다. 눙푸산취안이 중산산의 지혜를 담은 자랑스러운 작품이라면, 완타이바이오는 그가 줄곧 숨겨온 필살기였다. 


건강기능식품 산업의 정상에서 우여곡절을 경험한 이후, 중산산은 ‘바이오 제약’이라는 완충 채널을 찾아냈다. 


2001년 눙푸산취안이 정식으로 이름을 바꾼 직후, 중산산은 1,710만 위안에 내놓은 바이오 제약회사인 완타이바이오의 지분 95%를 인수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에 샤먼(廈門)대학교의 샤닝샤오(夏寧邵)팀이 합류했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교수인지 아닌지, 수준이 어떤지 상관하지 않고 매일 밤 불이 켜져 있는 한 돈을 줄 것이다.”


그는 이처럼 거칠고 서툴러 보이는 인재 선발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샤닝샤오팀의 연구실 구성원인 장쥔(張軍)은 당시 양생당과 전국의 여러 연구실이 협력 관계를 구축했는데, ‘당시만 해도 우리가 가장 뒤쳐졌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불이 가장 늦게 꺼졌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중산산은 결코 그들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중산산은 자신의 이런 인재 선발 방식을 ‘맹신’했으며, 최종 선발된 인재에게 늘 후한 대우를 해주었다.


계약에 따라, 양생당은 샤닝샤오팀에 5년간 총 1,250만 위안의 과학연구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장쥔은 “당시 협상이 막 마무리가 되어 양측이 공식적으로 계약을 체결하기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생당 측은 30만 위안을 지불했다. 이에 우리는 매우 감동했다”라고 말했다.


완타이바이오를 인수한 지 19년 만에 완타이바이오와 샤먼대학교가 공동으로 개발한 2가 HPV 백신이 국가약품감독관리국의 승인을 받으면서, 최초로 승인을 받은 중국산 자궁경부암 백신이 되었다. 이와 함께, 9가 HPV 백신도 이미 임상 2상을 완료하고 임상 3상을 앞두고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졌을 때 완타이바이오는 앞장서서 체내진단시약, 체외진단장치 및 백신연구개발에 투자했고, 주가도 덩달아 폭등세를 이어갔다. 


이렇게 해서 당초 운반자를 자처했던 중산산은 마침내 초월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시대의 흐름을 타고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보내졌을 뿐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회사를 지키는 수호자


2013년 한 언론이 내보낸 보도는 중산산을 크게 분노하게 만들었다. 


‘눙푸산취안, 수돗물보다 못하다는 지적 받아’라는 타이틀을 단 기사는, 이제껏 중산산이 브랜드를 위해 직접 쌓아 올린 ‘고품질’ 이미지를 훼손했다. 연이어 그는 이 언론사의 관련 보도 76개를 통해 집중 ‘포화’를 맞았다. 


그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평소 얼굴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던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결사의 각오를 다지며 최초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장 안팎에 임시로 설치된 20m 길이의 게시판에는 이 사건을 다룬 모든 뉴스가 게시되었다. 중산산은 해당 언론이 눙푸산취안에 ‘여론 폭력’을 가했다며 일갈했고, 눙푸산취안 직원들도 기자회견장 각 위치에 배치되어 박수를 치고 고함을 질렀다. 회사 대표의 적극적인 방어로 ‘각 보도는 정정할 필요가 없으며, 모두 객관적인 보도’라는 해당 언론의 반격은 점차 힘을 잃었다. 


이 전쟁에서 승자는 없었고, 아주 긴 시간 동안 양측은 무너진 공신력을 회복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비했다. 결국 베이징 품질감독국이 조사에 개입한 이후, 중산산은 스스로 팔을 자르는 심정으로 베이징 콴거우(宽沟)에 있는 생수 공장의 폐쇄를 선언하고, 베이징 생수시장에서 영구적으로 철수했다. 


눙푸산취안이 여론 위기에 놓인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때마다 중산산은 직접 나서서 브랜드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거침없이 정면 승부하는 모습은 중산산이 갖고 있는 여러 면 중 하나이다. 그는 자신이 세운 브랜드의 수호자로서 역할을 해왔다. 위기에 직면하면 대부분의 기업가들은 방어적인 태도로 문제를 해소하려고 하지만 중산산은 오히려 더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다. 중산산에겐 존엄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결백이 이윤보다 더 중요하다. 그는 모두에게 “눙푸산취안의 존엄이 돈보다 더 중요하다”고 따끔한 충고를 하겠다고 맹세했다.



대자연에서 배운 지혜


중산산은 여러 차례 거친 풍랑을 겪었지만 속으로는 안정적인 삶을 추구했다. 휘하에 있는 두 기업이 상장하던 날도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에게 이것은 일상 속 작은 이슈에 불과했다. 대신 그는 말도 없이 1급 수원지를 시찰하거나 가고 싶은 곳을 다닌다. 


그는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고 철학적 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즐긴다. 좋은 생각은 중산산이 젊은이에 뒤지지 않는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다. 


“중국에서는 사업을 ‘셩이’(生意)라 하는데, 셩(生)은 생존을 뜻하고, 이(意)는 의미를 뜻한다. 즉 생존의 의미가 ‘사업’이라는 것이다. 기업의 최고 경지는 ‘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오래가느냐’이다. 나는 2000년 이전부터 기업의 수명 문제를 연구해 왔다. 지금 고려하고 있는 모든 제품은 100년을 고려해야 하고, 이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는 최고 부자의 교체가 경제의 궤도 변화일 뿐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의 성공을 일궈낸 자신의 능력이 초자연적이라기보다 시대가 그를 최고의 부자로 선택했다고 말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눙푸산취안이 장시(江西)에서 키운 오렌지를 가공해 오렌지 주스로 만들어 판매하던 당시의 일이다. 초보적인 실수로 오렌지 주스 생산에 문제가 생겨 눙푸산취안은 연간 2천만 위안 이상의 손실을 입기도 했지만, 농민들은 오렌지를 키운 대가를 처음에 약속한 대로 받았다.


2008년 원촨(汶川)대지진 발생 당시, 중산산은 눙푸산취안에서 기증한 생수를 가지고 지진 피해 지역으로 갔다. 재난 지역 안에 머물렀던 8박 9일 동안 그가 머무른 호텔은 이어지는 여진으로 위험했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 위험책임 서약서에 서명했다. 재난 지역을 떠나기 전, 그는 폐허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항저우로 돌아온 후, 그는 직원들에게 재난을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수차례 당부했다. 재난 현장 사진을 게시할 때 눙푸산취안 제품 사진을 선택하지 말고, 남들에게 쇼라는 인상을 남기지 않도록 주의시켰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비즈니스라는 정글에서 야만적으로 보내온 과거와 화해하기 시작했다.


한때 서로 반목했던 중산산과 쭝칭허우는 각자의 주력사업이 달랐기 때문에 자신의 자리에서 성공을 일구는 한편, 진작에 앙금을 풀었다. 


2016년 말 CCTV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쭝칭허우는 마윈이 제시한 ‘5대 혁신’(신유통, 신금융, 신에너지, 신기술, 신제조) 개념에 대해 “신기술 외에는 모두 헛소리”라고 평가했다. 


어떤 의미에서 중산산은 쭝칭허우의 관점에 동의했다. 그는 “인터넷은 중국 경제의 방향을 잃게 만들었고, 인터넷은 도구일 뿐 경제의 전부가 아니다”라며 거듭 강조했다. 두 사람 모두 대중의 이해를 얻지 못했으나 대신 모처럼의 공감대를 형성했다. 눙푸산취안이 여론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쭝칭허우는 항상 망설임 없이 나서 중산산을 대변하며 각별한 사이를 과시했다.


중산산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시끌벅적함 속에서 자신만의 정토를 개척하고 더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수호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끊임없이 타원을 그려내는 이유인 것이다.





출처: The Sage Investor 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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