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틀하지만 할 말은 하는 영국 시니어, 점점 말이 없어지는 한국 시니어 |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젠틀하지만 할 말은 하는 영국 시니어, 점점 말이 없어지는 한국 시니어

글 : 한혜경 / 작가, 前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2026-08-26

지난 6월 런던 여행을 다녀왔다. 올해 70세 생일을 맞은 H씨가 보낸 카톡 때문이었다. 


“더 늦기 전에 놀러오세요.” 


친구들은 런던에 사는 H씨의 초대를 받고 17일이나 그의 집에 머물렀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H씨에 대한 질문을 쏟아냈다. 어떻게 알게 된 사람이냐?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돈을 벌었길래 런던 시내에 집을 가지고 있느냐? 런던의 은퇴자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등등... 



런던의 은퇴자 H씨의 삶


H씨는 나의 시어머니의 친구의 딸이다. 그를 처음 만난 건 13년 전. 런던에 석 달이나 머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을 때, 그의 집 2층에 있던 방 하나를 빌리면서 인연이 시작되었다. H씨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직후에 직장에서 만난 영국인과 결혼하여 1980년에 영국으로 건너갔고, 부동산 중개업 등을 하면서 열심히 일하고 고생도 많이 한 덕분에 런던 근교에 3층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부동산 중개 사무실을 다른 사람에게 완전히 넘긴 상태에서도 혼자 살고 있던 큰 집의 빈방을 임대하는 등의 경제활동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H씨와 친해진 건 그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3년간 한국에 머물 때였다. 사생활에 관한 이야기라 자세한 내용을 밝힐 수는 없지만, 그때 H씨는 인생 2막을 시작할 가능성이 있는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고, 이 과정에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민을 나한테 털어놓고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가까워졌다.


그후 영국으로 다시 돌아간 H씨는 런던 중심가로 이사했고, 이번에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바로는, 대부분의 영국인이 그러하듯이 아이들과는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지내고, 정원 가꾸기에 진심이고, 런던의 살인적인 물가에 대처하기 위해 외식을 줄이고 집에서 케잌을 구워 친구들을 초대하고, 일주일에 한번 우크라이나 난민을 위한 푸드뱅크 자원봉사를 하고, 런던 시내로 이사한 후부터는 미술관에도 자주 가고 문화생활을 즐기는 등등... 전형적인 영국 은퇴자로서의 일상을 살고 있다.



여유롭고 친절해 보이는 영국 시니어들 


전에 런던 근교에서 지낼 때는 영국 시니어를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유행이 지난 듯한 옷을 깨끗이 차려입고 동네 ‘채리티 숍’ 직원과 가벼운 수다를 떨고, 도서관에서 신문을 읽고, 서점에서 책을 고르며, 이민자에게 영어 가르치는 일을 하고, 동네 축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주로 시니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런던 여행에서는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이 더 많이 눈에 띠었다. 



그런데 H씨의 생일 날 영국왕립원예학회가 운영한다는 위즐리 가든(Wisley Garden)에 가보곤 깜짝 놀랐다. 다양한 꽃과 나무, 멋진 풍경도 놀랍고, 영국 사람들이 얼마나 정원을 좋아하는지 새삼 깨달았지만, 더 신기한 건 거기 온 사람들이 거의 모두 머리 하얀 시니어들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평일이라 더 그랬겠지만 ‘혹시 내가 실버타운에 온 건가?’ 헷갈릴 정도였다. 꽃과 정원을 즐기 면서 천천히 걸어 다니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시니어들의 모습이 엄청 여유롭고도 멋져 보였다.


게다가 이번에 새삼 느낀 건 런던 사람들이 서울 사람보다 친절하다는 점이다. 시니어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오전, ‘리틀 베니스(Little Venice)’를 찾아가는 길에 만났던 두 명의 시니어 는 길을 자세히 설명해주곤 “좋은 시간 보내라.”는 인사말과 함께 일본 사람처럼 허리를 90도 로 굽혀 인사했다. 나중에 다시 한번 마주쳤을 때 오랜 친구라도 만난 듯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이리로 쭉 걸어가면 더 좋은 곳이 나온다.”면서 이번에도 또 90도 인사를 하는 바람에 웃음이 났다.



영국에서는 옆집 할머니를 조심해야 한다?


저녁을 먹으면서 영국 시니어들이 우리나라 시니어들보다 여유롭고 행복해 보이고 더 친절한 것 같다고 하자, H씨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들이 겉으로는 젠틀하지만 실제로는 깐깐하고 까다롭고.. 아유, 정말 만만치 않아요.” 



영국 시니어들이 만만치 않다는 건 나도 잘 안다. 길 가다가 여자 노인 다섯 명이 버스 앞에 서서 기사에게 항의하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는데,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버스 기사에게 허리에 손을 얹은 자세로 ‘그냥 넘어가지 않겠어’라는 포즈를 취하는 여자 노인들의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 같았고, 특히 그들의 위풍당당한 태도가 압권이었다.


교포들은 ‘옆집 할머니’를 조심해야 한다는 말도 많이 한다. 옆집에 사는 할머니가 커튼 뒤에서 내 집의 동향을 살피고 여차하면 경찰에 신고도 하기 때문이라는 것. 예를 들면, 11살 이하 어린이를 혼자 놔둔 채 외출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경찰에 신고하는 사람이 옆집 할머니고, 가뭄에는 정원에 호스로 물을 주지 말라는 등의 정부 지침을 따르지 않는 이웃을 신고하는 사람들 또한 옆집 시니어라는 것이다. 


H씨는 이런 이웃들 때문에 영국 생활이 녹록지 않고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고 하소연했다. 이해가 갔다. 우리네 정서로는 남의 집 일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고 그래서 이웃을 힘들게 하는, 한마디로 ‘까칠하고 오지랖 넓고, 무서운’ 시니어들인 것이다.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 시니어의 사명감


그런데 문득, 화는 잘 내지만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는 우리나라 시니어들이 떠올랐다. 우리 나라 시니어들이라면 어른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옆집 아이나 혹은 규칙을 지키지 않는 이웃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내 가족도 아닌 남의 집 일에 간섭해봤자 좋을 게 없다고 생각 해서 모르는 척하거나 입을 다물지는 않을까? ‘민폐’나 ‘혐오’의 대상이 될까 두려워 점점 더 말이 없어지는 시니어들의 모습이 떠올라서 마음이 무거웠다. 


이 점에서 영국의 시니어들이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오지랖 넓은 행동을 하는 건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사명감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니어들의 이런 사명감이야말로 한 사회를 건전하게 유지하고, 문화적 뿌리를 떠받치는 힘이 아닐까.


이번 여행이 특별했던 이유는 볼거리가 아니라 사람들이었다. 더 늦기 전에 놀러 오라고 말해 준 H씨, 그리고 런던이라는 도시를 사람 냄새나는 곳으로 느끼게 해줬던 사람들과의 만남이 화려한 관광지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아울러 어떻게 해야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바람직 한 선배 시민의 태도는 어떤 것일까에 대한 생각이 많아진 여행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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