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쓰고 죽겠다”는 말의 허상, 그리고 연금이라는 현실
글 : 조성환 / 산업정책연구원 연구교수, 경영학 박사 2026-05-11
요즘 또래 지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주 듣는 말이 있다.
“나는 돈 다 쓰고 죽을 거야. 자식한테 안 남긴다.”
처음에는 그 말이 꽤 당당하게 들렸다. 돈이 없는 사람에게서는 배부른 소리한다는 핀잔을 듣겠지만, 마치 자기 인생을 스스로 완결 짓겠다는 선언처럼 보이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도 대체로 비슷한 반응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 나도 그래”라고 맞장구를 친다. 누군가는 자식에게 기대지 않겠다는 독립의 의지로, 또 누군가는 상속·증여세에 대한 불만을 섞어 그렇게 말한다.
듣고 있으면 그럴듯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말이 점점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어쩌면 조금은 감정적인 선언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 보면 그 말 속에는 중요한 전제가 하나 숨어 있다. 바로 “내가 언제 죽을지 안다”는 전제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나는 개인재무설계 일을 30년 넘게 해왔다. 수많은 고객의 삶을 재무적으로 설계해 왔지만, 단 하나도 설계할 수 없었던 것이 있다. 바로 ‘사망 시점’이다. “돈을 다 쓰고 죽겠다”는 말은 결국 내 생애 마지막 날과 자산을 정확히 일치시키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내일의 주가도 맞추지 못하면서, 어떻게 인생의 마지막 날을 맞출 수 있을까?
80세까지 살 것이라 예상하고 계획을 세웠는데 95세까지 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미 자산은 소진되었고, 남은 삶은 누군가의 도움에 의존해야 할지도 모른다. 반대로 100세까지 살 것이라 생각하며 아껴 쓰다가 80세에 생을 마감한다면, 결국 그 자산은 남겨진다. 결국 ‘다 쓰고 죽겠다’는 계획은 어느 쪽이든 어긋날 수 밖에 없다.
나는 이 지점에서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얼마를 남길 것인가’보다 ‘어떻게 지속적으로 쓸 수 있을 것인가’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자산이 아니라 현금흐름이 노후를 만든다
은퇴 이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산의 크기가 아니다. 그것이 매달 얼마의 현금흐름을 만들어내느냐가 핵심이다. 노후의 삶은 생각보다 변수가 많다. 특히 의료비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증가한다. 나이가 들수록 병원에 갈 일은 늘어나고, 한 번의 치료가 생각보다 큰 비용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여기에 물가 상승까지 더해지면, 같은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더 많은 비용이 필요해진다.
그래서 나는 단순히 “연금이 나온다”는 사실보다, “그 연금이 시간이 지나면서도 충분한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가능하다면 물가 상승을 어느 정도 반영 할 수 있는 구조라면 더 좋다. 결국 노후의 안정은 자산 규모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현금흐름’에서 나온다.

자식에게 남길 것인가, 쓰고 갈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자식 이야기를 한다.
“돈이 있는 걸 알면 애들이 나태해진다”
“나라에 세금으로 뺏기느니 내가 쓰고 간다”
이 역시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 문제를 조금 다르게 본다. 돈을 남기느냐, 쓰고 가느냐는 결과의 문제일 뿐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가족과 어떤 관계를 만들어 왔느냐이다. 나는 자산을 ‘전달해야 할 물건’이라기보다 ‘관계를 만드는 도구’로 보는 편이다. 살아 있는 동안 배우자와, 자녀들과 더 좋은 시간을 보내고, 필요할 때 도움을 주고, 함께 경험을 나누는 데 쓰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우리는 완벽하게 계산할 수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일부 자산이 남을 수도 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반대로 예상보다 오래 살면서 자산이 줄어들 수도 있다. 그 역시 받아들여야 한다. 문제는 ‘남길까 말까’ 가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쓸 것인가’다.

결국 중요한 것은 ‘민폐를 끼치지 않는 삶’
내가 노후를 준비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은 단순하다. “누군가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 삶.” 자식에게 기대지 않아도 되고, 배우자에게 경제적 걱정을 남기지 않아도 되는 상태. 그 상태를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연금이다.
연금은 단순한 금융상품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도 유지되는 삶의 기반’이다. 내가 일을 하지 못하는 시점에도, 매달 조용히 생활을 지탱해주는 구조다. 그래서 나는 “얼마를 남길 것인가”보다 “얼마가 계속 들어오는가”를 먼저 본다. 그 기반 위에서 삶을 설계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제는 누군가 “나는 돈 다 쓰고 죽을 거야”라고 말하면, 예전처럼 쉽게 공감이 되지 않는다. 대신 이런 생각이 든다. ‘그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얼마를 벌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나누어 쓰고, 어떻게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는가이다.
노후는 계산이 아니라 관리의 영역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연금’이라는 안정적인 현금흐름이 있다. 남길 것을 걱정하기 전에, 세금을 걱정하기 전에, 자식의 태도를 걱정하기 전에, 먼저 나의 삶이 끝날 때까지 흔들리지 않을 기반이 있는지를 점검해보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위에서, 가족과 조금 더 따뜻한 시간을 보내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진짜로 남길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일지도 모른다.
조성환 산업정책연구원 연구교수, 경영학 박사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후 30여 년간 보험사, 증권사, 은행, 종금사 등 금융권 전반에서 상품 개발과 운용, 재무 컨설팅 업무를 맡아왔다. 미래에셋생명에서 16년간 임원으로 활동하며 퇴직연금 지원 및 영업을 담당하였고, 생명보험업계를 대표해 퇴직연금발전협의회 간사로 활동했다. 제도 도입 초기부터 퇴직연금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한 공로로 고용노동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또한 중앙일보 재산리모델링 자문단으로 6년간 활동하며, 개인과 가계의 노후자산관리 방향을 제시해왔다. 주요 저서로는 『프레임을 바꿔야 자산관리에 성공한다』, 『증권사 금융상품 101% 활용법』, 『평범한 여자들의 돈 버는 비결』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