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용유 사러 간 남편이 빈손으로 돌아온 이유 |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식용유 사러 간 남편이 빈손으로 돌아온 이유

글 : 한혜경 / 작가, 前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2026-04-01



대형마트 바로 옆에 사는 친구 A의 이야기다. 어느 날 저녁 준비를 하는 중에 식용유가 똑 떨어진 걸 알게 된 A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남편에게 “마트에 가서 식용유 좀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30분쯤 만에 돌아온 남편의 손은 빈손이었다. 빈손의 이유를 묻는 친구에게 그 남편의 대답은 “온 마트를 돌아봐도 ‘식용유’라고 쓰여진 병은 없더라.”는 것이었다.


친구는 할 말을 잃었다. 식용유의 본질이 뭔지 알지 못하는 남편에게 올리브유, 포도씨유, 해바라기씨유 등등 아무거나 괜찮다고 말하지 않은 건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럼 전화를 걸어서 물어보든지, 아니면 마트 직원한테 식용유 좀 찾아달라고 하면 될 일 아닌가.


그런데 처음엔 깔깔 웃자고 시작한 이야기가 점점 심각해졌다. 요즘 들어 여기저기 아픈 데가 많아서 걱정이라는 친구가 한숨까지 내쉬며 심란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좋니? 혹시 내가 먼저 죽거나 하면 (남편이) 어떻게 살아갈까, 참 한심하기도 하고 걱정이야.”



필연적 혼자의 시대, 살림 역량이 중요해진다


요즘 내 주변에도 점점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애초에 비혼인 친구도 있었지만, 나이 든 후에 이혼이나 졸혼, 혹은 사별을 겪으면서 혼자 살게 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긴 2025년 기준 우리나라 1인 가구가 1,012만 가구를 돌파하며 전체 가구의 42%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하니,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 김수영 교수의 신간, 《필연적 혼자의 시대》라는 책 이름처럼, 이제 너 나 없이, 누구나 혼자 살아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살림 역량이 부족한 건 성별이나 경제력을 가리지 않는 것 같다. 얼마 전에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대인관계도 풍부하고 돈까지 많은 70대 여성, L씨가 이렇게 하소연하는 소리를 들었다.


“솔직히 그동안 살림 안 하고 못 하는 걸 은근한 자부심으로 여기며 살아왔고, 평생 그렇게 살다 죽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혼자가 되어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노상 밥을 사 먹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일일이 남의 손을 빌릴 수도 없고,.... 아무리 돈이 있어도 스스로 밥 한 끼 챙기지 못하고 집안 살림을 해내지 못한다면 생활 무능력자가 되는 거고, 그러면 일상이 무너지는 건 시간 문제겠다, 싶어요.”



사정이 이러하니 식용유 하나 사올 줄 모르는 남자들이 혼자가 될 경우에 겪는 어려움이 크다는 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뿐인가. 남자들은 여자들에 비해 친구도 많지 않다. 여자들은 미장원에 가서도 친구를 사귀고, 동네 공원을 산책하면서도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함께 어울린다. 


뭐 대단한 걸 하는 건 아니다. 그저 만나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면서 정보도 교환하고 위로의 말도 나눈다. 반면 남자들은 평생 ‘활동’과 ‘목표’ 중심의 관계만 맺어와서 그런가, 목적 없는 ‘수다’와 시시콜콜한 ‘살림’에는 관심도 능력도 없다.



매일 만나는 친구들, 살림스승이자 보호자


그런데 얼마 전에 뭔가 새로운 희망의 길을 보여주는 남자 노인 네 명을 만났다. 복지관에서 처음 만나 4년째 만남을 이어오고 있는 80대 초반 남자 노인들이다. 이들은 혼자 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을 뿐 경제적 조건이나 살아온 과거, 가족 상황이 다 제각각이다.


중요한 건 이들이 ‘하루도 빼지 않고 매일’ 만난다는 점이다. 따뜻할 때는 동네 공원에서 만나기도 하지만, 요즘처럼 날씨가 추울 때는 동네의 대형 마트에서 만나 차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특이한 건 이들이 보통의 남자들과는 달리,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아도 사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고 농담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는 점이다.



이들은 서로의 ‘살림 스승’이자 ‘가족 이상의 보호자’ 역할도 한다. 항공사 셰프 출신인 한 멤버는 다른 이들에게 요리 노하우를 전수하기도 하고, 또 손재주 많은 멤버는 사진 편집과 종이접기를 가르쳐주기도 한다. 누군가 아플 때는 돌아가면서 간병하고, 입원할 때 보호자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한 멤버가 아내와 사별한 후 실의에 빠졌을 때는 다른 이들이 매일 전화를 걸어 밖으로 불러냈다고 한다. 


이들은 “누군가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가장 좋다고 말한다. 실제로 얼마 전에 놀러가기로 한 날, 한 명이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았을 때 경찰에 신고한 사람도 이들이다. 그날 약속 장소에 나가지 못했던 K씨는 이렇게 말했다.


“집에 와보니 수십 번 전화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 세상에 누가 나를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챙겨줄까 싶어서 뭉클했어요.”


매일 만나 함께 밥 먹으며 속마음을 털어놓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서로를 돕는 이들의 신뢰 관계가 부러웠다. 또 “같은 동네에 사니까 매일 만날 수 있다.”는 말처럼, 같은 동네에 살면서 매일 얼굴을 맞대는 ‘동네 친구’들이야말로 멀리 있는 자녀보다 훨씬 든든한 삶의 버팀목이 되어준다는 것도 실감했다.


누구나 혼자가 될 수 있는 시대에 진짜 행복한 사람은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살림 역량’을 갖추고, 매일 만나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진실한 친구’를 가진 사람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혹시 마트 진열대 앞에서 ‘식용유’라는 글자가 쓰여진 병을 찾으면서 ‘멘붕’에 빠진 적이 있는가? 혹은 오늘 하루 말 한마디 섞을 친구가 없어서 적적함을 느끼진 않았는가? 


그렇다면 지금 바로 앞치마를 두르시라고 말하고 싶다. 혼자서도 식탁을 차리고 집안일을 할 수 있어야 스스로를 돌볼 수 있다. 그리고 가까운 복지관이나 도서관의 문을 두드리고, 공원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보시라. 혼자 살면서도 서로를 돌보는 삶은 동네 친구와 함께 걷는 산책길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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