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책을 내면 뭐가 달라지냐고 묻는다면
글 : 한혜경 / 작가, 前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2026-02-09
그동안 써놓은 글을 책으로 출간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다는 지인 L씨가 물었다.
“책 내면 뭐, 달라지는 거라도 있나요?”
내가 대답했다.
“아뇨. 특별히 달라지는 건 없을걸요.”
역시, 그렇구나, 실망하는 표정을 짓는 그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꾸준히 글 쓰고 책도 내면 가끔 멋진 일이 생기죠. 아, 무엇보다 건강에는 확실히 좋을 겁니다.”

사실 전에는 글쓰기가 건강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온갖 질병과 노화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눈이 쉽게 피곤해지는 건 물론이고, 안 돌아가는 머리를 쥐어짜면서 이를 악물고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있으니 가뜩이나 부실한 몸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오래 앉아있는 게 고속 노화의 주범이라는데 책상 앞에 노상 앉아있어야 하질 않나, 게다가 성격마저 까칠해지니 사람들과의 관계도 어색해지고, 뭐 하나 이로운 게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하여 내 주변의 글을 꾸준히 쓰는 은퇴자들을 오래 관찰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지금은 글쓰기가 딴 건 몰라도, 건강엔 확실히 좋다고 확신한다.
‘나 괜찮은 사람이야’ 말할 수 있는 기회
글을 쓰면 우선 정신이 건강해진다. 특히 은퇴 후엔 더 그렇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나의 가치, 나의 몸값이 뚝뚝 떨어지는 느낌이 들고 마음이 위축될 때, 한마디로 내 존재감이 위협받을 때 ‘나 이만하면 잘 살아왔어.’ ‘나 괜찮은 사람이야.’ 라고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말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 나의 진면목을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을 때 ‘나 그런 사람 아니고 이런 사람이거든?’ 글을 통해 외칠 수 있다.
이렇게 계속 쓰다 보면 스스로 나 자신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존중하게 되는데, 이게 건강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나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남도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저절로 좋아진다.
물론 나에 대한 글을 발표할 때는 독자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흥, 다 자기 잘났다는 말, 보나 마나 뻔한 이야기야.”
“자기를 멋있게 포장하는 거, 너무 뻔뻔스러운 거 아냐?”
이런 말 듣지 않도록, 팩트를 너무 벗어나거나 너무 과장된 이야기는 쓰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조심할 필요는 없다. 인간은 누구나 양면적, 아니 다면적인 존재니까. 남에게 피해 주는 정도가 아니라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정도가 아니라면, ‘그래, 이것도 나야. 뭐 어때서?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라며 밀고 나가야 한다.

찐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눈물겨운 노력
글을 계속 쓰다 보면 내 글을 좋아하는 사람, 내 글을 기다려주는 사람도 만나게 된다. 그런 찐 독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나도 모르게 그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되는데, 이런 노력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
혹시 그가 ‘어라, 말과 행동이 다르네?’ 라고 비웃을까 봐 내가 쓴 글의 내용을 일상에서 실천하고 행동으로 옮긴다. 마음가짐도 가다듬는다. 그러다 보면 실제의 나보다 훨씬 긍정적으로, 열심히 살게 되는 것이다. 나만 해도, 저질 체력으로 이나마 버티는 건 꾸준히 글을 쓰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내 글을 읽어준 사람의 한마디가 불쏘시개처럼 내 마음을 타오르게 하고 엄청난 에너지를 줄 때도 있다. 얼마 전에, 내 책을 읽은 K씨가 말했다.
“전에 잠깐 봤을 때 느꼈던 선생님의 첫인상과는 달리, 글이 호탕해서 놀랐어요.”
아, 생전 처음 들어보는 ‘호탕하다’는 표현이 어찌나 맘에 드는지, 나는 최대한 호탕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해주었다.
“아마, 외모보다는 글이 진짜 나와 더 가까울걸요?”
‘와하하하’ 나도 모르게 호탕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리곤 결심했다. 그래, 올해는 호탕하게 살아봐야겠다. 그러려면 운동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

부정적인 마음이 나를 삼키지 않도록 작동하는 뇌
글쓰기는 뇌 건강에 좋고, 회복탄력성에도 도움이 된다. 글을 꾸준히 쓰다 보면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이걸 써볼까?’라는 마음이 드는데, 이런 마음이 힘든 순간을 한결 견딜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얼마 전에 갑작스럽게 수술을 받은 글쓰기 친구, A씨는 수술실에 들어가는 위급한 순간에 ‘그래, 이걸 써봐야지...’라고 생각하는 자신에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런 마음가짐 덕분에 빠르게 회복될 수 있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글쓰기가 뇌 건강에 좋다는 건 뇌과학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다. 고통스럽거나 힘든 마음이 들 때, ‘왜 고통스러울까?’‘왜 힘들까?’에 대해 자세히 쓰고 있노라면 뇌 안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그동안 과로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감정을 담당하는 편도체는 안정화되고, 이성을 담당하는 전전두엽이 활성화되는 것이다.
전전두엽은 글을 쓸 때마다 친절하게 알려준다.
‘당신이 그 질문 해주길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자, 내가 알려줄게. 그건 이래서 그랬던 거고, 저건 그래서 그랬던 거야...’
이렇게 친절한 전전두엽 덕분에 나를 힘들게 했던 그 사건이 객관화되면서 힘든 마음이 한결 가라앉는 것이다. 부정적인 마음이 나를 삼키지 않으니 건강에 좋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글쓰기의 좋은 점은 이 밖에도 많다.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 긴장감, 스트레스도 건강에 좋다. 뭔 소리냐고? 다 건강에 해로운 것들 아니냐고? 그렇다. 현역일 때는 다 피하고 싶었던 것들이다. 하지만 은퇴 후에 생각이 달라졌다. 스트레스나 부담감 같은 것들이 1도 없는 생활이야말로 얼마나 스트레스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으니까. 하루에 한두 시간, 최소한 30분쯤의 스트레스는 몸과 마음의 건강에 필수적이다.
글쓰기가 건강에 좋은 점 세 가지만 쓰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열 개는 너끈히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자꾸만 게을러지는 나의 뇌를 자극한 모양이다. 역시, 글쓰기의 효능은 탁월하다.
한혜경 작가, 前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책임 연구원과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나는 매일 은퇴를 꿈꾼다> <남자가 은퇴할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의 저서를 통해 베이비붐 세대 은퇴자가 겪는 다양한 이야기를 써온 작가이기도 하다 최근의 저서로는 본 사이트에 연재하고 있는 ‘나의 은퇴일기’ 내용을 토대로 한 <은퇴의 맛>, 저자가 진행하고 있는 ‘자기 역사 쓰기 프로그램’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기꺼이 오십, 나를 다시 배워야 할 시간>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