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에 만났던 ‘김부장’보다 요즘의 ‘김부장’이 더 짠해 보이는 이유 |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10년 전에 만났던 ‘김부장’보다 요즘의 ‘김부장’이 더 짠해 보이는 이유

글 : 한혜경 / 작가, 前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2025-12-31

“형, 내가 이 회사에서 25년 동안 어떻게 일했는지 형이 제일 잘 알잖아.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나 일 잘했잖아. 아니, 잘하잖아. 나 아직 쓸모 있는 놈이라고.”



최근에 방영된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에서 믿었던 직장 선배 백 상무로부터 좌천을 암시하는 최후통첩을 받는 순간 김낙수 부장(류승룡 분)이 한 말이다. 직장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법한 조직에 대한 트라우마가 떠오른다. 직장인들의 ‘웃으면서 볼 수 없는 드라마’ ‘아예 보지 않는다.’라는 반응이 쏟아졌다는 게 이해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내 주변의 은퇴자들조차 ‘보다가 꺼버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0여 년 전에 퇴직자 연구할 때 만났던 수많은 ‘김부장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회사와 직급이 영원할 거라고 믿었던 김부장들, 퇴직한 후에 가장 아쉬운 것이 명함이라고 말하면서 “딸 결혼할 때 내밀 명함이 있어야 할텐데..” 라며 명함 없는 삶에 대한 두려움을 표출하던 김부장들 말이다. 이들이 가장 아쉬워 한 건 명함 자체가 아니라 명함의 위 혹은 중간 부분에 크고 화려한 로고와 함께 써있는 회사 이름, 그리고 직위였다. 이들은 말했다. 


“내가 다니던 회사 이름이 곧 나였고, 부장이라는 직위가 나의 별명이었죠.”



요즘의 김부장이 더 짠해 보이는 이유


그런데, 드라마를 보니 요즘의 김부장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요즘의 김부장이 10년 전의 김부장보다 몇 배는 더 짠해 보였다. 그때는 ‘그래도 버틸 만하다. 아직 희망이 있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 사이 세상이 변했기 때문이다. 


즉 세상은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기업형 자본주의에서 금융형 자본주의로 변화했다. 그런데 드라마에 나온 김부장은 여전히 회사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전형적인 ‘회사 인간’ ‘아날로그 맨’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직장 상사를 ‘형’이라고 부르면서 지나치게 충성하고, 부하직원들에게는 ‘말로만 민주적인’ 꼰대의 모습을 보이면서 소통에 서툰 모습을 보일 때, 옆자리에 앉은 도부장에게 지지 않으려고 어울리지도 않는 명품을 사는 등의 찌질하고 자존감 낮은 행태를 보일 때, 그리고 대기업 부장이라는 ‘허울’에만 연연한 채 퇴직 후를 위한 경제적, 심리적 준비를 전혀 하지 못한 모습을 보일 때 너무 안타까웠다. 


더 안타까운 건 김부장이 퇴직 직후의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덜컥 상가를 구입했다는 점이다. 이 결정은 얼핏 보면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조급함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보다는 ‘나 이렇게 무대 뒤로 사라지고 마는 사람 아니거든? 나 아직 살아 있거든?’이라고 소리치고 싶은,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월세 받으면서 떵떵거리고 사는 모습을 보여주며 으스대고 싶은, 허세 가득한, 일종의 ‘가오’를 앞세우는 행동은 아니었을까.



김부장이 ‘인적 자산’ 활용 능력과 소통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김부장은 주변에 좋은 인적 자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혀 활용하지 못했다. 공인중계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아내, 그리고 허황된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고 미리 경고하기까지 했던 건물주 친구와 한 마디 의논만 했어도 덜컥 상가를 구입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그랬다면 ‘서울 자가’는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수명이 점점 길어지면서 10년 전의 50살과 지금의 50살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는 점이다. 김부장의 동기로 나오는 허과장이 “나같은 사람에게 100세 시대는 비극이야.”라고 말하는 장면이 너무나 짠하게 다가온 건 그게 바로 현실이기 때문이다. 돈도 돈이지만, 이렇다 할 일이나 사회적 연결망 없이 100세 시대를 산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한편 이 드라마에서 유일하게 멋진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 여성이라는 점은 흥미로웠다. 생산공장의 현장 작업반장(정은채 분) 말이다. 그는 온몸으로 현장을 누비고 다니면서 자신이 맡은 책임을 다하고, 직원을 대량으로 해고하려는 조직에 맞서 ‘나부터 먼저 해고해 달라’고 말하는 멋있는 리더십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런 멋진 모습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기에는 현실이 지나치게 엄혹하다. 조직 개편이라는 거대한 쓰나미가 불어닥치는 상황에서 곧 사라지고 말 조직 앞에 위태롭게 서 있는 공장 직원들이 너무나 안쓰럽게 느껴졌다. 



회사 명함이 없다면 나는 누구인가? 질문하게 하는 드라마


글을 쓰다 보니 너무 힘들고 아픈 이야기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고 마음이 무겁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를 꼭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오랜 회사 생활에 파묻힌 사람들에게 ‘00 회사에 다니는 000 부장이라는 명함이 없다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한다는 점 때문이다. 


직업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무엇이 알맹이이고 무엇이 껍데기인지 구분할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언젠가 벗어던져야 할 껍데기에 집착하기보다는 나라는 존재의 민낯을 직면하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더 발전시켜야 더 오래 일할 수 있는 세상이 되고 있다.


낯설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익숙한, 그래서 더 불편하고 회피하고 싶은 현실을 보여주는 드라마지만, 나를 돌아보고 나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이야기임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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